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씁쓸한 나의 도시

산호 — 만화가

부산의 면면을 들여다보며 자란 만화가 산호에게 출판사 삐약삐약북스로부터의 제안이 도착했다. 바로 이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단편 만화를 완성해달라는 것. 그녀는 주저없이 상상의 실마리를 풀어내어 흩어진 부산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는다. 비 오는 날의 바다처럼 먹빛의 머리칼을 가진 인어가 사는 광안리. 산호만이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에서 달콤씁쓸한 도시가 겹쳐진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먼저 소개로 시작해 볼까요? 

만화와 일러스트를 그리는 산호라고 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김해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산호라는 이름은 필명인가요? 이름의 붉고 선명한 느낌이 그림체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가요? 환경 단체에서 신문 기사를 취합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어요. 해양 관련 기사를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산호라는 생물이었어요. 그러니까 산호초를 말하는 건데, 해양이 오염되면서 조금씩 멸종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을 때, 산호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큰 의미 없이 지었지만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작업과 뉘앙스가 겹치는 것 같아요. 사실 친구들한테는 겉멋 부린다고 산호랑이의 줄임말이라고 한 적도 있어요(웃음). 

 

산호랑이는 정말 강렬한데요(웃음). 여기는 혼자 쓰는 작업실 겸 집인가 봐요. 어쩌다가 김해로 오게 됐어요? 

고향은 부산 강동동이에요. 초등학교 때 김해로 온 가족이 이사 와서 고등학교 때까지 머물다가 대학은 다시 부산으로 갔어요. 영화와 영상을 전공했고요. 본가는 항상 세를 들어 살았기 때문에 저만의 공간에 대한 열망이 컸어요. 혼자가 되어서 지내봤으면 했죠. 3년 전쯤 독립했고, 프리랜서로 집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까 작업 공간이 넉넉한 집을 찾다가 이곳 진영읍으로 오게 되었어요. 

 

어릴 때 바라본 부산은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광안대교가 갓 생겼을 때가 떠올라요. 지금은 주변에 높은 아파트가 많잖아요. 그때는 시야를 가리는 게 없다 보니 해변이 더 넓고 하늘이 더 가까운 느낌이었어요. 어릴 때 본 바다 풍경은 참 여유로웠는데 지금은 반짝반짝하고 바쁜 도시가 되었죠. 변화가 일어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올 수록 필연적으로 오염이나 해양 쓰레기 문제가 생길 거예요. 반면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여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운 모습이 없어지는 건 아쉽지만 변화를 마냥 나쁘게 바라보진 않아요. 

 

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요? 

당연히 사람이죠. 부산 사람들은 참 시원시원해요. 예를 들어 제가 손가락을 다쳤어요. 그럼 “뭘 그런 걸 부주의해 가지고 다치냐!” 하면서 품에서 밴드를 꺼내 줘요. 거친 다정함이라고 할까요. 바다 끼고 사는 사람들 특유의 기운인 것 같아요. 그리고 부산은 이야깃거리가 정말 많은 도시예요. 역사적, 지리적으로도 여러 요소가 한데 섞여 있고 번화한 것 바로 옆에 굉장히 낡은 것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죠.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 이 도시에서 산호 씨만의 아지트는 어디예요? 

딱 한 군데만 꼽는다면 다대포해수욕장이요. 제가 본 일몰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습지를 낀 바다여서 산책하기 좋고 번잡하지도 않죠. 주변 사람들에게 다대포를 자주 홍보하는데, 이 말을 꼭 해요. 혼자 걷고 혼자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대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바랄 때 들러볼게요. 산호 씨가 작업한 만화 《지역의 사생활 99 : 부산》 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까요? 비수도권을 조명하는 프로젝트라고 알고 있어요. 

우선 ‘지역의 사생활’ 프로젝트는 전북 군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출판사 삐약삐약북스에서 시작된 거예요. 독립만화 전문 출판사인데,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콘텐츠를 고민하는 곳이죠. 많은 주목을 받는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벗어나 그 외 지역을 주제로 만화를 그려 대중에게 알리는 거예요. 보통은 해당 지역 출신의 작가가 작업하고요. 저는 전주의 한 마켓에 참여하러 갔다가 삐약삐약북스 대표님들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작업물을 보시더니 프로젝트 만화를 기획 중인데 관심 있냐며 제안해 주셨어요. 기꺼이 응했죠. 

