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네가 묻고 우리가 답하는 이야기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항이다. 남편이 내려준 곳은 작년, 나 홀로 유럽 여행을 마치고 우리가 마주 안던 그 자리다. “엄마, 다음에는 혼자 가지 마. 영어 나라 나랑 같이 가.” 그 말이 우리를 오늘, 여기로 이끌었다. 공항으로 들어와, 큰 트렁크는 부치고 기내로 가져갈 캐리어를 확인했다. 여러 짐 사이에 그림책 두 권이 있다. 영국의 고전 그림책,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와 《그루팔로》다.

간식 먹으러 온 이룸이

“엄마, 이 호랑이는 좀 다른 호랑이 같지 않아?”

이룸이 도서관 귀퉁이에서 책 하나를 가져왔다. 제목은 한글로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소피랑 엄마가 간식(에프터눈 티) 먹는 시간에 누군가 벨을 누르고 찾아온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호랑이가 서 있는 게 아닌가. 호랑이는 배가 고프다며 먹을 걸 나눠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고, 소피와 엄마는 음식을 내어 준다.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먹어 치운 호랑이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소피의 집에 오지 않는다. 

이룸은 이 책을 좋아했다. 처음에 나는 소피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거라 생각했다. 물론 그 사정도 있을 테지만 호랑이를 재미있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호랑이가 간식을 아주 많이 먹는 게 매일 밥만큼 간식을 먹는 자신과 비슷하기 때문. 호랑이를 이룸으로 바라보니, 호랑이를 집에 들이는 게 아이를 키우는 일과 비슷하다 여겨졌다. 나와 남편이 사는 집에 ‘딩동’ 벨을 누르고 나타나, 안아달라고, 밥을 달라고, 놀아달라고 하곤 언제나 예상보다 더 많은 걸 해줘야 만족을 한다. 그 모습이 호랑이와 꼭 닮았다. 

영국에 오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디스커버 칠드런스 스토리 센터Discover Children’s Story Centre’에 가야 한다. 즉흥적이고 느슨한 일정을 자랑하는 우리가 유일하게 예약을 해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의 전시와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이 열리는, 동화를 기반으로 한 놀이 공간이다. 안내를 듣고 지하의 전시관으로 내려갔다. 벽에는 작가 주디스 커의 생애와 작품 소개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줄을 서니 시간에 맞춰 문이 열렸다. 소피의 집이다. 초대받은 손님인 양 신기하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테이블 중앙엔 이미 호랑이가 앉아 있다. “우와, 엄마, 호랑이가 왔어!” 상기된 목소리와 호기심 가득한 눈은 이룸만이 아니었다. 빨간 옷을 입은 직원은 내레이션을 하고 호랑이를 재연했다. 음식을 먹어 치울 때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토리텔링이 끝나자 안쪽으로 향하는 문 하나가 또 열렸다. 와! 여기는 주디스 커의 세상이구나. 정원에는 모그Mog가 혼자 놀고 있고, 방에는 가족이 테이블에 앉아 있으며 티브이 옆에는 주디스 커의 실제 트로피가 있다. 그 방을 지나면 딸의 장난감 선반이 있고(딸 이름을 써놓았다), 또 그 옆에는 작가 아들의 서재가 있는 식이다. 이제 상상은 우리의 몫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를 흔들어보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더한다. 이룸은 누군가 우리 집에 벨을 누르길 기대했다. “토끼가 오면 어떨까? 고양이도 괜찮을 거 같아. 다람쥐, 코끼리, 호랑이…… 또 누구 있지. 모두 다 같이 오면 더 좋아.”

누군가 우리 집에 불쑥 온다면, 나는 이룸처럼 반가워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소피의 엄마처럼 편안하게 맞이할 순 없다. 그제야 소피와 호랑이 뒤에 있는 부모가 보인다. 그들의 태도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누가 오든 우리의 삶은 쉽게 흔들리지 않아. 지금까지 그래왔던 거처럼 그저 우리의 인생을 살 뿐이지.’

