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고도 가만한 시선으로

박소언 — 소언

마음에 남은 풍경을 자세히 눈에 담고자 무작정 다가가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아름다운 찰나는 너무나도 연약해, 사소한 기척에도 금세 흩어지고 만다. 그렇기에 다정한 관찰자들은 언제나 대상과의 적당한 거리감을 먼저 헤아린다. 산책은 취미, 특기는 관찰이라 말하는 소언은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주변을 맴돈다. 간직하고 싶은 장면 사이에 기꺼이 머무르며 오늘의 빛과 열매를 담담히 응시한다. 그 시선과 걸음에서 이어진 기록에는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결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고양이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참, 어라운드가 무려 파주에 있던 시절에 디자이너로 일했다고요. 

안녕하세요.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1인 잡화 브랜드 ‘소언’을 만들어가는 박소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꽤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리네요(웃음)당시 함께 일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중에서 ‘인간 어라운드’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너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만큼 매체와 결이 잘 맞았나 봐요. 언젠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만나게 되어 조금 신기하기도 해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주변을 관찰하며 작고 느긋한 물건을 만듭니다.”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소언 님에게 ‘관찰’이란 어떤 행위예요?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는 일이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주변을 유심히 보는 편이었더라고요. 나무, 풀, 벌레 같은 것들이요. 엄마 아빠가 대화할 때도, 언니나 동생은 별 관심도 없는데 저만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나름대로 해석하곤 했죠. 늘 어느 정도 거리를 두되, 두고두고 지켜보는 걸 좋아했어요

 

소언 씨의 관찰 습관이 작업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요. 식물을 소재로 작업하는 만큼, 무척 세밀하게 표현하더라고요. 

소언을 처음 꾸릴 때, 나이와 성별에 구애하지 않고 누구나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어떤 방식이 좋을지 고민하다가 생활 속 이미지를 담아보자는 생각에 세밀화를 그리게 되었죠.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니,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앞에 놓인 나뭇잎 책갈피만 봐도 노방천 위로 잎맥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수놓아져 있어요. 대상을 오래 바라봤다는 게 느껴져요. 

평소엔 잎맥이나 나무껍질을 그렇게까지 들여다볼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구조가 꽤 정교해요. 볕이 잘 드는 곳에서 투명해진 꽃잎이나 나뭇잎을 보고 있자면,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데요. 그 시간이 꼭 명상 같기도 해요잠시라도 휴식이 필요한 분들에게 제 작업이 그런 감각을 전해준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무껍질을 주제로 만든 엽서 소개 글에도 “나무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 있나요?”라는 문장을 적어두었죠. 쉽게 지나치던 것에 한 번쯤 시선을 두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평범한 일상에서 작고 느긋한 감각을 발견하는 데에는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소언이라는 브랜드를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걸 보여주기보다는, 이미 우리 곁에 있는 것을 한 번 더 볼 수 있게끔 손을 내밀고 싶어요.

집 안 곳곳에 화분이 참 많네요. 식물을 좋아하는 것과 잘 돌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일 텐데, 소언 씨는 어떤 편이에요? 

본가가 진주라 대학생 때부터 자취했는데, 나만의 공간이 생기자마자 화분을 하나둘 들여오기 시작했어요베테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몇 개 키워보니 식물은 오히려 적당히 무관심해야 더 오래 산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과습으로 죽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요‘잘 자라고 있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믿고 지켜보는 편이에요. 흙을 만져봤는데 말라 있으면 그때 물을 줘요. 크게 간섭하진 않아도, 시선은 계속 머무는 거죠

 

화초를 키우다 보면 작업뿐만 아니라 삶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아요. 

예전에 《식물은 알고 있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식물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우리는 보통 ‘변화’라 하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떠올리잖아요그런데 식물은 누군가 옮겨주지 않는 이상 늘 한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니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져요. 그런데 그 책에서는 오히려 주어진 환경에 맞춰 바꿔가는 일이 훨씬 큰 변화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이를테면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태풍이 몰아치면 안전한 곳으로 피하지만, 식물은 그 자리에 서서 오롯이 견뎌내잖아요그러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고요그 이야기를 읽다 보니 괜히 용기가 나더라고요무엇보다도 제 오랜 꿈이 마당 있는 집에서 사는 건데, 이 화분들이 그 꿈을 완벽히 실현해 주진 않더라도 계속 상기시켜 주곤 해요

 

봉제산을 마당 삼아 걷는다고요.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이라고 들었어요. 

평소에 등산을 좋아하긴 하지만 매일 산을 오르기엔 부담스럽잖아요. 그런데 봉제산은 집 바로 뒤에 있고, 살짝 숨이 찰 정도로 걸을 수 있어서 자주 가요. 사실 산이라고 부르기에도 머쓱할 만큼 완만한 곳이긴 한데요최근엔 어르신이나 장애인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평지 산책로가 정비되면서 분위기가 꽤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혼자서 고요하게 거닐었다면, 이제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걷곤 해요. 강아지랑 아이들도 많아져서 사람들과 동물들 구경하는 재미가 생겼어요

 

작업을 염두에 두고 걷는 산책과 일상 속 걷기는 무엇이 다른가요? 

