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은 그녀의 것

박초은 — 시엔느

색이 또렷한 사람을 보면 시선이 간다. 그들은 어떤 조각을 곁에 두어도 자신의 색으로 부드럽게 끌어안을 줄 아는 사람이다. 또 뾰족하게 날을 세워 주변의 영역을 침범하기 보다,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채로 다른 누구보다 나에게 집중하는 사람이다. 여성 의류 브랜드 ‘시엔느Sienne’와 ‘앙뜨Antt’를 이끄는 디렉터 박초은을 만났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에게 머물던 시선은 쉽게 규정짓지 않는 취향으로, 작은 기쁨을 줍는 일상으로 나아간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표정과 말투,
전체적인 분위기가 하나로 모여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향기, 그러니까 아름다움이 되니까요.

나를 닮은 페르소나

집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비가 와서 그런지 집 분위기가 차분해 보여요.

어서 오세요. 시엔느와 앙뜨의 대표 박초은입니다. 원래 오전에는 햇빛이 안으로 쏟아지는데 장마 때문에 좀 어둡네요. 언덕을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더우신 것 같아서 차가운 음료를 가져왔는데, 코스터를 깔아드릴게요.

 

(한 모금 마셔보며) 음, 깔끔하고 맛있어요.

레몬진저티인데 차갑게 마시니까 좋더라고요. 천천히 드세요. 이건 《AROUND》 지난 호죠? 집에 《AROUND》 매거진이 열 권 정도 있는데, 로고 중 ‘A’가 텐트 모양을 닮았을 때니까 꽤 이전에 발행된 책일 거예요. 바뀐 거랑 비교해 보니까 사진 컬러가 선명해졌고 종이 재질이나 표지 느낌도 다르네요. 색달라요.

 

매거진을 이렇게 꼼꼼히 살펴보는 분은 처음이에요(웃음). 그러고 보니 뒤에 고양이 친구가 앉아 있네요. 대신 소개를 해주셔야겠어요.

이름은 네로이고 나이는 열세 살이라 할아버지 고양이예요. 네로가 세 살일 때 데려왔는데, 길거리에서 어떤 대학생을 막 따라다녔대요. 그분이 네이버 카페에 이 고양이를 입양할 사람이 있는지 글을 올렸고요. 제가 원래 결혼할 즈음, 유기묘 한 친구를 입양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카페에서 네로를 본 건데 털이 완전히 까만색이라 사진발도 잘 안 받는 모습이 정말 귀엽더라고요. 그 길로 십 년 넘게 함께 살고 있죠. 우리 근처에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은가 봐요.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면 무슨 이야길 하나 궁금한지 가까이 오곤 해요.

 

이름이 네로인 이유는 아마도….

맞아요. 검은 고양이라서(웃음). 네로! 제가 불러도 잘 안 쳐다보네요. 고양이 귀에 근육이 서른두 개 있다는 거 아세요? 그 근육이 전부 사람 말 모른 척하기 위해서 쓰인대요.

 

얄궂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에요.

저는 집에서 혼자만의 공간이나 시간이 필요한 편인데 고양이가 비슷해요. 가끔씩 심심해하면 빗질도 해주고 놀아주는데, 다 되었다 싶음 쿨하게 떠나버려요.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밥 먹으러 가기도 하고 행동 방식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런 부분이 저랑 잘 맞긴 해요. 무엇이든 예측 가능한 건 약간 지루하잖아요.

 

얼마 전에 여기로 이사 오셨다고 들었어요.

두 달 정도 됐어요. 이전에 살던 곳은 용산역 근처 아파트였는데 ‘용리단길’이라고 부르는 동네가 저랑 잘 안 맞아서 집에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더라고요. 7개월 정도 살다가 새로운 집을 찾아 녹사평역과 이태원역 사이로 오게 됐어요. 여기가 지은 지 20년이 넘은 빌라래요. 그래서 인터폰도 옛날 그대로고 창이나 방 문고리도 앤틱 가구처럼 독특하죠. 주상 복합이나 브랜드 아파트보다 수도 시설 같은 건 약하지만, 저는 이런 곳에서 편안함을 느껴요.