 

흔쾌히 수락한 이유가 궁금해요. 

비수도권을 조명한다는 목적에 공감했어요. 어릴 때부터 접하는 드라마나 소설 같은 미디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도, 뉴스에서 기준이 되는 것도 서울이잖아요. 예를 들어 뉴스에서 여의도 면적의 산림이 불탔다고 하면, 지방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큰 건지 감이 잘 안 와요. 한국이 수도권에 많은 게 집중되어 있는 곳이니 다른 면을 비추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침 그때 계획하던 원고가 광안리해수욕장에 인어가 나타나는 내용이었어요. 알맞게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했죠. 인구 350만 도시를 내가 대표해서 작업하는 게 맞을까 잠시 고민도 했는데, 부산이라는 도시를 정말 좋아하니까 온 사랑과 마음을 담아서 그렸어요. 나고 자란 도시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본 거예요.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거나 창작해 볼 기회는 확실히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요. 

스무 살 넘어서 처음으로 서울의 현대미술관에 가봤는데, 너무 충격받았어요. 이렇게나 큰 건물이 오직 미술 작품만을 위해 설계되고 쓰인다는 거잖아요. 또 아이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신기했고요. 어린 시절의 나 또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자주 할 수 있다면, 꿈이나 인생에 좀더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지역의 사생활 99 : 부산》의 <비와 유영>은 폭력적인 가정과 가족을 벗어나고 싶은 유영이 광안리에서 우연히 인어인 비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죠. 비와 유영이라는 이름의 어감이 좋았어요. 

비 오는 광안리를 계속 보다 보면 가끔씩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비가 마구 내리니까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려진 것 같은 거예요. 바다가 하늘까지 이어진 것처럼 보여서 해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유영하는 기분이 드는 거죠. 제가 갖고 있는 기억 중 인상적이었던 그때를 꺼내서 인어에게 비, 소녀에게 유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두 이름을 합쳐 작품 제목으로도 짓고요. 

 

인어와의 만남이라는 소재는 어떻게 떠올린 거예요? 

광안리가 도심 해변이다 보니 자연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런 도심 해변에 엄청나게 낯선 존재를 뚝 떨어뜨려 놓고 싶었어요. 현실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들이 가장 현실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요철이 재밌거든요. 어떤 비현실은 가장 현실적이고, 어떤 현실은 가장 비현실적일 수 있기 때문에 그 경계를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인어라는 존재를 가져왔죠.

익숙한 장면에 낯선 감정을 한 스푼 넣는 건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어릴 때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전민희 작가님의 《룬의 아이들》부터 이영도 작가님의 《드래곤 라자》 같은 것들요. 그걸 읽고 나면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요. 제 창작의 근간 어딘가에는 비현실적인 존재가 있는 거죠. 그런데 낯선 존재가 낯선 행동을 한다면 독자들이 이입하기 어렵잖아요. 익숙한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주면 처음에는 멀찌감치 보다가도 점차 낯선 존재와 가까운 위치에서 작품을 감상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재나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 위해 공상도 자주 할 듯해요. 

정말 많이 하죠. 스쳐 가는 생각이 있을 때 그걸 붙잡고 계속 물어보면서 만들어가요. ‘비와 유영’처럼 광안리 바다에 인어가 있으면 어떨까. 우리 집 수도꼭지에서 물을 틀었더니 금붕어가 튀어나오면 어떡할까. 식물도 좋아해서 책상 한편에 식물 사전을 두고 그림 작업을 해요. 영감이 되어주니 막힐 때마다 넘겨보고 싶어서요. 

 

유영은 재봉틀로 인형을 만들어요. 부산진시장에 가서 밀면도 먹고 부자재도 사고. 산호 씨 개인 경험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어요. 

맞아요. 인물에게 취미를 하나 주고 싶었는데 저한테 친숙한 게 재봉틀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엄마가 재봉틀 쓰는 법을 알려주셔서 혼자 이것저것 만들고 놀았거든요. 천을 다루면서 깨달았던 게, 생각보다 천이 쉽게 연결되고 잘 안 끊어진다는 거였어요. 실과 천 조각이 낱개의 상태에서는 흐물거리고 약해 보이는데, 하나로 엮으면 힘을 줘도 잘 망가지지 않으니까요. 그 성질이 좋더라고요. 유영은 집에서 항상 부서지는 경험을 해요. 가족, 집 안의 그릇과 가구, 자아가 망가지는 건 되돌리기 쉽지 않지만 재봉틀을 쓸 줄 아는 유영에게는 깨진 무언가를 고치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품에서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부분은 유영뿐 아니라 비도 사투리를 쓴다는 거예요. 

