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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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펀치 드렁크 러브>, <오만과 편견>

 

ALL WE NEED IS LOVE

누구에게나, 사랑 

사랑은 누구에게나 온다. 하지만 누구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우리를 둘러싼 오만과 편견과 두려움과 욕심 같은 것을 벗어던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두 편의 영화가 말한다.

아마 1999년도의 여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태국 남부의 피피 섬에 있는 소박한 방갈로에 묵고 있었다. 하루는 숙소에서 기획한 주변 섬으로의 스노클링 투어에 참가하기로 했다. 전날 해변에서 만난 네덜란드 남자 요룬이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했다. 

투어 보트는 몇 군데의 포인트를 거쳐 작은 무인도에 도착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도시락을 먹고 휴식 시간을 보냈다. 어떤 사람들은 수영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공을 던졌다. 나와 요룬은 얕은 바닷물 속에 앉아서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낙원에서의 휴식을 만끽했다. 투명한 바닷물은 따뜻했고 하얀 모래는 부드러웠으며 파란 하늘은 맑았다. 우리는 좋아하는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요즘 본 영화 중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가 최고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둘 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가 만들고 있다는 새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영화 제목이 뭐였지? 퍼….”, “아…. 펑크 크런치 러브?”, “맞다. 맞아. 그랬던 거 같아.”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함께 섬을 떠나던 날도 요룬은 끈질기게 나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하면 부담스러워서 다른 동네로 놀러 가 버렸고, 그가 배의 갑판 위로 올라가서 바람을 쐬자고 졸라대도 귀찮다면서 너나 가라고 했고, 육지에 도착해 숙소를 찾을 때도 아쉬운 얼굴의 그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후회가 된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도한 여자가 돼봤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대체 왜 나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던 걸까. 아니,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요룬이 왜 내게 관심을 보였는지다. 외모도 괜찮았고 성격도 유쾌했고 매너도 나쁘지 않았고 직업도 멀쩡했고 궁상맞게 굴지도 않았다. 변태도 아니었고 마약사범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남자가 며칠 동안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녔던 걸까. 어쩌면 미친놈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1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든다.

그나저나 그때 우리가 기다리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새 영화의 제목은 <펑크 크런치 러브>가 아니라 <펀치 드렁크 러브>였다. 태국에서 돌아오고 몇 년 후에 개봉한 그 영화를 혼자서 보았다. 좋았다.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 여전히 좋았다. 그리고 그 영화를 떠올리면 언제나 16년 전 나에게 2박 3일 동안 추파를 던졌던 네덜란드인 요룬 크라츠본이 생각난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LA 버전, 또는 폴 토마스 앤더슨 버전의 <아멜리에> 같은 느낌이다. <아멜리에>의 감독 장 자크 주네가 애초에 아멜리에 역으로 생각하고 있던 여배우가 <펀치 드렁크 러브>에 출연한 에밀리 왓슨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두 영화에 연결고리가 있는 것도 같다. 황량한 도로, 박스 모양의 썰렁한 사무실 겸 공장, 멋없는 아파트, 삭막한 복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LA의 변두리에서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괴팍한 성인 남자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의 기묘하게 매력적인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LA 교외의 창고 같은 건물에서 별 쓸모 없어 보이는 물건을 파는 남자 베리 이건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당연히 생각할 만한 A라는 일을 하는 대신 말도 안 되게 B나 C나 D나 아니면 F의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베리가 바로 그런 남자다. 무려 7명이나 되는 드센 누나와 여동생 틈에서 치이며 자란 소심한 그는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린다. 누나네 집에서 계속해서 이런저런 비난섞인 질문과 놀림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유리창을 모조리 깨버리거나, 비행기 마일리지 쿠폰을 받기 위해 먹지도 않을 푸딩을 한 트럭씩 사버리는 식이다.

그런 그에게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찾아온다. 실제로 한밤중에 사무실 앞 도로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가 났고, 그 직후 누군가가 차에서 내던지듯 풍금 한 대를 버리고 갔다. 그것을 베리가 목격한 후, 그의 앞에 레나가 나타난다. 레나는 베리와 가까워지려 애쓰지만 마음에 상처가 많은 베리에게는 사랑에 빠지는 일이 녹록지 않다. 

그는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아니,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방법 자체를 잘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도 잘 모른다.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도 잘 모르고, 화를 내는 방법이나 화를 내지 않는 방법도 잘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인다. 외로움을 달래려 폰섹스를 한번 했다가 폰섹스 회사 사람들에게 협박을 당하기도 한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과할 정도로 걱정한다. 특히 누나들이 그렇다. 하지만 레나는 그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베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별다른 이유 없이 그에게 다가서고 별다른 이유 없이 그를 사랑하게 된다. 

“당신 얼굴은, 쇠망치로 묵사발을 만들고 싶을 만큼 예뻐요.”
“난 당신 얼굴을 씹어먹고 눈알을 파내 빨아먹고 싶어요.” 

