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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민
너희가 전통주를 아느냐
이지민
“일단 이거 한 잔 드셔보세요.” 첫마디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연거푸 몇 잔의 술을 권했다. 낮술이라니. 어쩐지 두려웠지만 시키는 대로 술잔을 들었다.
Interview
대동여주도(酒) 콘텐츠 제작자 이지민
전통주의 지도를
엮는 일
제가 방금 마신 술이 뭔가요?
어제 막 양조장에서 받은 해창 막걸리예요. 요즘 나오는 막걸리 중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술 중 하나죠.
일반 상점에서 만나기 힘든 브랜드 같은데.
보통 양조장에서 직접 판매하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는 없어요. 조만간 온라인 판매가 가능해지면 그때는 좀 더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처음부터 술을 마셨더니 순서도 잊었네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마케팅 회사 PR5번가를 운영하고 있어요. ‘대동여주도’라는 전통주 소개 콘텐츠와 ‘니술냉 가이드’라는 주류 소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고요.
블로그를 보니까 술에 관한 자료가 방대하더라고요.
사실 전문은 와인 분야였어요. 예전 직장에서 와인과 커피를 홍보했거든요. 지금은 전통주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종을 알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네요. 사실 전통주만 가지고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외국 술과 전통주를 비교하는 콘텐츠를 만들기도 해요.
전통주를 만나게 된 시작이 궁금해요.
와인을 다룰 때는 외국의 와이너리 투어를 많이 다녔어요. 정말 멋지게 잘 꾸며놨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전통주 양조장에 가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어요. 명인이 운영하는 양조장이었는데도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술을 빚더라고요. 마치 《어라운드》 매거진을 보다가 이름 없는 지방 신문을 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명인들과 직접 대화 나누고 함께 술을 마셔보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술도 좋고, 스토리도 좋고, 정말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겠더라고요. 그 뒤로 제가 배운 걸 이곳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해서 대동여주도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전통주라는 내용은 좋은데 포장이 문제였던 건가요?
포장까지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전통주는 아예 관심 밖의 일이었어요. 우리나라 주류 시장의 규모가 약 4조에 달하는데 전통주의 비율은 고작 0.5퍼센트밖에 안 돼요. 저만 해도 몇 년간 술만 다뤄왔지만 전통주는 생소했으니까요. 어쩐지 전통주라고 하면 독할 것 같고 이미지도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양조장에서 직접 빚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술을 마시니 달게 느껴지더라고요.
각각 나름의 사연이 있다고요.
술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는 또 얼마나 깊은지, ‘송화백일주’ 같은 경우는 1년에 2천 병 정도만 생산돼요. 전북 완주 수왕사의 주지스님이 대대로 전수받아 만드는 술인데, 직접 나무에 올라 송화 가루를 채취하고, 오미자와 각종 한약재를 넣어 오랜 시간 빚거든요. 그러다 보니 한정된 수량을 만들 수밖에 없고요. 바위에서 수행을 하다 보면 몸이 차가워지잖아요. 그때 곡차라고 해서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 술을 만들어 마셨던 거예요. 이야기를 거슬러 오르면 신라 진덕여왕 때까지 닿게 되죠.
그래도 아직은 전통주가 젊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오랜 역사에 비하자면 덜 알려졌다는 느낌도 강하고요.
그전에는 홍보도 미미했고, 유통 경로도 몇 없었어요. 2014년에 처음 대동여주도를 만들 때 소개한 술이 문배주였는데, 그때 문배주를 판매하는 맛집을 함께 소개해야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곳이 없는 거예요. 겨우 세 개의 맛집을 찾아서 정보를 완성했죠. 그 후로는 틈틈이 셰프들을 찾아 직접 술을 소개해요.
전통주가 잘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나름 생각한 것이 있어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힘든 역사를 지나왔잖아요. 문화말살정책을 펴기도 했고, 먹고살기 힘드니 쌀로 빚는 술 역시 자연스레 사라졌고요. 그래서 저렴한 희석 소주나 밀 막걸리가 등장했죠. 고유의 맛을 대체하기 위해 아스파탐(단맛을 내는 인공첨가물)을 비롯한 첨가물을 사용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온 거예요. 오랫동안 이어온 술의 역사가 사라진 거죠.
저렴한 희석식 소주가 더 많이 유통되는 이유가 있었네요.
역사적으로 어쩔 수없이 태어난 안타까운 산물이 지금의 현실이 된 거죠.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좋은 술을 만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쉽게 밖으로 끄집어낼 판로도, 알릴 방법도 쉽지 않아요. 술을 빚는 분 중에는 어르신이 유난히 많아서 그마저도 접근이 쉽지 않아요. 자료를 요청해도 쉽게 받을 수 없으니 언론 홍보도 사실상 요원하죠.
중간에서 역할이 중요할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는 거죠. 신문이나 잡지에 특집 페이지를 구성하기도 하고, 양조장과 언론의 중간 역할을 하면서 샘플을 대신 보내주기도 하고, 셰프들과 함께 페어링이나 마리아주를 하기도 하고요.