끝나지 않은 이야기

런던의 해처드 서점을 좋아한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220년이 넘었다’라고 검색창에 나와 있는 곳. 문학, 예술 서적을 지나 3층에 올라서면 영국의 한 가정집에 들른 듯 정갈하고 아늑한 소파가 볕을 가득 품고 있다. 이룸은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에 앉는다. 여러 인형과 책을 뽑아 보는 사이 나는 눈치채지 못하게 그림책 서가로 간다. 반가운 책을 발견했다. 우리가 트렁크에 넣어온 또 하나의 책 《그루팔로》다. 그루팔로 CD, 인형, 책 엽서 등이 한데 모여 있으니,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루팔로》 책 위에 50주년이라는 스티커가 반짝인다. 뭐가 다른가 하니, 책 표지를 두껍게 한 번 더 싸고, 점선을 따라 뜯을 수 있는 종이 인형이 들어 있다. 이런 건 꼭 사줘야 한다.

그날부터 날마다 자기 전 이 책을 읽었다. 글 작가인 줄리아 도널슨은 원래 동요를 만들던 사람이다. 요즘도 남편과 함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가끔 그루팔로 인형 탈을 쓰기도 하면서. 유튜브에서 작가가 부른 노래를 듣고 춤을 춰보면, 책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런던에서 우리가 겪은 그루팔로와의 접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아침 우리는 엉겁결에 그루팔로 연극을 보게 된다. 사연은 이렇다.

전날 우리는 런던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기 위해 언니네 가족과 <라이온 킹>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이룸은 그날 아침 “야호-”라고 폴짝 뛸 만큼 좋아했다. 낮에는 버스에서 케이크와 에프터눈 티를 먹으며 투어를 했고, 왕립미술관도 들렀다. 그사이 좀 많이 걷고 졸리기도 했지만 “<라이온 킹> 오늘 보는 거지?”라고 물으며 그 시간을 버텼던 거 같다. 노란 현수막이 보이자 설렘을 안고 극장 입구에 다다랐다. 언니가 티켓을 내면서 물었다. “네 티켓은 어딨어?” “어……? 같이 예매한 거 아니……었어?” 아뿔싸! 언니네 가족과 함께 예약 일정을 조율하다가, 서로 오해를 한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티켓이 없었다.

바로 이룸을 봤다. 금방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더니, 돌아가야 한다는 내 말에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여행 12일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내가 더 울고 싶었다. 이룸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린 날인지 잘 알기에. 아이의 간절함과 속상함을 지켜보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 

터벅터벅 코벤트 가든으로 돌아가면서 이룸에게 말했다. “엄마가 정말 미안해. 할 말이 없다.” “…….” “그럼 우리 다른 거 볼까? 이룸이 그루팔로 좋아하지? 근처에 보니까 그것도 하던데, 잠깐만! 이 시간에 하는지 찾아볼게.” “……그루팔로 볼래. 근데 라이온 킹도 보고 싶어…….”

코벤트 가든 의자에 앉아서 나는 급하게 내일 오전에 하는 그루팔로 연극을 예매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그사이 이룸은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비둘기 몰이 하는 아이를 지켜보더니, 몇 번은 엷은 미소를 지은 거 같다.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쉬운데, 시간이 늦어서 딱히 갈 데가 없다.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면서 나는 나에게 하는 건지 이룸에게 하는 건지 모를 위로를 했다. “이룸, 이제 영국 안 올 거 아니지? 우리 또 오라고 이런 일이 생겼나 봐. 여행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 그치. 그래도 미안해…….” 

그러자 한결 밝아진 이룸이 말했다. “엄마 잘못이 아니야. 내가 아까 울어서 미안해.” 나는 이 아이의 유연함이 날마다 놀랍다. 때로는 작은 일에 있는 힘을 다해 고집부리지만, 큰일에 쉽게 매몰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룸이 웃으니까 내 마음의 돌도 조금 가벼워졌다. 아이를 따라서 “하하” 소리 내 웃기도 했다. 혼자였다면 이렇게 빨리 털어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그 다음날 우리는 그루팔로를 성공적으로 봤고, 라이온 킹일랑 잊고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라이온 킹에서 그루팔로로 이어지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그곳에 남기고 왔다. 해피엔딩이 될지 네버엔딩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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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일러스트레이터 김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