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는 잘 모르지만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시작된 우리의 차 생활.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시작된 우리의 차 생활.

라벨 붙은 구원

뇌를 꺼내 지리산 맑은 물에 박박 씻어다 머리통에 넣고 싶었다. 출근과 동시에 퇴근이 간절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이었다. 간장대하장에 어찌나 소주가 딸려 오는지, ‘안주가 워낙 좋으니 내일 숙취도 없을…’ 리 없었다. 알코올은 판단을 흐렸고, 다음 날 외근이라는 사실을 제꼈다. 사무실이라면 모니터 뒤에 숨어 있기라도 하지, 아침 먹고 일하자는 상사와 백반집에 마주 앉아 멀쩡한 척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아… 어리석은 나여!

부대찌개 2인분을 주문하자 식당 사장님이 난로 위 주전자에서 고동빛 물을 따라 주셨다. 직접 끓였단 말을 굳이 보태신 걸 보아 이 집만의 ‘스페셜 웰컴티’인 모양이었다. 무거운 머리를 들어 호록 마셨다. 결명자차도 아니고 보리차는 더더욱 아니고. 그간 나의 맛 데이터에 한 번도 등록된 적 없는 맛이었다. 사장님께 여쭈었더니 헛개나무를 우린 차라며, 이 나무로 만든 집에서 술을 마시면 취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곁들이셨다. 마치 OO 전문 식당에 가면 벽면에 크게 적힌 ‘OO의 효능’처럼 무병장수 명약인 듯한 과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난로 옆에 드러눕고 싶을 만큼 숙취에 얻어터지고 있었으니까. 찌개가 천천히 끓길 바라며 두 잔을 연달아 마셨다.

공깃밥을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였다. 머리를 쿵 짓누르던 돌이 솜사탕처럼 붕 뜨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문득 알아챈 게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해소를 감각했다. 신비했다. 평생 먹어본 숙취 해소 음료 중에 이렇게 효과 빠른 게 있었던가? 이대로라면 퇴근 시간까지 월급 받는 자의 의무를 충분히 해낼 것 같았다. 주전자를 향해 눈인사를 올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백반집 헛개나무 정령님.’ 뿌연 김이 주전자 위로 살랑 피어올랐다.

강렬했던 헛개차와의 첫 만남 후, 쉽게 못 볼 줄 알았지만 우린 다시 만났다. 백반집이 아닌 전국 어디에나 있는 편의점에서 말이다. 난로 위가 아닌 냉장고 속에, 주전자가 아닌 페트병에 담겨. 내 구원엔 비닐 라벨이 달려 있었다. 그때부터 어떤 음료가 유혹해도 우직하게 차를 집었다. 바코드를 찍고 편의점에서 나오면 까가각, 플라스틱 뚜껑 여는 소리와 함께 나만의 티타임을 시작한다. 헛개나무 열매가 우러난 고동빛 액체를 눈으로 보고, 구수한 향을 코에 담고, 목마른 몸에 콸콸 들이붓는다. 그러곤 식도를 여느라 참았던 숨을 단번에 뱉는 것이다. 캬하! 또 어리석었던 어제의 나를 구하며.

김멋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작가. 《서른, 결혼 대신 야반도주》, 《우린 잘 살 줄 알았다》를 썼다. 먹고사는 데 진심이라 인스타그램에 밥상과 술상, 그 사이의 일상을 그린다.

성북구 유자차남

오줌 눈 것 같은 노란색 사진 필터와 시답잖은 웹드라마들이 판치던 2018년. 요즘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그땐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넘어오던 과도기 시절이라 ‘대나무숲’이라는 페이스북 커뮤니티가 있었다. 그땐 사람들이 지금보단 덜 싸우고 더 감정적일 때라 ‘대나무숲’엔 종종 젊은 날의 연애와 연정을 찬가하는 글이 올라오곤 했다. 대표적인 글이 ‘고려대 유자차남’이었다.