힘든 일일 것 같은데, 어떤 목표가 있나요?
3~4년 안에 우리나라의 모든 양조장을 소개하고픈 목표가 있어요. 가끔 내용은 좋은데 패키지가 조악한 곳은 직접 디자인 작업을 돕기도 하고요. 쉽지 않은 일이겠죠.
전통주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
전통주라고 하면 동동주나 막걸리 같은 탁주만 생각했어요. 전통주의 종류를 이야기해주세요.
고두밥을 쪄서 누룩과 발효를 시켜요. 그것을 그대로 뜨면 막걸리 같은 탁주이고, 맑게 걸러내면 약주가 돼요. 그것을 다시 증류시키면 증류주가 되는 거고요. 막걸리만 해도 전국에 2천여 종이 넘어요. 전통주 역시 500개가 훌쩍 넘고요. 아직 제가 잘 모르는 술도 엄청 많죠.
주요 전통주에는 무엇이 있나요?
우선 나라가 지정한 무형문화재는 서울 문배주, 교동 법주, 면천 두견주 세 가지가 있어요. 그 다음은 명인이 만든 술이 있고, 지방의 농산물로 만든 특산주도 있어요. 그것까지 다 전통주라고 볼 수 있죠.
망원동에 ‘복덕방’이라는 술집에 간 적이 있는데, 막걸리 종류가 엄청 많더라고요. 그전에는 슈퍼에서 파는 막걸리 두세 종밖에는 몰랐거든요.
제가 오늘 보여드린 막걸리는 아스파탐이나 사카린이 첨가되지 않은 막걸리예요. 사람들이 막걸리를 먹고 난 후에 숙취가 심하다고 하는 이유가 첨가물 때문이거든요. 70~80년대 막걸리를 대량 생산할 때는 발효를 빨리 시키기 위해 촉진제를 사용했어요. 자연적으로 숙성된 술이 아니다 보니 단맛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고요. ‘이화백주’나 ‘문희’ 같은 프리미엄 막걸리가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해도 장인의 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훨씬 풍미가 있어요.
인공감미료가 그렇게 안 좋은가요?
단맛의 질이 달라요. 제조 과정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자연스러운 맛을 추구하는 건 다 이유가 있죠. 사실 감미료는 일종의 보험 같은 거예요. 이제껏 그래왔으니 갑자기 빼면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용해요. 그래서 저는 막걸리를 제조하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인공감미료를 빼달라고 설득해요. 같은 종류의 술이라도 빚는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모두 다를 수 있거든요.
저희 동네에 중국집이 엄청 많아요. 탕수육 맛이 조금씩 다른 것과 비슷한 이치네요.
그럼요. 술은 기본적으로 재료나 온도, 손맛에 따라 좌우되고 특히 물맛이 많은 비중을 차지해요. 쌀을 쪄서 고두밥을 식힌 후 누룩과 버무릴 때도 얼마나 정성껏 오래 버무리느냐에 따라 맛이 확 달라지고요.
저는 술을 무작정 들이켜는 편이에요. 조금 더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요?
사실 아주 작은 편견을 지우면 돼요. 전통주라면 무조건 도자기 잔에 마셔야 할 것 같잖아요? 하지만 저는 와인잔을 사용해요. 저마다 특유의 색이 있고, 향이 있고, 입으로 넘겼을 때의 고유한 맛이 있는 거니까, 그 모든 걸 느끼기 위해서 도자기 잔은 무리겠죠.
말 그대로 술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에 집중한다는 뜻인 거죠.
술을 만든 사람의 모든 것이 그 술잔에 담기는 거잖아요. 오롯이 느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술잔인 거죠. 사실 흔히 마시는 희석식 소주는 무색무취에 소독약 냄새가 나기도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들이붓는 식으로 술을 마시죠. 제 바람은 증류식 소주의 비중을 높이는 거예요. 희석식과 증류식이 분리되어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아예 다른 형태의 술을 만들기도 한다고요.
대표적인 예로 떠먹는 탁주가 있어요. 쌀을 많이 넣고 농축시켜서 걸쭉하게 만드는데, 고려시대의 귀족들이 주로 즐겼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좀 전에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안 상했을 거예요. 냉장 보관했기 때문에.
초콜릿 같은 느낌이에요. 쌉싸름한 맛도 있고요. 무턱대고 먹으면 취하겠는데요.
잣 잎을 넣어서 만든 이화주예요. 물에 타 먹기도 하고 그냥 떠서도 먹어요. 앉은뱅이 술이죠.
확실히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니술냉 가이드에서 소개했을 때 인기가 많았던 술이에요. 하나하나 패키지가 돼 있어서 먹기가 편하죠. 파티 같은 곳에 가져가도 좋아요.
