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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동 예술마을
이곳에서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오래 지켜온 마을의 신조 덕분에 서학동 예술마을에 들어선 이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마을을 물들이고 있다. 하나둘 모여든 예술가가 터를 지키고 있던 주민과 어우러지며 마을 길은 그 자체로 작은 무대가 된다. 여름의 기운이 선연하던 어느 날, 그 무대 위를 거닐며 동네가 다정하게 품은 작업실 네 곳의 문을 두드렸다. 이 글은 서학동 곳곳에 뿌리내린 사람들이 피워온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개천 하나를 건너면 닿는 서학동 예술마을. 번화한 관광지의 소란함을 뒤로하면, 다리 너머에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느긋한 풍경이 펼쳐진다. 한때 ‘선생촌’이라 불리며 교사들과 학생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했던 이곳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상권이 쇠락하고 주거 시설이 낡아가면서 차츰 활기를 잃었다.
그러던 2010년, 음악을 만들고 글을 짓는 한 부부가 이곳에 정착해 ‘벼리채’라 이름 붙인 한옥에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화가, 도예가, 사진가, 음악가 등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갤러리와 작업실이 들어서며 마을은 자연스레 예술촌의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지금은 50여 명의 예술인들이 주민들과 어울려 이곳의 시간을 함께 물들이고 있다.
서학동 예술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이는 한숙 촌장이었다. 그를 처음 본 건 마을을 소개하는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였다. 단정한 생활 한복을 입고 동네를 부지런히 오가다 카메라를 향해 옅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이방인의 두드림에도 흔쾌한 환대로 맞아줄 것 같은 작은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연락해 마을 이야기를 책에 담고 싶다고 전하자 촌장은 주저 없이 길동무가 되어주겠다 했고, 미처 연락이 닿지 못한 예술가들까지 친히 이어주었다.
한숙 촌장의 작업실인 ‘초록장화’에서 우리는 첫인사를 나눴다. “조금 더워도 잠시 기다려 볼래요? 여기가 우리 집에서 제일 바람이 잘 드는 곳이거든요.” 그는 부엌 한쪽 긴 테이블에 나를 앉히고 직접 원두를 갈아 아이스커피를 내주었다. 막바지 여름 열기가 여전하던 날, 가시지 않을 듯하던 더위도 활짝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 덕분에 차츰 누그러졌다.
“제가 말이 너무 많죠.” 그는 웃음을 띠며 연신 이야기를 이어갔다. 선배 예술인들에 대한 존경과 촌장으로서의 고단함, 마을을 향한 애정, 예술에 대한 쉼 없는 열망까지. 내가 본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자신을 “잘하는 건 없지만, 안 하는 것은 없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을에는 이토록 애정 어린 눈짓으로 동네의 면면을 살피고자 하는 사람 하나쯤은 꼭 필요하지 않을까, 섣부른 짐작을 하게 됐다. 대화를 마친 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촌장의 안내를 따라 마을의 작업실들로 향했다.
몽유화원
몽유화원의 마당에는 해마다 청아한 백모란이 핀다. 꽃이 피면 부부는 이웃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작은 마당에서 피어난 환희는 어느새 마을 사이사이로 번져간다.
게스트하우스 몽유화원의 주인은 부부 이희춘, 임현정 작가다. 두 사람은 화실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고 이후 전주에서 함께 생활해 왔다. 2012년, 서학동의 빈집 한 채를 구매하면서 이곳 예술마을로 들어섰다. 폐타이어가 쌓여 창고처럼 방치된 집을 고쳐 ‘몽유화원’ 이라 이름 붙였다. 처음에는 남편 이희춘 작가의 작업실로 사용했다. 이름처럼 꿈속의 정원을 가꾸듯 그림을 그리던 공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들이 근처에서 묵을 곳을 찾으며 서학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업실 한편의 방을 손님에게 내어주는 일이 계기가 되어 몽유화원은 자연스레 숙소로 자리를 잡았다. 일정하지 않은 작가 생활의 수입을 보태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단순한 상업 공간은 아니었다. 곳곳에 작가의 작품과 흔적이 배어 있는 집, 예술이 일상처럼 놓인 숙소였다.
