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는 소설 《그 여름》의 창작 노트에 이렇게 썼다. “‘남의 정원을 망칠 시간에 자기 정원을 가꾸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정원이 있고, 정원에 뿌릴 씨앗이 있다.” 그 문장이 고민의 시작이었다. 사실 한동안 ‘정원’이란 주제를 생각하며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눈앞에 꽃만 좇고 있었다. 도대체 정원이 뭐길래. 그러고 보니 한때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언어의 정원>이었다. 국어사전은 ‘정원’을 “집 안에 풀과 나무 등을 가꾸어 놓은 뜰이나 꽃밭”이라고 짧고도 간단하게 정의한다. 하지만 세상의 정원에는 풀과 나무만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정원’이라는 건 식물을 심고 가꾸는 물리적인 공간일 뿐 아니라 무언가를 관찰하고 돌보는,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나 공간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언어의 정원> 속 유키노도 비 오는 날 신주쿠교엔에서 초콜릿에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정원을 가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정원을 가꾸기 위한 또 다른 나만의 정원을 만들기로 했다. 이왕이면 비밀스럽고도 은밀하게.
나만의 X를 찾습니다
작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보이드VOID> 전을 봤다. ‘빈 공간’이라는 전시명 그대로 여러 작가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관 내외부의 비워진 공간을 조명하는 전시였다. 그중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었는데, 최춘웅 건축가의 ‘실종된 X를 찾습니다’다. 전시에 따르면 건축 도면에서 사용되는 ‘X’는 수학적이기보다 ‘아래위로 비어 있다’는 기호적인 의미라고 한다. 또한 X는 모르는 무언가를 뜻하기도 하지만 찾으려는 무언가를 뜻하기도 하고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공책에 수학 공식을 적듯 커다랗게 X를 썼다. 그 밑에 서울 어딘가의 비어 있는 곳, 내가 아는 곳, 내가 알지만 가보지 못한 곳들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비밀 정원 X’라 이름 붙였다.
잠실야구장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 25
비밀 정원 X에서 한 일
관중석에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야구장에서 소설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974년 4월의 일이다. 물론 내 이야기는 아니고, 진구 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야구장을 찾은 것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다. 붉은 의자가 마음에 들어 선택한 226구역에는 나 홀로 앉았다. 7월 평일의 3루 외야석은 무심한 관찰자를 위한 자리임이 분명하다. 나는 방망이에 맞은 공을 보며 물리 시간에 배운 충격량 공식을 멍청히 되뇌다가 엉덩이를 앞으로 쭉 빼 의자에 기대 앉아 멍하니 하늘을 봤다. 그런 게으르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관중석에 앉았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라운드 위의 선수와 공, 모든 형태가 그대로 아름다웠다. 그러다 문득 하루키를 떠올렸다. 뭔가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학교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
그 산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버스는 산으로 향했다. 누군가 서울대학교에 폐수영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귀신이 나왔다든가 누가 무슨 영적인 체험을 했다든가 하는 무시무시한 소문은 없었다. 대신 거기에서 누가 화보를 찍었다더라, 어느 가수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더라, 하는 얘기만 들려왔다.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를 걸어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한때의 수영장이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와 쓰레기, 더 많은 쓰레기. 비밀스러움에 대한 설렘은 공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으나 괜찮았다. “무섭긴 한데, 내가 귀신이라도 여기에 살긴 싫을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는 수영장 한구석 누군가 버리고 간 흔적 위에 앉았다. 예민해진 청각은 더 많은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바람이 나뭇잎과 부대끼는 소리, 벌레의 날갯짓 소리, 그리고 내 내면에 떠도는 소리. 수영장에서 나는 그 솔직한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난지 한강공원 서울시 마포구 한강난지로 162
공원에 앉아 나무를 봤다 서울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강이다. 내가 음악가였다면 요한 슈트라우스처럼 ‘아름답고 푸른 한강’이라는 곡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 좋은 한강에는 12개나 되는 공원이 있고, 각각의 공원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벤치가 있다. 한강공원을 정원 삼는 것은 가장 쉽고도 좋은 방법이다. 난지 한강공원의 어느 한구석은 숲 같기도 하고 늪 같기도 하다. 자동차나 자전거 없이 오가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은밀하다. 자전거를 타거나 뛰는 사람들을 등지고 앉으면 눈앞에는 크고 작은 나무가 있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나무를 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떠올렸다.
의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한때 나는 방 한 칸짜리 옥탑에 살았다. 언니와 함께 살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 우리는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항상 함께 있었다. ‘서울에 이렇게 내 한 몸 누일 공간이 있다니’ 하며 감사하다가도 ‘이 놈의 집구석’이라고 짜증냈다. 간사한 마음은 매일 시소를 타듯 이리저리 기울었다. 돈, 시간, 마음, 무엇 하나 풍요롭지 못한 때였다. 유독 마음이 힘든 날에는 더욱 집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러면 주인집 아저씨가 옥상에 쌓아놓은 빨간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 한참을 앉아있었다. 한숨을 쉬고 울기도 하며 미운 생각을 토해냈다. 그러고 나서 현관문을 열었다. 당시 그 빨간 플라스틱 의자는 내가 유일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제는 나만의 방이 생겼지만, 지금도 의자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다행히 어디든 의자 하나 둘 곳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