 

나와 잘 맞는 집과 동네를 찾으셨네요. 요즘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시엔느의 다음 시즌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요. 일과 여가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편이라,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거실에 있는 큰 테이블에 앉아 이어서 일하곤 해요. 집이라는 공간의 문턱을 넘는다고 해서 일에 대한 집중이 한순간에 확 풀어지진 않거든요. 일상을 겸하며 작업하는 거죠. 예를 들어 반신욕을 하면서 브랜드 콘셉트를 생각해 보는 거예요.

일과 휴식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하루가 피로하지 않나 봐요.

저에겐 집이 일과 일상을 겸하는 곳이다 보니까 오히려 편해요. 그리고 온전히 내 맘에 드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요. 만족감을 주는 공간이 있다는 게 삶에서 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집을 떠난 이유를 하나 짚어보면 주변에 갈 만한 카페가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임경선 작가의 《다정한 구원》이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있더라고요. “다분히 사소해 보이는, 지극히 비실용적인 이유 하나가 때로는 그 외의 모든 중요하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압도해버리고 만다. 그쯤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한 이유가 아니라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절대적인 이유가 된다.”

 

사는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이 드러나는 게 집이잖아요. 거실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게 수북한 책이었어요. 책을 좋아하나 봐요.

그런데 궁금한 게, 이 정도가 많은 건가요?

 

그럼요. 큰 책장을 가득 채웠는걸요.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완독가는 아니에요. 이 중에서도 완독하는 책이 있다면 두 번 이상 읽을 정도로 좋아하는 거고, 대부분은 읽다가 중간에 멈추고 다른 책을 들춰보는 편이에요. 책을 사두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보기도 하고요. 최근에 읽는 건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라는 소설인데요. 이 책은 2017년에 사서 바로 읽을 때는 별 감흥이 없다가, 최근에 다시 펼쳐보니까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평소 에세이나 시를 즐겨 읽는데 간만에 소설에 푹 빠져서 읽고 있어요. 얼마 전에 읽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도 비슷했어요. 7-8년 전에 읽었을 때에 비해 제 환경이나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인지, 세밀한 심리 묘사에 완전히 몰입했죠.

 

집에 와서도 작업이 이어진다고 했는데 책은 주로 언제 읽으세요?

토요일 오전, 집 근처에 있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는 게 저만의 루틴이에요. 가게가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 가서 라떼를 마시면서 책장을 넘겨요. 그리고 잠들기 전에 침대 곁에 두고 더 읽고요. 책을 매일 몇 장씩 읽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어요. 원래 자기 전에 휴대폰으로 쇼츠나 릴스를 보곤 했는데, 무언가를 잔뜩 봤는데도 공허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책을 펼치는 거예요. 두 장 정도 읽으면 잠도 잘 오고요(웃음).

 

무의미한 시간에서 벗어나는 좋은 습관 같아요.

그래서 저는 자기 전에 제일 행복해요. 침대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행복을 느끼거든요. 일상의 루틴은 성실한 행복을 주나 봐요.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시엔느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요.

예전 이야기를 하는 게 새삼 쑥스러운데요. (잠시 생각한다.) 2016년에 데일리룩이나 제 취향을 담은 일상을 블로그에 공유했어요. 당시에 광고 기획 대행사를 다녔는데 매일 야근하면서 일했고, 일하는 법과 근성을 터득해 나가던 시절이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블로그를 사람들이 좋아해 주었고 소통도 하면서 블로그 마켓으로 연결되었어요.

 

그렇게 탄생한 시엔느를 통해 좋아하는 옷을 일로 삼게 된 거죠.

입는 목적으로서의 옷보다 스타일링처럼 큰 그림을 보는 일을 좋아해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저만의 미학을 찾곤 하죠. 브랜드 디렉터로서 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요. 디자인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컨펌을 하는 건 물론이고, 어떤 상황에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고의 전략을 찾는 게 제 일이에요. 중간에 어딘가 꼬인 듯한 부분을 발견하고 풀어나가다 보면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재밌어요.

