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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한 — 영화감독
극장에서 <소피의 세계>(2022)를 보다가 황급히 노트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어둑한 공간에서 스크린에 시선을 두고 노트에 메모를 했다. 이 순간을 잊지 않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글을 써 기록을 남기는 소피의 마음처럼. 아름다운 순간은 언젠가 다시 돌아볼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를까. 돌아보면 아득한 기억도 순간, 손에 닿을 것처럼 지극히 가까워진다.
집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소피의 세계> 주 촬영지이기도 했죠. 영화를 보면서 창밖 풍경이 CG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진짜로 인왕산이 멋지게 보이네요.
그대로 찍은 건데, 저도 편집하면서 CG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이 집에서 지낸 지 만으로 3년이 됐네요. 결혼하고 바로 이사 온 첫 집이에요.
영화 속에서 종구와 수영도 이곳이 신혼집이었죠. 집 때문에 갈등을 겪기도 해요. 두 사람의 갈등 장면이 정말 리얼하던데, 혹시 감독님이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닌가 짐작하게 되더라고요.
수영을 연기한 김새벽 배우도 시나리오를 읽고 같은 질문을 했어요. 혹시 우리 부부 사이에 그런 일이 있는 거냐고(웃음). 전혀 아니거든요. 제 상상이었는데 진짜처럼 봐주셔서 감사했죠.
시나리오는 집이 아니라 카페 ‘이드라’에서 쓰셨다고요.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공간이죠.
집에 있으면 놀고 싶잖아요. 침대에 자꾸 눕고 싶고요(웃음). <소피의 세계>를 쓸 당시에는 뭐라도 써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드라에 출근하듯 나갔죠. 사장님이 굉장히 좋으세요. 신사다우시고요. 정말 어른 같으시거든요. 글을 쓰려면 하루에 서너 시간은 있어야 하는데, 이드라가 저한테 가장 편안한 장소였어요. 그때가 4월쯤 봄에 날씨도 좋을 때라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계속 썼어요. 시나리오 속 시간은 가을이라고 상상하면서 작업했죠. 여름이나 겨울은 촬영하기에 너무 힘드니까(웃음).
거의 모든 촬영 장소가 북촌 주변이었죠.
실제로 다 제가 자주 가는 단골집이나 좋아하는 공간들 위주로 배경을 잡았어요. 시나리오에 잘 모르는 공간을 배경으로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잘 알아야 자연스럽게 써지기도 했고요. 그곳에 저의 경험과 기억이 있으니까 사소한 디테일을 반영하기에도 편하고요.
시나리오에 디테일을 담는 편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제 머릿속에 명확히 그려지는 장면들은 지문까지 넣어서 자세히 쓰는 편이에요. 보통 시나리오에는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금기시되어 있는데, 확실히 그려지는 장면에서는 감정까지 소설 쓰듯 세밀하게 적었어요. 어떤 부분들은 아예 배제하고 여유롭게 쓰기도 했고요. 디테일을 가장 신경 쓴 장면은 갈등 신들이에요. 모두 테이크가 긴 장면이었죠.
초반에 수영과 종구의 갈등 장면은 진짜 현실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배우들 연기도 큰 몫을 했어요. 디렉팅은 어떤 식으로 하셨나요?
거의 안 했어요.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나왔고요. 사실 의도적으로 그 장면만 리딩을 안 하기도 했어요. 특별한 연기 톤을 잡으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연기가 반복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간의 감정이 드러나야 하는데 리딩으로 날것의 느낌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거든요. 사실 당연히 NG가 날 줄 알고 일부러 그날 오후 시간은 전부 비워 뒀는데 첫 테이크를 시작하고 두 사람이 한두 마디 시작하자마자 뭔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제가 배우를 보는 안목이 있는 것 같아요(웃음). 이번 영화에 함께해 주신 모든 배우분들이 제가 그리던 것들에 가깝게 연기해 주셨어요. 그래서 따로 디렉팅이랄까,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아, 그런 건 있었어요. 저희가 촬영 전에 모여서 개인적인 자리를 가진 적이 몇 번 있거든요. 종구 역을 맡은 민규 배우가 그 시간들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영화 외의 기억들이 영화 속 인물들의 기억처럼 남아서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주호와 아내의 갈등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주호는 명확한 이유 없이 아내를 멀리하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저는 아내에게 감정 이입을 해서, 주호가 너무 얄밉더라고요.
