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Let's Go Around the Town
우리는 살면서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그 속에서 ‘다들 나와 비슷하게 사는구나’ 하는 위안을 얻는다. 누군가 ‘인생은 관계와의 질퍽한 연애’라고 하지 않았던가. 여행에 무슨 기술이 필요할까마는 굳이 하나를 꼽자면 새로운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낯선 풍경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어보는 일만큼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없다. 나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Ankara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다. 지루할 틈 없이 왁자지껄한 캠퍼스는 늘 활기가 넘치지만 때로는 조용한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른 아침이면 새소리가 들리고, 눈이 오면 사락사락 바닥에 눈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고양이들의 사뿐한 발자국 소리와 내 숨소리에 흠칫 놀라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오고 싶었다. 봄이 오고 있던 4월의 어느 날, 나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보랏빛 백합꽃 샤프란 향기가 가득한 터키의 작은 마을로 떠났다.
샤프란볼루Safranbolu 차르시 마을은 과거 실크로드 상인들이 기나긴 여정 중 잠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던 곳,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터키의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을 기대하는 여행자들에게 그다지 매력 있는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의 일상에 깃들어 휴식을 취하고 싶은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마을 주민들을 오랜 친구처럼 사귀고, 그곳을 찾은 여행자들에게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 오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가방 바퀴는 남아나지 않았으리라. 여행자들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호스텔에서 열아홉 살의 페르둔을 만났다. 낮에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저녁에는 이곳에서 일하는 그는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에 거의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영어가 유창하다거나 흠 잡을 곳이 없다는 건 아니다. “방 하나 있어?”라는 질문에 그는 다짜고짜 나를 자리에 앉히고 “차이?” 하며 되묻는다. 역시 터키인답다. 터키인들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차이Turkish Cai, 터키의 홍차로 하루에 여섯 잔 이상은 기본이다. 모든 음식점에서 식사가 끝난 후 차이를 내어오고 특히 여행자들에게 건네는 “차이 한 잔 할래?”는 “나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의 뜻과 마찬가지라고. 나 역시 터키에서 머무르는 6개월간 차이 한 잔을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친구를 사귀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가. 그는 붉게 우린 차이를 커피잔보다 큰 컵에 가득 담아왔다. 이곳의 명물인 터키 과자 로쿰Turkish Delight도 함께.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내가 차이와 로쿰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던 그는 3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삐걱삐걱 나무 계단을 밟고 오르니 어릴 적 뛰어 놀던 외갓집 나무 바닥이 떠오른다. 가볍게 짐을 풀고 아직 여행시즌이 시작되지 않아 조용하다 못해 적적한 호스텔 라운지로 내려갔다. 또 한 잔의 차이를 마시는데 마침 한국인 부부가 들어왔다.
올해 결혼 3년 차라는 부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년간의 세계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품어온 로망이었다. 그들의 단단함이 부러우면서도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마음에 쏙 드는 음악을 발견했을 때, 한 줄 한 줄 가슴에 박히는 구절을 만났을 때, 부드러운 커피와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었을 때, 그리고 지금처럼 샤프란의 복잡하고도 옅은 색과 향기에 매혹될 때. 나를 기쁘게 하는 게 이토록 많다니.
내일이면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넘어간다는 부부에게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를 알려주고 있는데 페르둔이 다가와서 묻는다. “비라? 에페스?” 에페스Efes는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다. 고로 이 말은, “맥주 마실래?”라는 거다. 이에페스를 나누는 자리에는 페르둔의 친구인 카디르와 함자, 엔디르도 함께였다. 우리는 어설픈 영어와 터키어를 섞어서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영어 실력이나 나의 터키어 실력은 오십 보 백 보.