파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술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잖아요? 하지만 전통주라고 하면 어쩐지 전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의외의 조합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마리아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요. 몇 가지 추천하자면 막걸리와 빵의 조합이 의외로 좋아요. 곡물과 곡물이 만났을 때 고소한 맛이 극대화되거든요. 배와 생강, 계피로 맛을 낸 이강주 같은 경우는 프라이드치킨에 잘 어울리고, 배를 조금 더 갈아서 함께 얼린 다음 아이스크림처럼 먹어도 좋아요. 솔송주는 치즈 케이크와 함께 먹으면 입에서 녹는 느낌이 새롭고, 조금 도수가 높은 술은 초콜릿과 함께 먹는 게 좋죠. 그 외에도 송화백일주와 양갈비, 감홍로와 바닐라아이스크림은 서로를 조화롭게 보완해줘요.
어쩐지 바에 앉아 원하는 술을 추천받는 느낌인데요(웃음). 실제 전통주를 맛볼 수 있는 가게를 추천해주세요.
주점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전통주를 보유한 ‘백곰막걸리’를 꼽을 수 있어요. 술을 엄청 좋아하는 부부가 차린 곳인데 대략 220여 종의 술을 맛볼 수 있고요. 역삼동 쪽의 ‘작’이라는 술집은 전통주를 잔으로 맛볼 수 있는 바예요. 신촌 쪽의 ‘산울림1992’라는 민속주점은 코스 요리를 즐기면서 전통주를 맛볼 수 있고, 연희동의 ‘이파리’라는 곳도 괜찮아요.
대답이 술술 나오네요. 혹시 매일 술을 드세요?
매일 먹죠. 이게 일인데. 대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약도 먹고 이것저것 다 해요. 여든 살까지 술을 먹자는 게 인생의 목표거든요. 아, 이따가 컨디션 하나 챙겨가세요. 술도 조금 싸드릴 테니 그것도 가져가고요.
전통주가 낯선 이들을 위한
추천주
01 풍정사계 춘(충북 청주) | 화양양조장, 15도
풍정은 단풍나무 우물이 있는 동네에서 빚는 춘하추동 술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찹쌀과 누룩, 물로 100일 동안 숙성시키고, 인공첨가물은 일체 가미하지 않았다. 과실향의 복합미가 일품이며, 상큼한 사과향, 꽃향 등이 어우러져 봄의 향취를 자아낸다. 적당한 바디감과 산미도 갖추고, 단맛도 많지 않아 주당들이 반기는 술이다.
02 담솔(경남 함양) | 명가원, 40도
솔송주는 사대부가 정여창 선생 집안에서 500년간 이어진 고급 증류주로 현재는 박흥선 명인에게 전수되어 꽃을 피웠다. 은은히 퍼지는 소나무 순의 향과 솔잎의 신선한 느낌을 입안 가득히 느낄 수 있으며, 맛이 부드럽고 뒤끝이 깨끗하여 평소 증류주를 선호하는 전통주 입문자라면 이 술부터 맛보길 권한다.
03 고소리술(제주) | 제주샘주, 40도
화산섬 제주에서는 좁쌀을 활용해 술을 빚었다. 오메기떡을 누룩과 함께 발효시켜 만든 술이 오메기술이다. 다시 이 오메기술을 증류하여 만든 술이 바로 40도의 고소리술이다. 도수가 높지만 담백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을 자랑한다. 고소리술은 제주도 음식과 유난히 잘 어울리는데, 특히 물회와 같은 제주 해산물과 곁들이면 좋다.
04 해창막걸리(전남 해남) | 해창주조, 6도
해풍을 맞고 자란 1등급 해남 쌀 100퍼센트에 지하 150미터 우물의 지하수를 정수해 빚는다. 직접 빚은 누룩을 쓰고, 아스파탐을 첨가하지 않는다. 햅쌀과 찹쌀이 어우러져 담백한 맛을 내며, 입안 가득히 상큼함과 천연의 단맛을 내 애주가들의 호응을 얻었다. 가장 순한 6도 외에도 9도와 12도 제품도 함께 출시되어 있다.
05 술취한 원숭이 | 술샘, 10.8도
홍국으로 빚어 선명한 붉은색을 띤다. 도수는 10.8도로 높은 편인데, 무감미료로 막걸리를 빚을 경우 11도 전후가 맛을 잘 살려내기 가장 좋기 때문이다. 이 술은 꼭 와인 잔에 맛보길 권한다. 특유의 향을 느끼기 좋으며, 붉은 컬러가 파티 분위기를 살린다. 여기에 고소한 견과류와 담백한 치즈, 간단한 과일과 곁들이면 좋다.
06 문희 | 문경주조, 12도
물 좋기로 유명한 문경에서 생산되는 프리미엄 탁주다. 양조자 홍승희 대표는 전통 탁주 제조 방식을 차용해 술을 빚고 있으며, ‘문희’의 경우 쌀과 누룩, 물 외에는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는다. 최종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90일. 오미자가 들어가 살짝 새콤하면서도 달지 않다. 농도 깊은 진한 맛의 막걸리로 선물용으로 적합하다.
대동여주도(酒)
H. facebook.com/drinksool
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안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