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 시간에

일요일 아침 여덟 시면 눈 비비고 일어나 티브이 앞에 앉아본 적 있어요?

Sun
a.m. 08:00

예나 지금이나 일요일 아침에도 일찍 눈을 뜬다. 어릴 땐 잠자는 게 좋았지만, 일찍 일어났을 때 받는 칭찬은 그보다 더 좋았다. 나는 잠옷 차림 그대로 베개를 살짝 끌어안은 채 리모컨을 찾는다. 그런 나를 별로 놀랍지 않게 바라보는 엄마는 꼭 10분이라도 더 재우려고 했다. “좀더 자도 돼. 광고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 일요일 아침을 이르게 시작한 날이면 다음 날 친구들을 만나 만화영화 이야기꽃을 피웠다. 티몬과 품바가 말하는 ‘하쿠나 마타타’가 무엇인지,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파란 요정 지니가 나한테 있다면 어떤 소원을 빌 것인지, 크루엘라에 맞서 달마시안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그럴 때마다 꼭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런 친구는 대개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이었다. 친구 A의 교회에선 <디즈니 만화동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가 많아지자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연필과 지우개, 쿠키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A의 마음이 깨끗하게 풀리진 않은 것 같다.

<디즈니 만화동산>
엄마가 어깨를 흔들고 이불을 빼앗아도 일어나지 않던 어린이들이 스스로 벌떡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1992년 10월 11일부터 2001년 12월 30일까지 KBS 2TV에서 일요일 아침 8시에 방영된 아침 친구 덕분이었다. <곰돌이 푸의 새로운 모험>, <알라딘>, <티몬과 품바>, <타잔>, <도날드 덕 가족의 세계여행>, <101마리 달마시안>, <인어공주> 같은 디즈니 명작을 연달아 두 편씩 볼 수 있던 시절이다. 2003년 6월 27일부터 2006년 1월 20일까지는 같은 채널에서 금요일 오후 애니메이션으로 편성되기도 했다.

Sun
p.m. 12:00

점심을 먹으면서 숟가락을 물고 티브이 앞으로 간다. 일요일 아침이 디즈니의 향연이었다면 오후는 한국 만화가 즐비하다. 나는 아침을 먹는 어린이가 아니었기에 엄마는 점심을 잘 챙겨주고 싶었을 터인데 점심에도 만화영화를 보겠다며 티브이 앞으로 달려가니 답답하셨을 테다. 기억 속 만화들은 이제 뒤죽박죽됐지만, 이 시간대에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 <날아라 슈퍼보드>, <천방지축 하니>, <달려라 하니>, <영심이>를 본 기억이 난다. 둘씩 짝을 이루어 낮 시간대에 쭉 방영됐는데, 정식 방영일이 1989년부터 1993년까지인 걸 보면 내가 본 건 훗날 재방송해 준 애니메이션인 듯하다.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
은비까비 이야기를 꺼내면 꼭 누군가 배추도사 무도사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게 더 재밌네, 저게 더 재밌네 하면서 싸운 기억이 있는데, 사실 둘은 <옛날 옛적에>라는 같은 프로그램이다. 1990년에 방영된 1기가 배추도사 무도사, 1991-92년에 방영된 2기가 은비까비. 은비는 선녀, 까비는 도깨비로 설정된 이 만화영화는 은비까비가 전래동화를 전해주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한 쌍이 건넨 이야기는 감칠맛 나고 생생했다. 철부지 어린애 같은 까비와 조금은 누나 같은 은비. 우리나라 동화엔 슬픈 줄거리가 많아서인지 까비가 엉엉 우는 장면이 나오면 곧잘 따라 울곤 했다. <소가 된 잠꾸러기>, <은혜 갚은 까치>, <곶감과 호랑이> 등이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날아라 슈퍼보드>
허영만 작가의 원작 만화이자 애니메이션이다. 중국의 《서유기》를 모티프로 한 이 만화는 잡지에 ‘미스터 손’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그러고 보니 저팔계나 사오정이 손오공을 “미스터 손!”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이거 왜 이러쎵~” 하는 저팔계 특유의 말투나 트렁크에 탄 사오정이 “나바아아아앙” 하고 입을 크게 벌려 나방을 내뿜는 장면은 <날아라 슈퍼보드>를 본 사람이라면 생생할 터. 이 만화영화를 안 봤다고 해도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하는 주제가는 모르는 이가 없을 테다. “치키치키차카차코초코초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 나쁜 짓을 하면은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우리에게 들키지 밤에도 낮에도 느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네 우리의 손오공”