대학생인 페르둔과 동갑인 카디르는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이유를 물어봤지만 나에게 그 이유를 영어로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없다. 그냥 그렇다 치자. 함자는 나와 동갑내기였는데 “우리는 친구야. 그러니까 넌 내 편이야”라며 하이 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엔디르 아저씨, 앙카라에서 일하다가 조용히 공부하기 위해 이 마을에 왔다는 그는 나 역시 앙카라에서 왔다는 말에 터키어로 마구 질문을 쏟아냈다. 친구들 어깨 너머 귀동냥으로 배운 터키어가 밑바닥을 드러낼 때쯤 페르둔이 어디선가 터키어-영어 사전을 가져왔다. 작은 사전 하나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싶겠지만 친구가 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단순한 단어 나열만으로도 대화는 통하게 되어 있었다. 언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며칠 밤을 함께 노래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애초에 아무 계획 없이 온 덕분에 마을에서의 하루하루는 오롯이 내 소유였다. 가고 싶은 대로, 발길 닿는 대로 그저 걸으면 되는 것이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아라스타Arasta라 불리는 골목길이 마을 중심부로 나를 이끌었다. 때마침 토요일은 작은 바자르Bazaar가 서는 날이다. 몇 안 되는 나의 철칙 중 하나는 어디를 가더라도 시장 구경은 꼭 해야 한다는 것. 시장에 가면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여과 없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친절하기만 한 관광지에서 받는 배려보다 거칠고 투박해도 시장에서 느끼는 감동이 더 오래 남았던 터라 주저 없이 시장으로 향했다. 로쿰을 파는 곳부터 테이블보와 카펫, 사프란 비누, 작은 기념품을 파는 가게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허투루 보고 지나칠 수 없다.
그리 크지 않은 시장임에도 나는 이곳에 장장 다섯 시간을 머물렀다. 그러다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꽤나 흥미로운 가게를 발견했다. 약 두평 남짓한 공간, 유리 공예를 하는 아저씨의 가게다. 여기에 오래 머무르면 분명 사게 되리란 걸 알면서도 지나치지 못하고 “메르하바, 규나이든(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인사를 했다. 검은 머리의 동양 여자애가 건네는 터키 인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만들고 있던 작은 유리 배지를 건넨다. 그리고 다시 작업에 열중하는가 싶더니, 내가 잠깐 스쳐가는 여행자와 달리 가게를 떠나지 않자 작품을 하나하나 꺼내 설명해주었다. 직접 만든 수공예품에 감탄하며 카메라를 들고 “Photo, Okay?” 하고 물으니 아저씨 역시 “No problem”이란다. 그 작은 공간에서 우리는 30분이 넘게 대화를 나눴다. 나는 영어와 한국어로, 아저씨는 터키어를 썼지만 그래도 충분히 즐거웠다. 가게를 나오면서 무당벌레 모양의 귀걸이와 아주 귀여운 고양이 목걸이를 하나씩 샀다.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아저씨를 기억할 심산으로.
북적북적한 시장 길을 지나 마을 길로 들어섰다. 높다란 돌벽이 서 있는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걸었다. 내가 이런 조그마한 마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처럼 골목 모퉁이를 돌면 또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모퉁이를 도는데 줄넘기를 하던 아이들이 달려와 “포토 포토!”를 외친다. 내 카메라 앞에 한껏 포즈를 취하더니 이내 나를 자기네들 가운데로 이끈다. 같이 찍자는 거다. 수십 장의 사진을 남긴 후에야 본격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 언제까지 있어? 여기 좋아? 남자친구는 있어?” 한 번에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아는 터키어를 죄다 끌어다 성심 성의껏 대답하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내 말 끝마다 까르르 하고 웃는다.
그러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돌아가면 우리 사진 보내줘” 하고 말한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러지 뭐, 주소를 물으니 주소가 없단다. 어떻게 주소가 없을 수 있는지 몇 번이나 되묻는 나를 이끌고 자기 집 대문 앞까지 갔다. 정말 문 근처에는 어떠한 숫자도, 글자도 없다. 주소가 없는데 무슨 수로 받겠다는 건지 자꾸만 떼를 쓴다. 메일 주소나 SNS를 물어봤지만 있을 리 만무했다. “앙카라로 돌아가면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숙소로 보내줄게” 하고 일러 두었다. 작은 마을이니까 페르둔이 전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이번에는 줄넘기를 같이 하자고 한다. 흐드르륵 언덕에 올라야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놀자!”