당연히 사투리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산 바다에서 토박이로 오래 살던 존재들이니까요. 매체에서 흔히 소비되는 사투리가 아닌 부산에서 쓰이는, 과장 없는 사투리를 담았어요. 

 

만화의 컷을 연출하는 작업은 영화를 만드는 작업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기본적으로 영화와 만화는 이미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같고요. 컷의 사이즈, 그러니까 화면 비율이 중요하다는 것도 공통점인 것 같아요. 둘 다 한 장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예민하고 세심하게 작업하고요. 영화에서는 그걸 미장센이라고 말하는데, 만화에도 미장센을 넣을 수 있어요. 인물이 서 있는 곳, 인물이 바라보는 곳, 배경 등이 작아 보여도 나중에 큰 트리거가 될 수 있죠. 영상을 분석하고 다뤄본 경험이 만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만화에서만 보이는 특징이 있다면요? 

말풍선이 있다는 거죠. 만화는 기본적으로 문자가 들어가는 매체이고, 그 문자의 위치를 지정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에요. 저는 대사의 뉘앙스만 정리해둔 채로 먼저 그림을 완성하고, 문장은 곱씹어 보면서 수정하는데요. 제가 쓴 문장이 어떤 흐름으로 읽히는지 계속 고민하고 체크해요. 

산호 씨가 만화 작업을 참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진중한 태도로 대하고요. 

어렵지만 재밌어요(웃음). 그림만으로는 떠오르는 뭔가를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는데 글과 그림, 둘의 간격, 크기, 종이 안을 채우는 요소… 이런 모든 것이 세밀하고 조밀하게 조율돼서 페이지에 드러나는 게 흥미로워요. 

 

혹시 프리다 칼로를 좋아해요? 작업 공간에 그녀의 모습이 크게 붙어 있네요. 

좋아해요. 프리다 칼로는 개인사적인 비극을 겪었으면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선 여성이거든요. 전차 사고를 당한 후 의사의 꿈을 접고 화가로 활약하는데, 나중에는 다리마저 절단하게 돼요. 그때 프리다 칼로가 나한테는 날개가 있는데 다리가 왜 필요하겠냐는 말을 하거든요. 인간으로서 위대하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은 굉장히 좌절하기 쉬운 존재인데, 그럼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행하는 사람이라서요. 저도 그런 마음으로 작업하고 싶어요. 

 

누군가를 동경하는 마음 외에도 작업을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요. 외주나 마감 작업이 있을 때는 하루에 적어도 10시간 이상 일해요.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고요. 그리고 가끔씩은 내 만화가 재미있는 게 맞는지 스스로 의심이 드는데요. 혼자 작업하다 보니까 그 의심이 메아리가 되어서 자꾸 맴돌기도 해요. 그럼에도 삶의 가장 큰 낙이 만화로 그려보고 싶은 스토리들을 계속 떠올려 보는 거예요. 이 부분에서는 이런 대사를 넣고, 여기서는 칸을 이렇게 나누면 좋겠다 하면서요. 쉽지 않은 과정임에도 이어나가는 이유를 꼽아보면 결국엔 하고 싶은 말과 이야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의심이 들 때마다 내가 구구절절 답해주기 보다는 ‘그냥 하자!’라고 생각하려고요. 고민할 시간에 한 컷이라도 더 그려보자.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세상에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 할 방법이 없는 위기가 많죠.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연대를 하자는 말을 하고 싶어요. 사람은 한 명의 독립된 개체이지 고립된 개체가 아니기 때문에 혼자 남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요. 제 그림과 글이 해답을 주기보단 현실을 전하고 질문을 건네길 바라요.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 줄기차게 내린 비 때문인지, 안개가 산등성이를 내려앉다 못해 휘감아 버렸다. 기차가 속도를 올릴수록 뭉개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이럴 때 산호 씨는 어떤 공상을 할까 궁금해진다. 그녀의 상상이 손끝에서 피어나 완성할 이야기에 몸을 가까이 숙이고 귀를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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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