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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지·김인철 — 고스트북스
그 동네에는 유령이 산다. 그 존재는 매섭기보다는 둥글게 생겼고, 냉소적이기보다는 다정한 마음을 가졌다. 유령이 머무는 곳은 교동 한편에서 8년째 자리를 지킨 독립 서점 ‘고스트북스Ghost Books’. 서점의 운영자이자 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류은지·김인철 작가는 유령처럼 가뿐한 몸짓으로 네모난 세계가 내어주는 세상을 유영한다. 글과 그림의 바다를 헤엄치는 그들의 모습은 사뭇 흔쾌하다.
고스트북스 간판에 유령이 달려 있다고 해서 걸어오는 내내 유령만 찾았어요. 반가워요.
은지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하얀 강아지가 달려온다.) 토베! 기다려!
이 친구가 토베군요! 정말 귀엽네요. 만져봐도 될까요?
인철 그럼요. 태어난 지는 9개월 정도고 저희랑 함께 지낸 지는 두 달 됐어요. 아직 어려서 온 세상이 신기한가봐요. 겁이 많기도 하고 낯선 사람들이 오면 행동이 더 분주해지네요. 토베, 앉아!
(한참 돌아다니던 토베가 엉거주춤 앉는다.)
이 틈을 타 얼른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네요. 두 분은 과거 《AROUND》에 일상을 짧게 나눠주신 적 있죠. 오늘은 제대로 된 소개를 듣고 싶은데, 서로에 대해 말씀해 주실래요?
인철 오, 먼저 해주시겠어요?
은지 인철 씨는… 고스트북스에서 전반적인 운영과 더불어 국내 도서나 과학 장르 도서를 골라 입고하는 일을 맡아요. ‘김잠’이라는 이름으로 에세이나 단편 소설을 쓰고, 꾸준히 책 작업도 해요. 그리고 과학을 좋아하고 저한테는 남편이고, 또….
인철 설명이 어려운가 봐.
은지 이런 소개가 처음이라서(웃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죠.
그럼 인철 씨가 보기에 은지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인철 류은지 작가는 고스트북스의 출발점인 사람이에요. 직접 이름을 짓기도 했고 출판으로 시작해서 서점으로 이어나가는 데 뿌리 역할을 했거든요. 고스트북스에서는 해외나 예술 도서를 큐레이션하고 내·외부로 보이는 이미지들을 가꾸고 있죠. 그림도 그리고 책도 만드는데 그 작업도 워낙 애정을 품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작가로서의 역량도 뛰어나고요. 꼼꼼하고 철두철미하면서 추진력도 갖고 있어서, 제가 가지지 못한 좋은 점을 많이 가진 사람이에요. 귀감이 된다고 할까요?
오늘 대화의 초대 손님, 토베 소개도 해주세요.
인철 올해 7월 2일부터 함께 지내며 서로 알아가고 있는 가족입니다. 되게 순한데 겁이 많은 것 같아요. 이름은 저희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이자 캐릭터 ‘무민’을 만든 ‘토베 얀손Tove Jansson’에서 따왔어요. 은지 말로는 토베라는 단어에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도 있다더라고요. 은지 제가 작년에 동물권행동 ‘카라’와 함께 달력 작업을 했는데요. 그곳에서 운영하는 유기동물 센터 ‘아름품’을 팔로잉하면서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꾸준히 지켜봤어요. 강아지랑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본 토베는 완두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형제자매들이 있었어요. 그러고 반년쯤 지났나, 다시 보니까 다른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얘만 남았더라고요. 마음에 걸려서 직접 만나러 가자마자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토베라는 이름을 지어준 후에는 우리 두 사람도 별명을 지었어요. 돌림자 ‘토’를 써서 저는 토지, 인철은 토철.