그러나 난 그때부터 쓸데없이 삶을 진지하게 진심으로 사는 경향이 있어, 그런 글들을 보면 ‘쯧, 배부른 녀석들.’이라며 혀를 찼다. 휴학을 하고 일주일 중 7일을 일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던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나와는 달리 여유를 가진 자들을 보며 분노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사랑한다는 것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못나고 못생긴 나를 직면하는 것보다 냉소가 더 안락한 도피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해 가을, 내가 활동하던 밴드 동아리에 A가 가입했다. 이름은 내가 좋아하던 소설가의 아내와 똑같아서 잊히지 않을 이름이었고, 어딘가 병들어 있는 것 같은 옷차림과 말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난 예쁜 A를 보며 ‘어차피 쟤도 금방 나가겠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A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A 또한 내게 관심을 주지 않고, 술자리에서나 몇 마디 나누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먼저 술자리에서 일어나 당시 살던 강서구 지하방으로 향하던 차였다. 육교 엘리베이터를 지나는데 A가 나를 따라온 것이다. 집 방향이 맞으면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는 정릉 한복판에 있어 추웠다. A와 추위를 피해 정류장 앞 어떤 건물 아래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누군가를 찾아 헤맨 적도 없었지만, 그 대화 속에서 A가 내가 찾던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대화 내내 A는 담배를 피웠다. 당시 비흡연자였지만 따라 피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A는 흔쾌히 담배 한 갑을 사주었고, 난 건넬 게 없어 빨갛게 손이 시린 A에게 편의점 유자차를 하나 사주었다.

그렇게 나는 A를 있는 힘껏 짝사랑했지만, 손을 델 만큼 뜨거웠던 탓일까. 2020년 이후로 A를 만날 수 없게 됐다. 유자차는 뜨겁게 끓일수록 쓴맛이 난다는데, 진심을 다하는 것밖에 모르는 나는 아직도 어떤 게 적당한 사랑인지 모르겠다. 적당한 단맛과 적당한 쓴맛의 편의점 유자차.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난 그렇게 적당하게 A를 사랑하진 못했을 것 같다.

송그루

밴드 올드 잉글리쉬 쉽독의 리더, 인스타그램 ‘송그루의 비마이너’ 운영자, 그리고 직장인. 음악과 글을 쓴다. 요즘의 가장 큰 목표는 좋은 2집을 발매해 3집을 내는 뮤지션이 되는 것. 그러기 위해 여러 곳에서 발로 뛰며 일하는 중이다.

완벽한 물

보리차, 결명자차, 옥수수차···. 어린 시절 나는 물 대신 차를 마셨다. 커다란 주전자나 냄비에 차를 한소끔씩 끓이던 할머니 덕분이다. 냉장고를 열면 생수 대신 차를 채운 물병이 가득했다. “물 마셔라.” 하고 건네받은 잔에는 늘 구수한 차가 담겨 있었다. 그 시절 나에게 물은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갈색빛을 띠는 무언가였다. 할머니의 물이 일개 차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편의점 음료를 사 마시는 나이가 되면서부터다. 할머니와 손잡고 간 슈퍼나 마트에서 물맛이 나는 페트병 음료를 사는 건 어쩐지 금기에 가까웠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휘황찬란한 음료 코너에서 갈증을 축이기 위해 할머니의 물을 닮은 옥수수수염차를 집어 들었다. 이름도 색도 비슷했는데 그 맛이 안 났다. 구수함은 덜했고 어딘지 모자란 맛이었다. 할머니도 분명 같은 차를 끓였는데.

오기가 생겨 편의점에서 파는 비슷한 차 음료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하늘보리도 마셔보고 결명자차도 마셔봤다. 이름과 패키지를 달리해 출시하는 음료를 여럿 따보다 이내 포기했다. 할머니가 끓여준 차는 특정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은 할머니가 여러 종류의 곡물과 콩을 섞어 차를 우려냈다는 것이다. 배합은 할머니 손의 크기와 그날그날의 기분에 달려 있었을 테니 애초에 모방할 수도 없었다. 비슷한 차를 끓여보려고 할머니에게 레시피를 물어 몇 번 시도하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쓴맛이 나고, 어떤 날은 텅 빈 맛이 났다.

할머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생수를 마셨다. 정수기에서 나오는 맑고 투명한 물은 한없이 가벼웠다. 집 안을 가득 채우던 주전자 증기도, 구수한 향도 없었다. 할머니의 물맛을 기억하는 한 비슷한 차 음료들은 내게 아류에 가깝지만, 투명한 생수 맛이 지독히도 싫은 날은 편의점에 있는 옥수수수염차를 마신다. 특별히 미각이 뛰어나 맛이나 향을 분별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리차보다는 묵직하고 결명자차보다는 산뜻하다. 어쩌면 최초의 실망을 안겨준 차이기에 더욱 특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운 정이 든 옥수수수염차를 아무렇게나 들고 강의실 사이를 가로지르고, 한강을 걷고, 피크닉 매트 위에 누워 있고는 했다. 곡물차가 아닌 다른 차를 우려 마시면서 편의점 차 음료를 찾는 빈도는 줄었지만 가끔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밀려올 땐 여전히 물 대신 옥수수수염차를 마신다.

김지아

월간 《디자인》 기자. 디자인 못지않게 먹고 마시는 일에 관심이 많다. 차를 우려 마시는 도구와 공간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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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일러스트 심규태 글 김멋지, 송그루, 김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