이것은 사랑에 빠진 베리와 레나가 읊는 대사다. 소심하고 평범한 외모 속에 외롭고 괴팍하고 사랑스러운 영혼을 숨긴 두 남녀는 이런 식으로 서로를 발견하고 또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은 베리를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 여전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베리는 레나를 다치게 한 폰섹스 회사가 있는 유타주까지 한걸음에 달려가서는 악덕 업주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친다. 하지만 그것은 닿을 곳 없는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레나를 위한 일이다. 이제 그에게는 가슴 속에 품은 사랑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더는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떠날 생각도 없이 푸딩에 붙은 마일리지 쿠폰을 모으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지금껏 모은 마일리지로 레나와 함께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그런데 레나는 왜 베리 같은 이상한 남자를 사랑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정상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 사실 사랑에 빠지는 우리는 모두 정상이 아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게 된 이유,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한 일들, 그의 사랑을 얻지 못해 한 일들, 서로를 사랑해서 한 일들은 지금 돌이켜 보면 낯이 뜨겁다 못해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니까 말이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인 <오만과 편견>의 원작은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소설이다. 이 영화는 <펀치 드렁크 러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두 남녀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지는 시골의 가난한 귀족인 베넷 집안의 둘째 딸이다. 독서를 사랑하고 치마 밑단이 흙투성이가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들판을 거니는 것을 좋아하며 누구에게도 주눅이 들지 않는 똑똑하고 자립심 강한 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여성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해야 한다. 그녀의 어머니와 자매들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결혼에 목을 매는 이유는 당시 결혼하지 못한 여자는 평생 남의 집 가정교사나 보모 일을 전전하며 힘든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마을의 저택에 런던 출신의 돈 많은 젊은이 빙리가 나타난다. 리지의 어머니는 큰딸 제인을 빙리에게 시집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예쁘고 착한 제인과 잘생기고 순진한 빙리는 서로에게 반한다. 그런데 문제는 빙리가 데리고 온 무뚝뚝한 친구 다아시다. 리지는 무도회에서 도무지 웃지도 않고 춤조차 추지 않는 다아시가 자신을 두고 “봐줄 만은 하지만 반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는 그를 싫어하게 된다. 얼마 후 제인과 빙리의 약혼을 기다리고 있던 베넷 집안은 빙리가 말도 없이 마을을 떠나버렸다는 소식에 상심한다.

후에 다시 만난 다아시는 리지에게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다며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다. 빙리가 갑자기 떠나버린 이유가 다아시 때문이라는 사실을 리지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아시는 리지의 가족들이 속물적인 데다 빙리의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것 같아서 친구를 구해줘야 했었다고 고백하고, 이에 화가 난 리지는 그의 사랑을 내쳐버리고 만다. 영화는 리지와 다아시가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서로에 대한 오해를 푸는지를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인 <오만과 편견>의 의미는 다아시의 오만, 그리고 리지의 편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리지의 오만, 그리고 다아시의 편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과 편견에 가려 상대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오만을 인정하고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사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데는 그런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만을 인정하고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가진 열등감, 두려움, 욕심 같은 것들. 사람은 막장드라마의 등장인물들처럼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마치 페이스트리의 층처럼 겹겹의 층을 가지고 있다. 위의 층을 들추면 다른 층이 드러날 것이다. 그 아래의 층에는 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그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단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만함일 것이다.

그나저나 16년 전의 요룬 크라츠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그때 그의 호감을 받아들였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제야 내가 그를 밀어냈던 이유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들고 있던 한 권의 책과 그가 했던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책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돈을 끌어당기는 사람의 법칙》 느낌의 제목을 달고 있었고, 그런 책을 들고서 그는 내게 “나는 불교에 관심이 있어. 불교는 정말 근사한 것 같아.”라며 불교가 무슨 최신 유행 패션 아이템인 줄 아는 머리 빈 서양인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그가 정말 밥맛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6년 후의 나는 돈에 관심이 많고 잘난 척도 잘하는 남자와 잘도 사랑에 빠져 함께 살고 있다. 어차피 이렇게 될 팔자일 줄 알았더라면 오는 남자를 막지나 말 것을, 16년 전 나의 오만함이 후회된다. 

내게는 널 씹어 먹고 싶다는 <펀치 드렁크 러브> 속의 괴상한 사랑보다는 내가 한 모든 일은 전부 당신을 위한 일이었다는 <오만과 편견> 속의 점잖은 사랑이 더 적당한 것 같다. 베리와 다아시 중 하나를 고르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다아시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펀치 드렁크 러브>라는 영화가 좋다. 그 영화는 누군가가 아주 먼 나라에 여행을 갔다가 공항에서 사들고 온 초콜릿 선물 세트 같다. 온갖 색깔의 반짝거리는 포장지로 하나 하나 포장한 각기 다른 맛의 초콜릿들 말이다. 그 맛들은 신기하고 이상하고 괴상하고 또 낯선 것들이다. 치약 맛이나, 크레용 맛, 후추 맛, 청양고추 맛, 고래 기름 맛, 돼지비계 맛, 할라페뇨 맛 같은 것들. 하지만 뭐가 들었든 그건 초콜릿이다. 뭐가 됐든 그게 사랑인 것처럼. <펀치 드렁크 러브>가 이야기하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 Punch-Drunk Love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 드라마, 로맨스 | 미국 | 95분

일곱 명의 누나들에게 둘러싸여 자란 베리. 그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폰섹스다. 그후 우연히 만난 레나와 사랑에 빠지지만 돈을 요구하는 콜걸 때문에 다시 안절부절못한다. 도통 종잡을 수 있는 이 영화는 레나가 베리에게 던지는 대사 같다. “당신, 정말 괴상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오만과 편견 Pride & Prejudice
조 라이트 감독 | 드라마, 로맨스 | 영국 | 128분

결혼의 조건은 오직 사랑이라고 믿는 엘리자베스는 좋은 신랑감에게 다섯 딸을 시집보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는 어머니와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 아래서 자란 다섯 자매 중 둘째이다. 여름 동안 저택에서 열린 댄스파티에서 만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한눈에 반하지만 서로의 오만과 편견 속에서 계속해서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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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

글 한수희 일러스트 윤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