한국적인 느낌이 강하네요(웃음). 토베는 두 분과 오랫동안 함께하던 까만 고양이 ‘쿠로’가 떠난 후 만난 새 식구잖아요. 그 이별 이후로 고민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은지 13년 정도 같이 살았으니까 제 20대부터 쿠로가 함께했어요. 결혼하면서는 인철과도 한 식구가 되었고요. 너무나도 각별한 친구였는데, 2월에 갑작스럽게 무지개다리를 건넜죠. 쿠로를 마음속에서 보낼 때 정말 힘들었어요. 집에 아무도 없는 게 낯설고 고양이 물건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너무 아픈 거예요. 쿠로와의 추억이나 함께하던 일상에 대해 인철과 자주 대화하면서 마음을 회복해 나갔어요. 우리의 남은 삶은 강아지든 고양이든 동물과 같이 보내겠다는 생각을 늘 했는데도, 새 친구를 만나는 데 작은 두려움이 들더라고요. 만남은 곧 이별을 가져올 테니까요.
인철 저한테도 쿠로가 주는 의미는 커요. 처음부터 감정적인 교류가 오간 건 아니지만, 약해진 쿠로의 모습이나 저한테도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을 느끼게 됐거든요. 가령 집 안에서 까만색 봉투를 얼핏 보곤 쿠로인 줄 알고 은지와 붙잡고 울기도 했어요. 같이 울다가 같이 위로하고요. 은지 그러다가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까, 이별은 어쩔 수 없더라도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서로 행복을 나눌 수 있잖아요. 세상에는 버려지는 동물도 많으니 그중에서 새 식구를 만나고 싶었어요. 이별이 무섭다고 사랑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더라고요.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나눌 서로가 있다는 것도 큰 위안이 됐겠어요. 난생 처음 강아지와의 동거 생활은 어때요?
은지 고양이와 강아지는 완전히 달라요. 먼저 달려와서 적극적으로 안기는 강아지를 보니까 처음에는 정말 신기했어요. 그리고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산책을 가는데요. 저는 집에서 종일 앉아서 그림 작업을 하기 때문에 틈날 때 밖으로 나가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건 알지만 잘 못 했어요. 토베가 오고 나선 산책과 작업 시간을 지키는 패턴에 적응 중이에요. 혼자 산책하는 것보다 훨씬 재밌더라고요.
인철 어제까지 북페어에 다녀오느라 군산에 머물렀는데요. 붕 뜬 시간에 바다 구경이나 하자며 변산해수욕장으로 갔어요. 신발이며 양말이며 벗어 던지고 다 같이 뛰어노는데 너무 즐겁더라고요. 아마 토베가 처음으로 바다를 본 날이었을 거예요.
세 식구의 집은 대구 도심이 아니라 자연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딘가요?
은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이라고 여기서 차로 25분쯤 가면 도착해요. 그 동네에서 산 지는 5년쯤 됐고, 2년 전에는 아예 주택으로 이사했어요. 언제나 자연과 가까운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었거든요. 읍내가 가까워서 인적과 동떨어진 건 아니지만요. 그곳에 있으면 계절감이 생생하게 느껴져요. 타닥타닥 빗소리가 들리고, 가을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나 벼가 익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풀 냄새도 항상 맡을 수 있고요.
인철 벌레도 이만한 게 나와요(웃음). 고스트북스는 화요일 하루만 쉬고, 월요일과 토요일엔 스태프분들이 맡아주시는데요. 남은 요일에는 출근하고 또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서점 일을 하곤 하지만, 일과 휴식의 시간을 분리해 보려고 해요. 그래서 집에 있을 땐 산책을 좀 길게 다녀오는 게 저만의 휴식이에요. 시골은 샛길이 많으니까, 오가는 경로를 다양하게 시도해 보거든요. 지나가기만 하던 길인데 여기로 가면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구나, 하면서 머릿속에 저만의 지도를 그리는 거죠.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일상이네요. 어느덧 고스트북스가 문을 연 지 8년이 되었죠. 그때도 교동은 사람이 붐비는 동네였어요?
인철 지금처럼은 아니었어요. 가게가 이렇게 많지도 않았고요. 교동을 선택한 이유는 그때 이 근처에 살았고, 자주 오가는 곳이다 보니 익숙한 동네였거든요. 1층 자리를 둘러보다가 3층까지 올라오게 되었는데 채광이 좋은 창이 인상 깊더라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교동은 음식점과 술집이 마구 생기고 젊은 친구들이 자주 찾는 동네가 되었어요.