<달려라 하니>
“나애리, 나쁜 계집애.” 작품만큼 대사가 유명한 만화영화.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연재되던 작품으로 1988년에 티브이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었다. 국산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잘 만들어지지 않던 때여서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다. 하니는 병으로 엄마를 잃고, 아빠는 중동으로 파견을 나가 외로이 지내는데, 아빠가 ‘유지애’라는 탤런트와 사랑에 빠지자 아빠와 새엄마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여느 뻔한 작품들처럼 새엄마가 여자 주인공을 핍박하는 줄거리가 아니라 하니가 헌신적인 새엄마를 거부하는 흐름이 인상적이다. 슬픔의 나날 속 오직 달리기만이 낙이던 하니는 육상부로 스카우트되어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Mon—Fri
p.m. 06:00

어릴 때 유난히 좋아한 만화영화 중 하나는 <피구왕 통키>다. 피구라는 걸 해보기도 전에 피구를 알게 된 나는 그 치열한 경기 현장과 긴장감이 좋았다. 형태가 흐트러질 정도로 빠른 공에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몸서리를 친 기억도 난다.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만화영화가 시작될 때 울려 퍼지던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침 해가 빛나는 끝이 없는 바닷가” 노랫말이 알고 싶어 매일 종이와 연필을 들고 티브이 앞에서 노랫말을 받아 적었다. 밥 먹으라며 채근하던 엄마가 수프를 한 그릇 들고 들어와 한 입, 두 입 떠먹여 준 기억도. 그때 넋 놓고 통키를 보다 다 식은 수프를 떠먹는 게 하루 일과였는데, 그 식은 수프가 왜 그리 맛있었는지 지금도 수프는 조금 식어 표면에 막이 생긴 상태가 좋다.

<피구왕 통키>
빨간 머리가 불꽃처럼 솟아 있는 주인공의 이름은 ‘나통키’. 전설적인 피구 선수 ‘나태풍’의 외아들인 설정인데, 고난과 역경을 뚫고 성장해 나가는 스포츠 만화영화의 전형이다. 통키는 태동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었다.)의 피구부 슈퍼스타 사천왕과 대결하고 피구부에 들어간다. 에이스가 되면서 피구계의 내로라할 선수들에게 필살기 급 기술을 선보인다. 아버지의 특기인 ‘불꽃슛’을 익히기 위한 여정을 세세하게 그려낸 만화영화. 웃음, 우정, 단결, 대결, 감동이 다 있는 스포츠 만화다.

<우리는 챔피언>
‘남궁호’와 ‘남궁열’ 형제가 벌이는 레이싱 애니메이션이다. 미니카로 벌이는 경주여서 이때 미니카가 한창 유행이었다. 어쩐지 재미있게 보았다 했더니 <피구왕 통키>의 작가 코시타 테츠히로의 작품이라고. 미니카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거나 트랙이 없는데도 커브를 도는 식의 연출이 있었고, 워낙 큰 인기를 끌어 롯데리아에서 어린이 세트 상품이 제공되기도 했다. 빵도 출시했다는데 내 머릿속엔 없는 기억이다.

<스피드왕 번개>
스포츠를 토대로 만들어진 만화영화 중 내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품. 1998년에 방영한 ‘한국’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특이점이다. 롤러 블레이드와 리모컨카가 주요소로, 블레이드가 유행하던 당시 숱한 어린이가 블레이드를 타고 아스팔트 바닥을 질주하곤 했다. 팀전 레이스 경기가 박진감을 주는 것은 물론, 그 안에 스포츠 만화의 요소인 우정과 사랑과 결투가 다 있으니 어찌 재미있지 않을까.

Mon—Tue
p.m. 05:35

“실수투성이 귀여운 소녀 신비한 마법의 힘으로” 이 문장을 보고 선율이 떠오른다면 당신도 <빨간망토 챠챠>의 시청자였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면 “범디기 범디기 범범 디기디기디기 차차”는 어떤가. <빨간망토 챠챠>의 귀여운 친구들을 보기 위해 경인방송iTV을 켜고, 티브이 앞에 앉아 오프닝부터 사수한 기억이 난다. 노래를 어찌나 신나게 따라 불렀는지. 내가 챠챠라면 나를 지켜주는 빙빙과 뚜뚜는 누굴까 친구들 후보를 두고 매일 고민했다. 워낙 좋아하던 작품이라 훗날 ‘뚜뚜’는 내 첫 휴대폰 이름이 되기도 했다.