 

에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모여 만드는 미학이란 무얼까요?

소재감이나 컬러가 완전히 다른 것들을 매치해서 한데 어우러지도록 만드는 거예요. 소녀 같은 옷에 트랙팬츠를 입어서 실루엣에 변화를 주는 방법도 있을 테고요. 시엔느의 제품을 예로 들면, ‘그랜파 스웨터’라고 실이 두툼하고 품이 좀 넉넉한 베이지색 겨울 니트가 있는데 거기다 초록 바지를 입는 거죠. 나아가서는 옷 자체보다 생활의 미학으로도 이어질 거예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표정과 말투, 전체적인 분위기가 하나로 모여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향기, 그러니까 아름다움이 되니까요. 외적인 부분뿐 아니라 내적인 부분에서의 노력과 겸손, 경험과 배움, 자신을 성찰하는 노력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함께해야 진정한 미학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시엔느만의 아름다움이네요. 옷을 다룬 시간을 햇수로 따지면 10년이 다 되어가요.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느꼈을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에요. 관심 분야가 굉장히 다양해서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는데요. 한번은 노래를 잘 못하는 것 같아서 근처 고수들을 찾아주는 ‘숨고’라는 앱을 통해서 발성을 배워본 적이 있어요. 수영도 배워보고요. 문제는 지속력이 부족해요. 금세 흥미를 잃다 보니 내가 오래 한 게 뭔지 떠올려보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 일은 10년 가까이 한 거니까 누가 봐도 좋아하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요? 좋아하는 걸 입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요. 지금도 옷장에 시엔느 옷이 가장 많아요.

 

브랜드를 통해 자신과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을 텐데, 어떤 마음이 들어요?

처음으로 드는 건 당연히 감사함이죠. 헤어스타일이나 룩북의 코디를 그대로 하고 오시는 분들도 있어서 무척 반가워요.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잘 잡으려고 하는데요. 내 취향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주변에서 전해주는 피드백을 마음에 담아두거나 무조건적인 수용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취향을 지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영역이 있어야겠어요. 여전히 블로그를 통해서 대표님의 일상과 브랜드 이야기를 나누고 있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우선은 저를 위한 기록의 목적이 있고요. 거기다가 시엔느가 대화하는 브랜드라고 생각해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글을 남겨요. 옷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가 쉬이 놓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일종의 고집이랄까요. 그러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과정에 담긴 히스토리와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생각이 중요한데 홈페이지에서 상품이 공개될 때는 단편적으로만 보이잖아요. 좀더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으로, 우리의 백스테이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셨잖아요.

지금은 자고 있어요(웃음). 생각보다 제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말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요.

 

말과 글의 차이는 무얼까요?

글은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고 수정하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신중히 적어갈 수 있는데,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요. 내뱉는 순간 끝나버리는 거니까 어렵더라고요. 저한테는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한 영역이에요.

 

시엔느라는 이름은 불어로 ‘그녀의 것’이라는 뜻이라고요. 대표님이 직접 지은 건가요?

이름은 동생이 지어줬어요. 브랜드를 통해 내 취향에서 비롯된 것들을 자유롭게 보여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걸 듣던 동생이 번뜩 떠올려줬죠.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어요.

 

옷을 다루는 브랜드마다 지향하는 스타일이 있잖아요. 이런저런 표현보다 한 사람, 페르소나로 상상해 보고 싶어요. 시엔느를 입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음…. 저와 닮은 사람?

 

대표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아까 제가 《스토너》를 읽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 주인공과 비슷한 것 같아요. 책에 있는 설명을 읽어볼게요.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오늘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당신을 위한 이야기.” 그러니까 주변 상황에 쉬이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 아름다움이 외적인 이미지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미학에 대한 동경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거기다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일 거예요. 그래야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느낌으로 표현될지를 의도할 수 있으니까요. 혹시 너무 진지한가요?