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고 싶어요. 고스트북스에는 어떤 책들이 있어요?
인철 장르는 다양해요. 인문학이나 에세이, 소설, 문학 칸도 있고 출입문 근처에는 독립 출판물을 비치해 두었어요. 이쪽 매대에는 최근에 들어온 신간이나 오는 분들의 관심이 많은 것들을 모아두었고, 시집이나 사진집도 있어요. 창문과 가까운 쪽에는 예술 관련 도서와 해외 서적, 아트북을 두고요.
앞서 소개에서 각자 담당하고 있는 장르를 알려주셨는데요. 세상 모든 책을 가져다 둘 수 없으니 주인장의 시선이 중요하겠어요.
인철 음, 저는 스스로 흥미로워하는 책을 골라요. 같은 내용이라도 새로운 방식, 재미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요. 제가 이공계 출신이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책, SF 소설 같은 걸 즐겨 읽었기 때문에 서가에 몇 칸씩 꾸려 두었어요. 2-3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젊은 국내외 작가의 SF 소설이 대중화되어서 양질의 책을 읽을 수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생각보다 고스트북스를 찾는 손님들은 선호하지 않는 장르 같더라고요. 지금은 결국 한 칸만 남게 되었죠(웃음).
은지 저도 제 취향이 많이 반영돼요. ‘이 책을 누가 사 갈까?’라는 고민을 하는데, 그럼 나라는 사람이 우선 기준이 되더라고요. 나 같은 사람, 나와 비슷한 라이프스타일과 미적 기준을 가진 사람으로요. 책 앞에 서 있을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고르고 있어요.
나와 손님들 취향 사이에서 균형도 잘 잡아야겠네요.
은지 맞아요. 고스트북스가 우리 개인 서가는 아니잖아요. 두 사람의 취향에 너무 매몰된다면 손님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줄어들 거예요. 운영 초반에는 이걸 몰랐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매력적인 흥밋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종류를 준비하고 있어요.
인철 이곳에 와서 무언가를 소비한다는 건 손님과 우리의 호흡 같아요. 우리가 한마음으로 준비한 걸 손님들이 보고 호응해 주니까요.
책을 정리할 때 장갑을 낀다고 하던데 이유가 있어요?
은지 책도 낡기 때문에 손이 많이 닿으면 손때가 타요. 서점 가는 걸 좋아해서 예전부터 여행으로 어딜 가든 서점에 들르는데, 어떤 곳은 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면 어떤 곳은 책이 다 낡아 있어요. 책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은 좋지만, 자칫 방치되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언제나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고 싶어요. 여전히 새롭고 재미있는 것으로 여겨지도록요.
두 분이 한마음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 듯한데, 은지 씨의 클래스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죠.
은지 독립 출판 세계에 일찍 발을 들였어요. 2015년에 고스트북스라는 이름을 지어서 정식으로 출판 등록을 했고, ‘진 메이킹 클래스’도 시작했죠. 거기서 인철을 만나 같은 이름의 서점을 만든 후에도 수업은 계속되어서 현재는 40기예요. 수업은 거창한 마음보다는, 프리랜서 작가의 벌이가 들쑥날쑥하니까 안정된 수입을 얻고 싶은 맘에 시작했어요. 그때가 서울에 2 년 정도 머물다가 고향인 대구로 돌아온 상황이었는데 창작자와 창작을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컸고요. 내가 좋아하는 걸 나눈다면 무언가 될 수 있겠다는 바람으로 몇 페이지짜리 ‘진Zine ’ 만드는 수업을 기획했고, 당시 대구에서 단 하나뿐인 독립 서점 ‘더폴락’에 홍보를 부탁했죠. 그때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동료나 친구가 된 사람들도 있어요. 작은 책을 만든 걸로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하던 기억이 나요.
