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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두브로브니크’에 있다
“리,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 함께 가자. 거긴 분명 따뜻하고 아름다울 거야.”
그들을 처음 만난 건 모스타르Mostar의 한 숙소였다. 한밤중 버스 정류장에 떨어져 임시 방편으로 급히 들어간 호스텔에서 그들을 만났다. 프랑스에서 온 로라, 영국에서 온 에릭과 데이빗. 발칸반도의 추위 속에서 만난 그들은 나에게 따뜻한 난로 같았다. 함께 두브로브니크에 가자는 그들의 말에 포근함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응해버렸다. 그렇게 난 내 대답을 책임지기 위해 한 달 전 이미 여행했던, 심지어 다음 목적지와 정반대인 두브로브니크행 버스를 탔다.
12월의 두브로브니크는 그들의 말처럼 따뜻했고 아름다웠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커다란 집 하나를 빌려 4일을 머물렀다. 아침에 먼저 일어난 사람이 자연스레 근처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왔고 눈을 뜬 순서대로 커피를 들고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로 나왔다. 누군가는 책을 꺼내 들었고, 다른 누군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놓아둔 커피가 완전히 식어갈 때쯤 우린 일어나 해변으로 향했다. 바다에 들어가기엔 조금 추운 날씨였지만 겉옷을 벗은 뒤 천천히 물 안으로 들어가 헤엄쳤다. 12월의 바다 수영은 매력적이었다. 해변엔 우리밖에 없었고, 우린 마음껏 웃고 헤엄치고 낮잠을 즐겼다.
해질 무렵엔 성 주위를 산책하며 노을을 감상했고, 저녁엔 성 안에 있는 펍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들과 어우러져 맥주를 마셨다. 어느 정도 취기가 돌 때쯤 우리는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모여 앉아 데이빗의 5유로짜리 우스꽝스러운 구제 점퍼를 서로 걸쳐보며 깔깔댔고, 서로의 여행 일기장을 돌려 읽으며 진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나도 마음속에 고이 숨겨둔 꿈 이야기를 조심스레 그들 앞에 털어놓았다. 그런 나의 용기가 민망하지 않도록 다들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Focus on your dream.”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 문장은 영어도, 한국말도 아닌 그 의미 자체로 내 마음 깊숙이 와 닿았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날 마지막 저녁, 해 지는 광경을 뒤로 한 채 구시내 쪽을 향해 걸어가며 로라가 말했다. “나는 공항이나 버스 정류장, 기차역 이런 곳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싫어. 그건 뭔가 너무 슬픈 기분이야. 그런데 우리 내일 버스 시간이 같아서 버스 정류장에서 작별 인사를 하게 되겠네… 꽤 슬플 거야 아마.” 우리는, 특히 나는 그녀의 말에 조금 우울해졌다. 다음 날 우린 다시 각자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나는 사라예보Sarajevo로, 로라는 스플리트Split, 에릭과 데이브는 코토르Kotor로.
모든 것은 기억되고 잊혀 진다. 이 순간이 지금은 너무나 소중해서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만 또다시 여행이 시작되면 많은 기억들이 이 기억 위에 쌓이고, 또 쌓여 어느새 잊히고, 잃어버리고, 꽤 많은 부분들이 무덤덤해질 것이다. 그것은 참 슬픈 일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참 아름다운 일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진 뒤, 그가 나를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또다시 헤어짐을 반복하며 나에 대한 기억을 점점 잊게 된다는 것.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시간만큼 난 또다시 새로운 만남 속,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느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슬프고 아쉬운 감정은 매번 비슷하게 다가왔지만, 이 과정 자체가 슬프면서도 무척 아름다운 일이라는 깨달음은 처음이었다. 그들과 뜨거운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버스에 올라탔다. 헛헛한 마음을 붙잡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책 《데미안》을 꺼내 들어 서문을 읽어 내렸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이들과의 만남 역시 오직 이곳에서 단 한 번 교차되는, 그러니까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만남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만남이 아름답게 보였고 슬프면서 감사했다. 사실 이 기억이 내 머릿속에서 아주 빠르게 잊혀 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그만큼 이 나흘의 시간이 내게 남긴 흔적이 꽤나 나를 아프게 할 것 같다.
두브로브니크 반예비치
Banje Beach
크로아티아에는 숨겨진 바다 수영 스팟이 많다. 해안가 길을 따라 걸으며 알려진 해변 말고 숨겨진 보석 같은 해변들을 찾아보길. 버스 정류장에서 올드 타운까지 다들 버스를 타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유가 된다면 해 질 무렵 그 길을 따라 걸어 보길 추천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올드 타운으로 넘어가는 길 중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의 해 지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글 사진 이옥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