<빨간망토 챠챠>
마법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의 이야기. 학생은 평범한 학생부터 마법을 부리는 사람, 늑대인간, 인어, 약사 같은 캐릭터로 구성된다. 챠챠, 뚜뚜, 빙빙이 주연이라 볼 수 있지만 세라비 선생님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세라비는 초록 머리의 세계 최고 대마법사로, 엘리자베스라는 인형을 항상 데리고 다닌다. 모든 사람한테 존댓말을 쓴다는 게 특징이다. 챠챠가 빗자루 타는 연습을 하다가 머리를 부딪히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두건을 직접 만들어서 씌워준 게 바로 이 세라비. ‘빨간망토’의 뿌리는 선생님에 있다.

<날아라 호빵맨>
호빵맨과 세균맨의 캐릭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호빵맨에 등장한 캐릭터만 2천 개가 넘는다고. 보통 빵이나 음식 등을 의인화해서 캐릭터가 나오기 때문에 식빵맨, 메론빵맨, 카레빵맨 같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미워할 수 없는 악역, 세균맨의 부하만 해도 엄청나게 많다. 전부 먼지 캐릭터. 새까만 먼지, 파란 몸에 긴 혀를 가진 먼지, 끈적거리는 먼지…. 호빵맨에게 식빵맨과 카레빵맨이라는 친구가 있다면 세균맨에게는 파란균맨과 빨간균맨도 있다. 언뜻 보면 똑같이 생긴 것 같지만, 세균별에 사는 엄연히 다른 캐릭터다.

<꾸러기 수비대>
캐릭터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만화영화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지가 캐릭터다. <꾸러기 수비대>를 본 세대는 12지를 “똘기(쥐), 떵이(소), 호치(호랑이), 새초미(토끼) 자축인묘, 드라고(용), 요롱이(뱀), 마초(말), 미미(양) 진사오미, 몽치(원숭이), 키키(닭), 강다리(개), 찡찡이(돼지) 신유술해”로 외우는데, 이 만화영화를 모르는 세대는 12지를 꽤 힘겹게 외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꾸러기 수비대는 동화나라인 원더랜드를 지키는 멤버들로, 이곳에 이틀만 머물 수 있고 이틀이 다 가기 전에 이야기를 진행하거나 악당을 물리쳐서 동화나라를 안전하게 유지해야 한다.

Thu—Fri
p.m. 04:00

돼지 캐릭터를 보면 “야, 이거 꼭 뿌이뿌이 같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내 주변 그 누구도 뿌이뿌이를 알아주지 않아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짱구는 못 말려>의 부리부리대마왕은 알면서 뿌이뿌이는 왜 모르지? 답답한 마음에 “오동글 몰라?” 하면 친구들 모두가 갸웃거렸고, “오백원!”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주제곡을 불렀을 때 왜 그 누구도 “맑음 때때로 뿌이뿌이!”를 외쳐주지 않는지. 살면서 <맑음 때때로 뿌이뿌이>를 아는 사람은 딱 한 명 만나 보았다. 난 뿌이뿌이가 끝날 때면 “다음 이 시간에…” 글자가 뜨는 게 그렇게나 야속했는데.

<맑음 때때로 뿌이뿌이>
천진난만한 초등학생 오동글. 별명은 오백원이다. 어느 날 엄마랑 여동생이 일기장을 훔쳐본 것을 알게 되고, 그 뒤로는 그림 일기장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러고서 써 내려간 한 줄. “내일 날씨! 맑음 때때로 돼지” 다음날, 분홍색 돼지가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은 걸 발견하고 너무 놀란 오동글은 일기장에서 돼지 그림을 황급하게 지우는데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한 마리 돼지가 오동글을 찾아온다. 그 돼지의 이름은 뿌이뿌이. 뿌이뿌이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는데, 그건 바로 머리에 코를 갖다 대면 머릿속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 오동글의 머릿속에 있는 기묘하고 황당무계한 상상은 이렇게 현실이 된다.

<두치와 뿌꾸>
“한치두치세치네치 뿌꾸빠뿌꾸빠 한치두치세치네치 뿌꾸뿌꾸빠빠” 입에 착 감기는 주제곡을 가진 이 만화영화엔 주인공 두치와 강아지 뿌꾸, 그리고 네 명의 괴물이 등장한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드라큘라 백작 큐라, 힘이 세고 식탐이 많은 프랑켄슈타인 몬스, 용감하고 착한 늑대인간 리노, 똑똑하고 순진한 미라. 이들은 마빈 박사의 항아리에 봉인된 괴물들인데, 실수로 떨어뜨린 것을 두치가 주우면서 두치네 가족과 함께 살게 된다. 인간이 되고 싶은 괴물들과 이들을 잡으려는 마빈 박사와의 이야기. 마빈 박사의 치명적인 약점 덕분에 위기일발 상황도 금세 마무리되는 것이 패턴이다. 그 약점은… 마법이 딱 하루만 간다는 것.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