 

앞선 답변이 진지했다면 이번에는 가볍게, 그 사람은 이 계절에 어떤 옷을 고를까요?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조금 곤란하겠죠(웃음). 해가 쨍쨍한 여름을 떠올려볼게요. 상의는 슬리브리스를, 하의는 데님 쇼츠를 입을 거예요. 선글라스 하나 챙기고 아침에는 머리를 덜 말리고 나가는 거죠. 화장은 옅지만 립스틱은 바르고 좋아하는 향수를 뿌릴 것 같아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네요. 오늘 대표님이 입은 옷을 소개해 주세요.

손목에 시엔느 로고가 새겨진 연한 하늘색 셔츠예요. 가을에 준비 중인 콘셉트와 연결돼서 요새 무척 좋아하고 관심이 가는 색이죠. 제가 옷을 고를 때, 어떤 옷을 좋아한다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려워요. 지금의 기분이나 상황, 계절에 따라서 다르게 입는 걸 좋아하거든요. 날마다 나에게 맞춰 변주를 하는 거죠.

장면으로 쌓이는 취향

시엔느의 여름을 나눠보고 싶어요. “모든 삶은 정원에서 펼쳐진다.”는 문장에서 시작된 컬렉션을 공개했죠. 그린과 퍼플처럼 선명한 컬러와 더불어 플로럴 계열의 패턴도 돋보였어요.

계절에 맞춰 컬렉션을 공개하는데, 컬렉션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한 해의 테마가 있어요. 작년에는 ‘사랑’이었다면 올해는 ‘사람’이 중심이 되었죠. 지난해에 계속 곱씹어본 사랑을 누가 만드는지 떠올려보니까 다름 아닌 사람이었어요. 식물이 만발하는 여름의 계절을 준비하다 보니 저에게 모든 사람의 삶은 정원과 같은 의미로 느껴지더라고요. 정원 안에 핀 꽃들이 향기를 내듯, 사람도 좋은 향기를 내야 한다는 게 생각의 종착점이었어요. 인간관계나 선한 영향력, 나만의 취향 같은 게 전부 향기일 테고요.

 

한 해를 이끌어갈 중심 메시지가 대표님의 시선 속에서 탄생하네요.

맞아요. 그 메시지가 한 시즌을 구성하는 소재로만 소비되는 게 아니라 브랜드의 가치관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작년에는 그때 제가 하던 생각들, 올해에는 현재 맞닿은 고민들이 투영됐고, 아마 내년에는 미래의 제 마음에서 시즌이 시작되겠죠. 패션이라는 장르가 어찌 보면 제한적으로 보이겠지만, 가치관과 철학을 비주얼로 어떻게 풀어내거나 결합할지 고민하는 것에서 자유로운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팀원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는 데요.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영감이나 힌트를 얻기도 해요.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한다고도 들었어요.

늘 고민하던 부분인데 최근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생각해 보고 있어요. 시엔느의 이름을 지어준 동생과 자주 대화를 나눠요. 동생이 유럽연합의 규제와 관련되어 세계 상황과 흐름을 살펴보는 일을 하다 보니, 각 문화나 장르에 어떤 이슈들이 있는지 좀더 민감하게 알고 있죠. 패션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것들, 의류 폐기물이나 의류를 태웠을 때 나오는 화학 성분 이외에도 지속 가능성이 큰 화두더라고요. 작은 기업이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꾸준히 고민을 나누고 있어요. 결국은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최선이더라고요.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것 이면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네요. 시엔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어요?