그렇죠(웃음). 수영과 종구가 치킨 집에서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인데, 거기선 의도적으로 주호를 나쁜 사람으로 보이려 했어요. 영화를 보면 크게 두 사람의 시선이 있잖아요. 그게 수영과 소피로 나뉘는데, 소피에게 주호는 목숨을 구해준 소중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반대로 수영에게 주호는 책임감 없고 회피만 하는 사람이거든요. 주호가 관객들에게 여러 면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으면 했어요. 사실 누구나 그렇잖아요. 어떤 사람에게 나는 한없이 좋고 착한 사람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겐 무지막지하게 나쁜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에디터님은 주호를 나쁘게 보셨지만 다른 관객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을 수도 있거든요. 주호가 소피를 오랜만에 만난 설정인데, 좋은 사람이었던 주호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상상도 하게 되고요. 결국 사람은 사람을 모두 다 알 수 없는 거죠. 그런 의미를 주호라는 인물에 담고 싶었어요.
생소하게 느껴졌던 지점이, 갈등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사람들이 다정하게 느껴진다는 거였어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싸운다고 해야 할까요. 수영과 종구의 말투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기본적으로 반말을 하는데 수영 씨, 종구 씨, 하면서 서로 호칭을 높여 부르더라고요. 이런 말투 때문에 인물들이 바닥이 드러나도록 감정을 내보여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착한 사람을 좋아해요. 저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요. 그런 바람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드러난 것 같아요. 종구는 그는 집안의 가장이긴 하지만 스스로 가장 노릇을 못한다고 생각해서 자책하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종구는 수영을 ‘수영아’라고 부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연약하지만 노력하려는 사람이죠.
그러니까요. 종구가 자책하면서 혼자 머리를 때리는 장면이 있잖아요. 수영도 싸우다가 자기 머리를 때리는 행동을 보이고요. 그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답답한 상황일 때 상대를 탓하기보다는 자기를 괴롭히고 마는 거죠. 그렇게라도 견디려는 거예요. 본질적으로 수영과 종구는 착한 사람들이니까요.
이제 영화 주제 이야기를 해볼게요. <소피의 세계>에서는 인왕산이라는 대자연과 집, 그리고 사람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했죠.
결국엔 떠남에 관한 영화예요. 제 이야기를 하자면, 어머니가 군산에 계셔서 가끔 뵙고 오는데요. 딱히 애틋한 시간을 보내다 오는 건 아니지만 돌아올 때면 그렇게 마음이 슬퍼지더라고요. 다음이 있다고 해도 어쨌든 떠나는 거니까요. 이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창밖의 인왕산 풍경을 가만히 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산은 한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버티며 수많은 집과 사람이 떠나는 것을 봐왔겠구나. 그래서 한편으로, <소피의 세계는> 시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해요. 저 산과 우리는 아주 다른 시간을 살고 있잖아요. 영화에서 표현하는 과거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이에요. 그때는 거기에 다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리가 생긴 거죠. 산이라는 자연과 과거라는 시간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요. 저 멀리 있는 산을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과거도 마찬가지죠. 영화를 떠올려 보면 인물들이 계속 만나지만 결국 자주 헤어지잖아요. 사소한 관계 설정도 영화 속 주제와 연관 지었어요.
그렇게 이어지는 관계 중에 아이러니한 설정도 있어요. 어머니의 병가로 이 집을 떠나야 했던 종구와 수영이 갈등을 겪는데,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 집을 떠나지 않게 됐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결과적으론 두 사람에게 안정적인 상황이 된 거죠.
이상하고도 슬픈 일이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아요. 누군가의 죽음은 남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결국엔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소중한 사람이 떠나간 경험을 해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사실 초고에는 어머니와 관련한 장면들을 굉장히 감정적으로 그렸어요. 오열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나중에 전부 삭제하고 짧고 일상적인 장면으로 대체했어요.
슬픈 장면이 간결하게 다가와서 더 좋더라고요. 기억과 과거는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기억은 주관적이라 계속 바뀌는 존재예요. 그렇다고 완전히 바뀌어서 오지는 않고 비슷한 형태로 계속 꺼내지는 것인데,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엔 옳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 떠올려 보면 틀렸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 창피할 정도로 잘못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죠. 저에게 그런 기억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에요. 아버지가 오랫동안 앓던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당시엔 물론 아주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돌아가시는 게 모두에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가 그리운 감정을 느낀 적이 크게 없었고요. 그런데 작년부터 아버지가 무척 그리워지고 살아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라기보다는 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새로운 감정이겠죠. 아버지에 대한 사소한 기억들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게 되고요.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 흐릿해지기보다는 점점 진해지는 것 같아요.