인철 다들 각자만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텐데 저한테는 글쓰기가 그랬어요. 힘든 순간이나 기억하고 싶은 순간에도 글을 쓰면서 스스로 위안을 받았거든요. 지금도 고스트북스라는 이름으로 나간 국내외 페어들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남기고 출간을 목표로 단편 소설도 쓰고 있죠. 그때는 글이 조금씩 쌓이는 걸 보니까 책으로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연히 더폴락의 수업 홍보 게시글을 봤을 땐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아끼며 살아가던 때라 마음을 접었어요. 이 수업료면 내가 밥을 몇 끼를 더 먹겠지, 싶었던 거죠. 며칠 후에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았다는 게시글을 또 우연히 봤고, 이건 계시라고 생각하며 신청했어요. 밥 몇 끼보다 이 시간이 나을 수도 있다고요.
인철 씨는 수업에서 은지 씨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면서요.
인철 맞아요(웃음). 제가 5 기 수강생이었을 거예요.
은지 저는 수강생으로 만난 거니까 인철에게 큰 관심은 없었는데요. 인철은 스스럼없고 사람을 대하는 것에 능숙하다 보니까 수업에서 분위기를 잘 이끌어 주더라고요. 뒤처지는 분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챙겨주고요. 저와는 반대 성향의 사람이고, 오히려 그런 점이 좋게 보여서 한편으로는 친구로 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인철이 자꾸 옆에 있더라고요. 수업마다 일찍 와서 기다리고, 맛있는 거 사 오겠다면서 같이 나눠 먹고요.
인철 수업이 전부 끝나고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한 적도 있는데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더라고요(웃음). 그래도 꾸준히 마음을 표현하면서 가까워졌고 사귀게 되었을 땐 저는 울산에서 엔지니어 일을 하게 됐는데요. 조직 생활에 적응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아서, 나는 누군가를 위한 일을 하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았죠. 사실 정해진 길처럼 선생님 추천을 받아 기계과에 가고 취업한 거라,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을 그제야 마주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지 씨가 인철 씨에게 먼저 서점을 만들자고 제안한 건가요?
은지 네. 인철은 흔쾌하고 진득하게 무언가를 함께 하기에 좋은 사람이에요. 인철이 책을 좋아하고 책 다루는 일을 하고 싶은데 그동안은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기에 가던 방향으로만 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는 그림과 책을 만드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도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이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고요. 서점을 하자는 제안에 몇 년간 고민하다가 함께해 주었죠.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행운 같은 서로 를 만났네요. 고스트북스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어요?
은지 ‘작업하는 나’라는 존재가 유령 같았어요. 평소에는 존재감 없이 어디선가 묵묵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데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완성한 결과물을 어떤 형태로든 발표하면 주변으로 영향력이나 기분 좋은 에너지가 퍼질 수 있죠. 존재감이 얕던 유령이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는 것처럼요.
그 유령은 무시무시한 느낌이 아니라 ‘캐스퍼’처 럼 말랑하고 친근할 것 같은데요. 유령을 어떤 모습으로 상상해요? 은지 음, 귀여운 느낌? 제가 그리는 그림들과 닮았을 것 같아요. 재미있는 무언가를 계속 궁리하기도 하고요.
인철 장난치고 싶어서 주변을 아른거리는데 짓궂은 게 아니라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은 느낌인 것 같아요. 때가 왔을 때 숨겨 둔 능력을 딱 보여주는!
은지 한편으로는 유령에 대해 이런 생각도 해요. 요즘은 책을 읽기보다 그 자체를 소비하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서점에 와서 책을 찾는 분들은 소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 직접 고른 책을 넘겨보는 것 자체가 용기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들도 어떤 에너지를 얻거나 발휘하기 위해서 책을 찾을 텐데, 그렇다면 창작자뿐 아니라 보는 이들도 ‘용감한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해요.
독립 서점으로 8 년 동안 한자리에 머물면서 크고 작은 고민들을 마주했겠죠. 최근엔 어떤가요?