우리의 슬로건이 “시간의 흐름에 매료되다Charmed By Time”예요. 한마디로 옷장 속에 오래 남아 있는 옷이라는 뜻이죠. 저부터도 시엔느의 지난 시즌 옷들을 여전히 입고 있고, 구매하는 분들도 오래 입을 수 있도록 튼튼하면서 유행을 크게 타지 않는 우리다운 제품을 만들어요. 비닐 테이프를 쓰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아예 테이프가 필요하지 않은 박스를 사용하고요. 사실 인간이 살아갈 때 옷뿐만 아니라 편리를 누리는 모든 것에는 전부 뒷면이 있을 거예요. 저는 패션계에 있으니까 이 분야가 더 잘 보이는 거고, 각자의 세계에 따라 시야에 들어오는 게 다르겠죠. 내가 속한 자리에서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한 번에 무리해서 점프하려고 하기보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가 볼 거예요.

 

그 걸음에 응원을 보탤게요. 옷을 만드는 사람들은 한 계절을 앞서 나간다고 하잖아요. 지금은 무더운 여름이지만 시엔느의 추운 계절은 어떤 모습일지 살짝 들려주실래요?

우리의 낭만에 대해서 말할 거예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거기서 그들만의 동굴에서 시를 낭독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때때로 인생은 보이지 않는 철학 전쟁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외부와의 투쟁 같은 거죠. 동굴 안에서 시를 읽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이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은 무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이번 《AROUND》에서는 옷을 고르고 입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요. 그 행위에서 내 취향과 성향이 드러나잖아요. 외출을 앞둔 대표님을 상상해 본다면 그날 입을 옷을 어떻게 고르세요?

깊게 생각하지 않아요. 미리 골라놓은 건 말도 안 되고 집히는 걸로 입어요(웃음). 회사로 출근할 때는 화장도 잘 안 하고 편하게 가요. 다만 날씨나 장소에 따라 맞는 옷을 고르고 상하의를 따로 생각하기보다 전체적인 모양새를 가늠해 봐요. 날마다 내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가 다르니까요. 운동을 가더라도 좀더 내추럴하게 보이고 싶은 날이 있잖아요.

 

그럼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어떤가요?

벗자마자 정리할 때도 있긴 한데, 대부분은 옷방에 있는 긴 의자에 올려둬요(웃음). 나중에 한꺼번에 치우는 편이거든요. 저는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나 봐요. 안팎으로 관심 분야나 일에 온 집중을 했다면 나머지는 손을 놓아버려요. 좀 ‘귀차니즘’이에요.

 

블로그에서 이런 기록을 본 적 있어요. “과해 보이나 과하지 않은 나만의 밸런스 기준을 찾았을 때” 자신의 취향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고요. 어떤 의미인가요?

오랫동안 나만의 분위기를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정석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서 어떤 방법인지 묻는다면 매번 다를 거예요. 예를 들어 옷을 격식 있게 갖춰 입었다면 머리 손질은 덜하거나, 편안한 옷을 입었다면 머리는 오 대 오 가르마에 젤을 발라서 꾸밈에 균형을 맞추는 거죠. 또는 컬러가 강하거나 힘을 잔뜩 준 옷을 입었다면 가방은 에코백을 들어서 긴장감을 덜어내요.

 

집히는 걸 입는다고 했지만… 균형을 맞추는 적절한 센스도 필요해 보여요(웃음).

물론 스스로를 잘 아는 기질을 타고난다면 좋겠지만, 사람은 살면서 맞이하는 경험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내가 세운 기준이 깨지고 다듬어지면서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알게 되고요. 경험이 모여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룰 거예요. 그리고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은 무척 주관적인 표현이잖아요. 저한테 그 말은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뜻하는데, 첫째는 나를 잘 아는 사람이고, 둘째는 트렌드를 찾아서 나한테 적용하는 데 열정적인 사람이에요. 자신은 어떤 쪽이 편한지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텐데 대표님 취향은 변함없이 그대로인가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긴 해요. 다만 경험의 영역이 쌓이다 보니까 ‘이게 취향이 변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죠. 예전엔 무언가를 보면 온갖 감탄과 경이를 느끼면서 아름다움을 만끽했는데 다시 보면 그만큼의 감동이 와닿지 않을 때가 있거든요. 너무 많은 것을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도파민 지수가 높아져서 아름다움에 대한 역치가 높아진 건지 모르겠지만요. 어쩌면 둘 다 이유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자연스러우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걸 보면 변함없이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요.