작업이 취미의 연장선에 있어서 그런지 두 산책이 크게 다르진 않아요. 한번은 ‘구멍 난 나뭇잎을 꼭 주워 와야지.’라는 목표로 산책에 나선 적이 있어요. 어찌저찌 구해 오긴 했는데, 생각만큼 기쁘진 않더라고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우연히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훨씬 더 감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산책 중 발견하는 시시하지만 분명한 기쁨은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계절 변화를 관찰하는 걸 좋아했어요친구들에게 “하늘이 너무 예쁘다.”고 말하면 늘 놀림을 받곤 했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런 순간에 감동하는 건 여전해요. 예전에는 그 변화들이 수채화처럼 느껴졌다면, 이제는 더 선명하고 진하게 다가와요. 세밀화를 그리며 식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점도 한몫한 것 같아요산책하다 보면 그런 변화를 체감하게 하는 풍경이나 사물에 눈이 가는데, 이맘때쯤이면 아카시아꽃을 실컷 구경해요. 봉제산엔 아카시아 나무가 정말 많거든요조금 있으면 완연한 여름이 찾아올 텐데요. 여름의 

 

낭만을 상징하는 자연물 하나만 골라볼까요? 

더위에 약해서 여름을 썩 반기진 않지만 살구, 수박, 자두, 참외 같은 제철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아요.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건 복숭아예요. 맛은 물론이고, 빛깔도 생김새도 정말 예쁘잖아요. 표면에 까슬까슬하게 털이 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에요. 뭔가 새침하게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추억이 많은 과일이라, 언젠가 잡지에 짧은 글을 기고하기도 했어요

 

자세히 들려줄 수 있나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복숭아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어요엄마가 정말 예쁜 복숭아를 고르는 날은 딱 하루, 외할머니 댁에 내려가는 날이었죠. 그럼 저는 아빠 차를 타고 가면서부터 복숭아 생각에 마음이 잔뜩 부풀곤 했어요그러던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복숭아가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어른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살금살금 냉장고로 가 가장 예쁜 복숭아를 꺼내 돌아서자마자 엄마와 눈이 마주쳤어요. 그 자리에서 된통 혼이 났는데, 할머니 앞이라 그런지 괜히 더 서러워져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요. 이제는 제가 엄마를 위해 가장 예쁜 복숭아를 고르는 나이가 되었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 풍경을 더는 볼 수 없으니 더욱 애틋하게 남아 있어요.

이쯤에서 우리 재미있는 상상 하나만 해볼까요? 만약 고양이 상수가 소언 씨 몰래 산책을 다녀온다면, 어떤 장면을 보고 올 것 같아요? 

상수는 원래 ‘길냥이’였어요. 지금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산책하러 나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 질문을 들으니 괜히 마음이 찡해요. 저는 아무래도 사람이니까, 상수에게 좀더 다채로운 일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가만히 보면, 정작 상수는 산책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예전에 고양이는 지금 이 순간만을 산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현명한 존재다 싶더라고요사람은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구조로 인식하잖아요. 우리 마음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를 떠돌고 있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소언 씨는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산책을 하며 현재를 사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주변 둘러보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눈앞의 길에만 집중하게 되거든요. 2019년에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어요. 큰 포부가 있었다기보단, 혼자 오래 걷고 싶어서 안전한 곳을 찾다 보니 순례길이 떠오른 거죠. 매일 20킬로미터 넘게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거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떠올리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지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 침상을 정리한 뒤 짐을 챙겨 길을 나서고, 풍경에 집중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 있어요그렇게 단순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참 편안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한 달은 어쩌면 제가 고양이처럼 살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새삼 그간의 걸음들을 돌아보게 되네요. 홈페이지에 ‘첫 번째 주제는 식물입니다’라고 적어뒀잖아요. 두 번째 주제도 생각해보았나요? 

브랜드 만들 때부터 세 번째 주제까지 정해뒀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첫번째 주제에 다소 오래 머물러 있었네요언젠가 꼭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고래와 산호로부터 시작해 보려고 해요. 산호는 고래에 비하면 사소한 존재잖아요. 해변을 걷다 보면 모래사장 곳곳에서 파도에 밀려온 산호사를 볼 수 있죠. 누군가에겐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지 몰라도, 제 눈엔 어쩐지 아름다워 보여서 한참을 들여다보게 돼요. 또 고래에게선 지금껏 본 적 없는 웅장하고 묵직한 생명력을 발견해요. 저는 산책만큼이나 수영하는 걸 좋아하는데, 수영을 배우게 된 것도 사실 고래 덕분이에요. 언젠가 고래와 사람이 함께 유영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거든요. 서로의 존재를 신기하게 여기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헤엄치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고 수영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고래와의 수중 산책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너무 근사해요. 저도 꼭 배워보고 싶어졌어요. 

수영은 산책과는 또 다른 감각이에요. 처음 배울 때 엉망진창의 순간을 꼭 지나야 하는데요(웃음). 물속에서 숨 쉬는 것도 어렵고, 몸으로 하는 운동이다 보니까 못하면 금방 들통나버려요. 그런데 그런 배움이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됐어요. 나이가 들수록 ‘초보 상태의 나’를 마주할 일이 점점 줄어들잖아요. 그래서 저는 몸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경험을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아직 바다 수영을 꿈꿀 정도로 잘하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 저도 고래와 함께 산책하듯 유영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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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은재

포토그래퍼 김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