얼마나 뛰어 놀았을까, 고등학교 체육시간 이후론 이렇게 뛰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정말 언덕에 올라야겠다며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남학생 무리들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수줍게 말을 건다. “사진, 같이 찍어요.” 터키를 여행하다 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 연예인도 아닌데 그들은 나와의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한다. 한 명과 사진을 찍으니 앞 다투어 “나도!”를 외친다. 다 함께 찍으면 좋으련만 꼭 한 명씩 찍어야 한단다. 사진을 찍고 나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흐드르륵 언덕에 오르려 한다는 내 말에 그럼 자기들이 데려다 주겠다고 선뜻 나선다. 여섯 명의 보디가드는 생각보다 든든했다. 나보다 한참은 어린 꼬마 신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고, 아이들은 여기서부턴 입장료를 내야 한다며 돌아가겠다고 했다. 내가 대신 내주겠노라 했지만 자기들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며 괜찮단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언덕 꼭대기에 선 나는 차르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빨간 지붕이 매력적인 작은 마을, 오전에 다녀온 시장과 골목길, 사람들의 일상까지 마음 속에 눌러 담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준비를 한다. 여기서 바라보는 일출이 그렇게 멋있다는데,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일출을 보러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슬슬 걸어 내려와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골목 어귀에서 또 누군가 나를 부른다. 이번에는 팔찌와 귀걸이를 판매하는 메흐멧 아저씨. 몇 잔이나 마신 차이를 또 한 잔 하고 가란다. 공짜로 얻어먹는 주제에 참 뻔뻔하다 싶지만 차이는 많이 마셨으니 이번에는 애플티를 부탁했다. 차를 홀짝이며 얼마간 머무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부이룬! 부이룬!(들어오세요. 환영해요)”을 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미소만 짓던 아저씨도 이제 손님이 오면 “아이쉐~!” 하고 나를 불렀다. 아이쉐는 카파도키아 여행 당시 투어 가이드였던 에페가 지어준 내 터키 이름이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게에 들어온 손님들외국인 여자애가 장사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연이어 판매에 성공했다. 메흐멧 아저씨는 자신이 직접 만든 팔찌를 선물하며 나보고 돌아가지 말고 매일 여기로 출근하면 안되느냐고 묻는다. 비즈니스에 소질이 있다나 뭐라나.
작은 마을은 이래서 좋다. 모두가 이방인에게 맘씨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 물론 어디나 물건을 팔기 위해 먼저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소한 이곳, 차르시 마을 사람들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쪽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조건 나를 좋아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낸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 전 세계 공용어나 마찬가지인 영어마저 통하지 않는 곳, 하지만 낯선 사람과 낯선 언어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곳. 거리를 걸을 때마다 “촉 규젤(너 참 예쁘다)”이라며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나는 지금 터키의 작은 마을에 있다. 이 골목을 지나면 또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설렘을 안고, 오가는 사람들의 틈 사이에 한참을 서 있었다.
흐드르륵 언덕
HIDIRLIK TEPESI
한번 들어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그 이름도 어려운 흐드르륵 언덕. 사프란볼루의 전경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1994년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자랑스럽게 서있고, 주변은 예쁜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높은 언덕에 올라 오래된 가옥과 자미를 내려다보면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깊어지는 감동이다. 그저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흐드르륵 언덕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도 좋다. 우리 모두 시간 부자인 여행자니 조금 더 서둘러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자. 개인적으로는 언덕에서 듣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참 좋더라. 1리라의 입장료가 있지만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는 매표소에 사람이 없어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 단, 두 가지만은 꼭 기억하자.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 하더라도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는 건 지양할 것, 관광객에 대하는 친절한 터키인들의 ‘환대’와 사심이 가득한 ‘접근’은 구분할 것.
글 사진 김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