훨씬 오래 지나고 나서 더 강렬해지는 기억이 있죠. 어쩌면 개개인의 다름을 결정하는 취향 자체도 좋고 나쁨의 판단으로 정해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경험과 기억이 밑바탕이 되는 거잖아요. 모든 걸 판단할 때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 보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기억이 없으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겠죠. 영화를 보는 관점이 사람마다 다른 것도 다들 자신의 기억에 빗대어 보기 때문이고요.
결국 기억은 한 사람을 만들어 가네요. 더 나아가 보면, 영화에서 ‘소피’는 수영과 종구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기도 해요.
소피를 안내자처럼 그리고 싶었어요. 수영과 종구에게 과거를 열어 주고 환기시켜 주는 사람으로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소피가 외국인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에요. 수영과 종구의 세계에 잠시 들렀다 다시 자기 세계로 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으면 했거든요. 그래야 영화에서 말하려는 ‘떠남’의 정서가 더 잘 느껴질 테니까요. 거리감을 만들어 주는 인물이죠. 소피가 부산에서 온 여행객이었으면 마음의 거리가 너무 짧아질 테니까요. 그런 거리를 지키는 인물이면서도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해요. 북촌이라는 영화 속 배경도 우리나라 옛것의 풍경이 많은 동네인데, 그런 공간을 외국인인 소피가 관객에게 안내하듯 보여준다는 것도 아이러니하고 재미있는 설정이라고 생각했고요.
소피의 시선을 따라가서 제가 영화를 더 쓸쓸하게 본 것 같기도 하네요. 과대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영화 속에 유독 문과 문 사이에 인물들이 대치하는 상황이 많더라고요. 방으로 들어갈 때 문을 꼭 닫는 장면이 반복되고요. 영화에서 말하는 헤어짐의 정서와 연관된 설정들일까요?
처음에 소피라는 사람의 세계를 그렸을 때, 그녀가 기록과 기억이 모여 있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상상했어요. 그 세계를 다른 인물들이 오가듯 보이길 바랐고요. 그래서 방과 방을 연결하는 문을 공간적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연출했던 것 같아요. 의도적으로 기억과 기억 사이, 다른 시간 차원으로 넘어가는 장면들 사이에 문이 여닫히는 장면을 넣었죠. 문 사이로 인물과 인물이 분리되고 헤어지는 관계가 나타나길 바랐어요.
공간 구조에도 영화의 주제가 드러났네요. 소피 이야기를 더 해볼게요. 소피는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감독님도 기록하는 걸 좋아하시나요?
사실 저는 글로 뭘 적어서 남기고 사진 찍는 걸 즐기지 않아요(웃음). 하지만 기록을 잘하는 사람들을 좋아해요. 저한테는 부러운 동경의 대상이고 사랑스럽다는 생각까지 들거든요. 대개 기록을 잘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사는 걸 소중하게 여기며 삶을 귀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만큼 마음이 좋은 사람, 신중한 사람들인 거죠. 저는 저 자신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보거든요. 시간적 여유가 아니라 마음적 여유가 없는 거예요. 제 아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기억할 만한 일이 있으면 꼭 사진을 찍어요. 그럼 저는 옆에서 억지로 그 순간에 동참하는데(웃음), 나중에 사진을 보며 그 순간을 복기하면 이렇게 재미있는 시간이 있었구나, 새삼 놀라게 돼요. 그 기억을 따라 지금이 밝아지더라고요. 기억과 과거는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속에만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기록은 그걸 명확한 형태로 남게 하고 ‘있음’으로 존재하게 해요. 우리 일상의 아주 소중한 자산이죠.
소피에게 감독님의 개인적인 바람이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피가 하는 말 중에 혼자 있으면 우울해진다는 대사가 있는데 무척 공감이 되더라고요. 감독님도 그러신가요?
저는 혼자 있으면 어두운 생각을 많이 해요. 회의적인 생각에 쉽게 빠지고 일상적이고 밝고 따뜻한 감정에서 잘 멀어져요. 뭐랄까, 약간 곰팡이처럼(웃음) 소파에 누워서 뭔가를 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어지고 그러죠.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고쳐지고 있지만 여전히 자주 그렇게 되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혼자 있기 싫다는 소피를 구태여 혼자 있게 두시더라고요(웃음). 모든 사람들을 만나지만 금방 헤어지게 만들고요.
소피는 왠지 모든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지만 하나씩 떠나보내고 결국 자기도 떠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부풀려서 얘기하면 거의 천사 같은 존재에 가깝죠(웃음). 소피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소피가 받는 편지 내용도 인상적이었어요. 영화 속에 바닥에 떨어진 편지가 등장하잖아요. 주인 없는 편지이자 도착하지 않은 편지인데, 그 안에 담긴 의미가 궁금했어요.