이희춘 작가는 몽유화원 근처에 따로 작업실을 구해 지금도 꾸준히 그림을 이어간다. 아내 임현정 작가 역시 게스트하우스에 손님이 없을 때면 붓을 든다. 오래 품어온 개인전의 꿈도 2년 전 마침내 실현했다. 서학동 예술마을에서의 삶이 또 다른 자극이 된 것이다.
“예술마을에 오니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혼자 있으면 내가 1등인 것 같은데, 다른 작가들의 전시나 늦게까지 불 켜진 공방을 보면 자연스레 자극이 돼요. 더 열심히 하게 되고요. 서로 발전하는 느낌이죠.” 이제는 마을의 터줏대감이 된 부부는 몽유화원과 바로 이어진 작은 전시장 ‘선재미술관’도 운영한다. 10평 남짓한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신진 작가들에게 해마다 한두 차례 무료로 전시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이날도 한 젊은 작가의 작품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몽유화원을 중심으로 예술가의 작업이 이어지고 여행자가 드나들며, 새로운 작가들이 자신만의 작품을 선보인다. 매해 작은 정원에서 피고 지는 모란처럼, 이곳에서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꿈처럼 스러지고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A.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학3길 85-1
적요숨쉬다
곧게 뻗은 길 끝에 붉은 글씨가 새겨진 간판이 보였다. ‘적요숨쉬다’. 이적요 화가가 운영하는 카페이자 작업실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벽과 선반 가득 쌓인 수천 장의 CD와 LP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음악을 사랑하는 그는 한때 전주 교통방송에서 디제이를 맡으며 세계 음악을 소개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정년퇴직 뒤에는 서학동 예술마을에서 애정하던 커피를 본격적으로 내리며 또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을에서는 어떤 접속도 하지 않은 채, 단독자로 살겠다는 각오로 이곳에 왔어요. 그간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았죠. 그 대신, 멀리서 지켜보며 마을과 다른 예술가들을 늘 지지하고 응원해 왔어요.”
카페 안쪽에는 그의 오랜 작업실이 자리했다. 바늘과 실, 물감과 캔버스. 이곳은 30년이 넘도록 이어진 그의 바느질 드로잉 작업 공간이다. 군 시절 처음 시작한 거칠고 투박한 바느질이 어느새 그의 작업을 만들어가는 도구로 자리 잡은 것. 그는 바늘과 실로 캔버스 위에 선을 올리고 그 위에 물감을 입힌다. 마르면 다시 바느질을 이어가고 부족하다 싶으면 또다시 색을 덧대면서 작업을 완성한다. 캔버스 100호짜리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리기도 한다.
작업실 곳곳에 놓인 작품마다 수많은 표정의 얼굴이 비쳤다. “제 작품에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인물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모델을 앉혀 두고 초상을 그렸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한 대상을 오래도록 관찰한 뒤, 그 사람의 내면까지 제 방식으로 끌어들이죠. 그리고 화실에 돌아와 제 마음속에 저장된 그 모습을 꺼내어 그림으로 그려요.”
그는 큰 욕심을 품지 않는다. 사람 일이란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게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소망이 있다면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과 커피 향 사이, 바다를 바라보며 남은 삶을 보내는 상상을 한다. 이적요 화가의 카페와 작업실은 지금도 그의 예술과 삶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으로 숨 쉬고 있다.
A.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학3길 85-1
바느질하는 삐나
삐나 작가는 천을 기반으로 수공예 작품을 만든다. 그는 정식으로 바느질을 배운 적이 없다. 전업주부 시절, 집에 있던 천을 우연히 손에 쥔 것이 시작이었다. 직접 만든 작품을 블로그에 올리자 좋은 반응을 얻으며 길이 열렸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누구에게 배운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길어낸 창작물이기에 신선하게 다가갔을 거라 짐작하고 있다.