인철 가게는 시기에 따라 성장의 높낮이가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작은 걸 해도 금방 반응이 올라오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크게 눈에 띄는 성장이 없을 수도 있어요.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기도 하죠. 팬데믹 시기에는 은지의 그림 작업이 두드러지는 세컨 브랜드 ‘리틀룸little room’을 만들고 온라인에서 활로를 찾았다면, 지금은 아주 느리게 성장하는 듯한 상태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 고민하고 있어요. 그게 요즘의 숙제예요.
은지 우리에게 성장이 무얼까 고민한 적 있는데, 손님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더라고요. 몇 년 전에 왔다가 이번에 다시 왔는데 여전히 좋다거나, 새로 알게 됐는데 이렇게나 오래된 곳인지 몰랐다는 말이요. 어떤 가게든 오래되면 낡을 수밖에 없지만, 낡게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게 성장 같아요. 그러기 위해선 우리부터 늙지 말아야 하는데(웃음). 같은 결에서 개인의 성장이 고스트북스의 다음 성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계속해서 다음을 생각하고 있네요.
은지 고스트북스보다 일찍 시작한 독립 서점들이 있잖아요. 10년 훌쩍 넘은 곳도 있고요. 저에게는 그분들이 아주 큰 힘이 돼요. 좋아하는 걸로 꾸준히 먹고살 수 있다는 증명이자 좋은 본보기 같아서요. 작은 서점이라도, 오래전에 세워졌더라도 손님들에게 다가갈 땐 언제나 신선하고 싶어요.
어느 책방은 고스트북스를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할지도 모르죠(웃음). 리틀룸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요. 직역하면 ‘작은 방’인데 은지 씨의 작업실을 말하는 건가요?
은지 맞아요. 저는 항상 방에서 일하니까 그곳에서 본 여러 가지 풍경을 담는다는 의미예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있잖아요. 내 안의 작은 방에서 만든 게 누군가의 방으로 간다면, 따뜻한 온기가 함께 전해지길 바라면서 그림을 그려요. 그걸 포스터나 카드, 작은 가방 같은 것들로 만들고요. 저는 예전부터 종이에 수작업으로 그리고 수채로 색칠하는데, 보는 분들이 편안한 작품이라고 해주세요. 아마 그게 물 농도에 따라 느낌이 다른 물감의 매력 덕분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도 물기를 머금은 은지 씨만의 그림들을 좋아해요. 방에선 어떤 풍경이 보여요?
은지 주변이 온통 시골이니까 특별할 건 없고요. 풀과 꽃, 식물 같은 자연, 고양이, 일상적인 생활용품들이 있어요. 이제는 토베가 있으니 그림에 강아지가 더 자주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The Cat Afraid of Dark Clouds》를 인상 깊게 지켜봤어요. 먹구름을 무서워한 고양이의 이야기라고요.
은지 ‘누군가의 머리 위에도 먹구름이 있는 날이 있겠지, 그 사람은 어떻게 구름을 대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만든 거예요. 코로나가 한창일 때 밤마다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져서 잠을 잘 못 자던 때가 있었는데요. 고장 난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메모장에 이야기를 썼어요. 한참 뒤에 책으로 만들기로 결정한 후에는 표지와 면지, 내지도 고심해서 고르고 하드커버를 씌운 후에 제목은 금박으로 썼어요. 애정이 듬뿍 들어간 작업이자,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작업이에요.
홈페이지에는 서점에서의 일상을 기록하는 ‘유령의 안과 밖’이라는 페이지가 있죠. “책을 채우는 창작 과정과 그것을 매력적인 형태로 구현해내는 일. 하나의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무언가를 책이라는, 실체를 가진 사물로 탄생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제작’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숭고한 가치’로 다가온다.”고 하셨어요. 어떤 마음으로 쓴 글이에요?
인철 누가 썼지?
은지 자기가 쓴 거 아냐?