어떤 흔적처럼 보이길 바랐어요. 카페 테라스에 편지가 떨어져 있다는 게, 결국 누군가가 다녀갔다는 증거잖아요. 수영이 소피의 블로그 기록을 보고 그 세계에 들어가 자신의 과거를 여행하는 것처럼 떨어진 편지의 주인도 조그마한 자신의 ‘세계’가 있겠죠. 어쩌면 그 사람도 다른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일종의 ‘이스터 에그’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바랐어요.
그런 의미가 있었네요. 감독님은 편지 쓰기를 좋아하나요?
편지를 자주 쓰는 사람은 아닌데요.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달하고 싶다면 말보다는 글을 택하는 쪽이에요. 낯을 많이 가려서 말을 잘 못하거든요. 속마음을 잘 터놓는 사람도 아니고요. 글로 쓰게 되면 제가 진짜 그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잖아요. 편지 쓰기가 수고스러움이 동반되는 일이라 쓰는 일 자체만으로 마음을 보여줄 수 있기도 하고요.
만약 영화를 편지처럼 건넨다면 누구에게 어떤 영화를 소개하실까요?
정말 기억에 남는 관객분이 계세요. <소피의 세계>가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까지 상영이 이어졌는데 부산에서 첫 상영, 첫 GV 때 첫 번째로 질문을 해주신 분이 계세요. 그날 제가 너무 긴장해서 잠을 딱 한 시간 자고 시사에 들어갔거든요. 그 관객분이 영화를 보고 질문을 적으셨는지 수첩을 열심히 살피면서 질문을 하시더라고요(웃음). 귀 옆에 팔을 붙여 번쩍 손을 드시면서 진지하게 질문하시는 모습을 보고 긴장이 완전히 풀렸어요. 영화를 정말 좋게 봐주셨나 보다, 하는 안도감이 들었죠. 그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도 똑같이 첫 번째로 질문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때도 수첩을 살피시면서 또 다른 질문을 하셨어요. 이번 영화가 제 첫 장편 데뷔작인데, 저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있으신 관객 분이에요. 그분께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1996)를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제가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젊은이들의 사랑 얘기이고, 지금은 봄인데 지나면 곧 여름이 오잖아요. 영화 속 바다 풍경도 정말 멋지고요. 그분의 인상을 떠올렸을 때 <여름 이야기>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와, 인연이 깊은 관객이네요. ‘우연’이 겹치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분이 이 인터뷰를 꼭 보셨으면 좋겠네요.
이건 여담인데… 제가 의미 부여를 좀 잘하거든요. 1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게 있는데 <소피의 세계> 마지막 회차를 1월 11일에 찍었어요. 그때 첫 테이크를 찍으려고 슬레이트를 딱 봤는데 그날이 11회차였거든요. 근데 1월 11일이었고… 게다가 첫 테이크가 1신 1컷의 1테이크였어요. 그러니까, 저는 속으로 계속 ‘111111…’을 생각한 거예요. 또 이번 영화가 첫 장편 영화잖아요. 이 얘기를 스태프들한테 했더니 막 비웃더라고요.
운명이네요, 운명(웃음). 말 그대로 첫 영화가 개봉을 하고 좋은 평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 마음은 어떠세요?
섭섭해요. 시원하기도 하고. 어쨌든 2년 동안 계속 함께한 영화잖아요. 매일 <소피의 세계> 생각뿐이었거든요. 매일 제 영화 일만 한 건 아니지만 이 영화가 완성되고 상영되기까지 많은 일들이 성사되어야 했는데… 끝났으니 섭섭하죠. 영화 만드는 과정이 정말 고단하거든요(웃음).
그래도 하고 계시잖아요. 계속하실 거고요.
모르죠(웃음). 제가 시나리오를 못 쓰면 못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뭐랄까, 괴롭기도 정말 괴롭거든요. 제가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제가 더 뛰어난 연출이면 좋았을 텐데, 이런 아쉬움이 많이 들어서요. 장편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찍는 것도, 개봉하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쓸 때는 제가 유일한 관객이었고 저라는 사람을 그 위치에 두고 썼던 것 같아요. 제 세계에만 <소피의 세계>가 존재하다가 개봉을 하고 관객분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많은 변화를 마주했어요. 관객을 통해 영화가 완성된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죠. 이건 정말 인생의 귀한 경험이에요. 그 마음을 또 느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다음 영화를 쓸 때는 아마 <소피의 세계>에서 얻은 기억과 경험으로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뭔가 좀더 변화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