그는 전주한옥마을에서 첫 작업실을 꾸렸지만, 늘 북적이는 발걸음 속에서 차츰 집중을 잃었다. 손님들의 취향대로 물건을 만드느라 본연의 작업을 놓치기도 했고 높아지는 임대료 또한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서학동 예술마을에 먼저 둥지를 튼 지인의 권유로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느덧 8년이 됐다.
서학동 예술마을에 오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한옥마을에서는 손님 눈치를 보며 그들의 기호를 따라야 했지만, 이곳에서는 오롯이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이웃 작가들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다. 고민을 나누고 서로의 어려움을 공감하다 보니 편안함 속에서 자연스레 좋은 작업물도 나오게 되었다.
이제 그는 자기 작업만큼이나 후배들을 응원하는 일에 마음을 쏟는다. “저는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는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젊은 선생님들이 더 잘될 수 있게 돕고 싶더라고요.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마음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삐나 작가에게 서학동 예술마을은 이제 단순한 터전 그 이상의 안식처가 되었다. “여기에 와서 마음이 가장 편안했어요. 저의 모든 걸 품어주는 곳이고, 저를 예쁘게 봐주는 사람들과 제가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들이 함께하는 곳이죠. 이 마을은 저한테 사랑이에요. 사랑 그 자체예요.” 작가는 그저 작업실에서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이어가며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천을 만지며 살아가고 싶다. 나이 들어서도 늘 무언가를 사부작사부작 만드는 재미있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그의 작은 희망이다. 서학동 예술마을의 사랑 속에서 삐나는 그렇게 천천히 나이 들어가고 있다.
A.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서학로 14
초록장화
한숙 촌장은 마음 한편에 늘 꿈꾸던 집이 있었다. 아이를 안채에서 키우고 살림을 꾸리며, 마당에서는 정원을 가꾸고 바깥채에서는 작업을 하는 삶. 그런 이상적인 공간을 머릿속에 그리며 3년을 보내던 어느 날, 서학동에서 한 한옥을 발견했다. 수국이 피어 있고 옛 시골집 마당을 닮은 공간. 마음속에 품은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렘에 그는 곧바로 신혼 생활을 하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의 바람대로 안채와 바깥채를 오가며 생활을 가꾸고 작업실 위층은 손님을 위한 숙소로 열어두었다. 누군가 잠시 머물며 작업실 여기저기 놓인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촌장은 공간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손길을 더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촌장은 나무, 돌, 철 같은 자연 재료를 다루는 설치 작업을 이어왔다. 이곳에서 만난 선배 예술인들은 그의 작업에 큰 자양분이 되었고 음악과 문학에 깊은 조예를 지닌 이들과의 교류는 예술적 경험을 한층 넓혀주었다. 역사와 철학을 나누던 대화는 동학을 주제로 한 전시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가 마을에 입성할 당시 예술인은 네 명뿐이었지만, 지금은 예술을 꿈꾸는 50여 명이 모여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제가 30대 때, 크리스마스 무렵 시내에서 진한 초록색 장화를 발견했어요. 너무 마음에 들어 큰돈을 주고 샀죠. 색이 강렬해서 평범하게 신을 수는 없었지만 그 신발을 중심으로 옷을 맞춰 입는 재미가 있었어요. 주황색 카디건에 초록 치마를 입어 아예 튀는 조합으로 해보기도 하고, 회색이나 무채색 옷에 초록 장화만 돋보이게 하기도 했죠. 2~3년 동안 초록 장화를 위한 코디를 즐겼어요.”
신발은 주로 옷을 보조하는 존재로 여겨지지만, 그의 초록 장화는 언제나 중심이 되어 옷차림 전체를 완성시켰다. 그 경험이 그대로 공간의 이름으로 이어졌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동시에 새로운 도전과 꿈을 상징하는 이름. 작업실 초록장화는 한숙 촌장의 소담한 생활과 작업 그리고 꿈을 모두 품어주는 든든한 바탕이 되고 있다.
A.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학3길 66
에디터 황진아
포토그래퍼 김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