인철 언제 썼더라, 아마 오래전 같은데요(웃음). 저희는 책이 가진 가치를 귀중하게 여겨요. 사람은 대화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생각을 상세히 알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생각을 서사가 담긴 문장으로 녹여내고 물성을 더해 책으로 만들면, 이 세상 어디에 있는 글쓴이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게다가 그 대화는 영원히 간직할 수도 있고요. 저는 그 대화로부터 생각이 확장되는 걸 여러 번 경험했거든요. 지구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 내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싶은 거죠. 어릴 때 어머니가 출판사 ‘계몽사’에 다니셔서《삼국지》나 세계 문학을 읽었을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된 이후에 《코스모스》도 마찬가지였어요. 인생 곳곳에 책이 있었고 그게 혼란스러운 시절의 저를 여기까지 끌어줬다고 생각해요.
은지 한 권의 책을 비싸지 않은 예술 작품이라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예술을 소유할 수 있어요. 작품을 나의 영역으로 들이는 것, 공간 한편에 얼마큼을 내어주는지에서도 책의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을 나의 일상에 둔다는 건 그만큼 삶의 일정 부분을 책에게 할애한다는 거잖아요. 저는 책한테 제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어요.
책을 누구든 소유할 수 있는 예술로 표현한 게 인상 깊네요.
인철 이 네모난 세상에는 한계가 많아 보여도 사실은 없어요. 심지어 네모난 모양이 아니어도 되고요.
그럼 잔혹한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만약 내일 세상의 모든 책이 사라진다면?
은지 (잠시 고민한다.) 책장이 텅 비어서 정말 이상할 것 같은데요. 고스트북스는 어쩌죠(웃음) ? 우선 책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을 구상해야겠어요.
인철 전 너무 놀랄 것 같은데…. 오늘 좋은 책을 전부 읽어서 내일 세상의 첫 책을 제가 만들 거예요!
하나 더 있어요. 고스트북스에서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은지 저는 장 그르니에의 깊은 사유를 느낄 수 있는 에세이 《 섬 》이요. 카뮈가 서문에 이렇게 써두었어요.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그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 아주 설레였던 기억이 있어요. 현재 머물던 자리에서 어딘가로 떠날 때 꼭 챙기던 책인데, 지금 돌아보면 외로운 순간마다 이 책을 펼치고 읽었던 것 같아요.
인철 저는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 룩 백 》이요. 《파이어 펀치 》 나 《체인소 맨 》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그 사람의 상상력과 서사를 구성하는 능력이 압축된 게 이 책이라고 생각해요. SF적인 요소도 있고요. 강력 추천합니다!
모든 질문을 잘 이겨내셨어요(웃음) . 문득 두 분에게 대구에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져요.
은지 저와 인철에게 대구는 돌아온 곳이에요. 더 많은 기회를 찾아 서울로 가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지만, 스스로 그곳과 잘 맞는 사람인지 계속 고민했어요. 내가 꼭 서울에 살아야지만 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대구로 가서 나를 먼저 돌보자고 생각해서 돌아왔죠. 그런데 정말 익숙하고 편하더라고요. 서울에서보다 삶의 질도 올라가고 지속가능한 일상을 찾은 것 같았어요.
인철 지방 소멸 같은 이야기가 매일 나오고 있듯이 저도 종종 한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저와 은지의 선택이잖아요. 지역에서도 충분히 정착하고 살 수 있다는 예시가 되길 바라요.
지난 어라운드와의 인터뷰에서, 대구에서 다양한 창작자와 서점 운영자들과 함께 늙어가는 상상을 한다고 하셨어요. 그 상상은 여전한가요?
은지 그럼요. 서점을 꾸리거나 창작자인 친구들이 주변에 있는데 북페어에 나갈 때 같이 숙소를 잡을 정도로 가까이 응원하면서 지내요.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왕이면 건강하게 잘하고, 잘 지내고 싶죠. 또 개인적으로는 좀더 우리와 어울리는 고즈넉한 동네로 고스트북스를 옮겨보고 싶은 소망도 있어요. 지속가능한 일상 안에서 언제나 새롭게 다가가고 싶거든요.
인철 언제든 와서 보물찾기처럼 나만의 신선한 영감을 발견하는 곳이길 바라요.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