옷을 만들고 입는 일상에 대해 한바탕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문득 옷 이외에 대표님이 좋아하는 것은 무얼까 궁금해져요.

책을 읽거나 옛날 영화 보는 걸 즐기고 그림도 좋아해요. 그런데 제가 추상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특정한 무언가를 콕 집어내기보다 어떤 상황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어젯밤을 떠올려 예를 들자면, 온전한 나만의 공간에서 반신욕을 하면서 책을 읽는 시간이 굉장히 만족스러웠어요. 테이블에 놓인 꽃 자체보다는 이 자리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꽃을 바라보는 순간을 좋아해요. 단순히 영화를 좋아한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은 저에게 일차원적으로 느껴져요.

 

취향을 장면으로 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고 보니, 블로그에서 일상의 ‘작은 기쁨’을 준비하고 만끽하는 데 심취해 있다던 글이 떠올라요. 여전히 그런가요?

맞아요.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무얼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들이에요. 토요일 오전에 단골 카페에 가는 것도, 여행 갈 때마다 즐겨 찾는 숙소나 음식점이 있다는 것도, 날마다 좋아하는 향수를 골라서 뿌리는 것도 전부 작은 기쁨이에요. 지금 마시는 아이스티가 나뿐만 아니라 에디터님도 맛있다고 하는 게 즐겁고,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이 정말 맛있어서 카페 직원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마찬가지죠. 말하면서도 정말 사소한 순간이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예요(웃음).

 

그걸 작은 기쁨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큰 기쁨은 물질적인 무언가를 말하는 걸까요?

그러게요. 크고 작음의 기준은 아마 모두가 다를 텐데요. 만약 내가 원하는 선물을 받았을 땐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받았을 때 기쁜 이유는 무얼 좋아할지 고민했을 상대방의 모습과 마침 그 선택이 내 취향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크고 작음의 기준이 물질적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어디 멀리 가지 않고 내가 앉은 자리에서 쉽게 발견하는 기쁨이라 작다고 말하게 되나 봐요.

 

사소해 보여도 일상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건져 올리는 모습이 닮고 싶어져요.

요즘에는 이런 행위가 건강하고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아침에 러닝을 했는데, 저 되게 못하거든요. 그냥 광화문 근처를 가볍게 도는 건데 그때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 말을 꺼냈더니 친구가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건강하다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면 아름다운 걸 보면서 감화될 수 있는 틈이 생겨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만 알아서 문제예요(웃음).

 

나 한 명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걸요(웃음).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겨요. 옛날의 초은은 지금의 초은을 상상했을까요?

저는 이런 모습을 상상한 적이 전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신기한 게 이십 대 초반에 워킹 홀리데이를 가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까 나중에 옷 가게 사장님이 될 거라고 적어둔 거예요. 그런 말을 쓴 것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어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아는 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나 봐요. 이후에는 대표님을 또 어디로 데리고 갈까요?

사업상으로는 목표를 세워도 제 인생의 목표는 세워본 적이 별로 없어요. 나라는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이제 곧 마흔인데 사십 대는 지금과 또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돼요. 한 가지 꼭 지키고 싶은 건 제가 머무는 자리에서 좋은 영향력을 주고 싶다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았으니 내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말하고 싶어요.

한바탕 쏟아지는 비로 밤중처럼 까맣던 하늘이 긴 대화를 마칠 즈음에는 환하게 갰다. 이야기 내내 주변을 머물던 네로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둥근 잔 가득 채워진 차 한 잔을 맛있게 비웠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대화를 통해 우리 사이에 놓여 있던 낯선 기운은 옅어졌다. 문득,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초은 대표가 말하는 작은 기쁨이란 이런 걸까. 좋아하는 걸 장면으로 기억하고 풀어내던 그처럼 나의 기쁜 순간을 하나하나 소리 내어
긴 문장으로 풀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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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장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