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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플레져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세주
길티 플레져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말 그대로 ‘가책을 느끼는 기쁨’인데, ‘죄의식을 동반하지만, 막상 했을 때 즐거운 일’을 의미한다. 내게 좋지 않으리란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잘 알지만 당장의 기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즐기는 셈이다. 연관 검색어로 ‘각설탕의 무게’. ‘단무지 칼로리’ 등이 나오는 것을 보니 누군가 남모르게 즐긴 길티 플레져를 상상하게 된다. 뭐랄까, 몰래 비밀 일기를 읽는 느낌 같은 것.
새벽 탈출
정시안 | 취업준비생
요즘에 뭐가 잘 안 돼요. 잠도 잘 안 와요. 누워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아세요? 지금 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데도 지구는 돌고 있겠지, 그만큼 나는 사람들 틈 밖으로 내몰리고 있겠지, 그리고 그냥 그 자체가 나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들어요. 이게 라디오가 그냥 노래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사람 목소리 들으면 괜히 마음이 더 말랑말랑해지거든요. 그럼 또 눈물이 막 줄줄 나요. 이 눈물이 점점 무거워진다 싶으면 그대로 밖에 나가요. 그게 낮이어서는 안 돼요. 오후도 아니고 저녁도 밤도 안 돼요. 무조건 아주 컴컴한 새벽이어야만 해요. 새탈이죠, 새벽 탈출.
집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없어요.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기분이 아주 묘해져요. 세상이 이렇게 조용한 시간도 있구나, 이렇게 조용한 시간도 필요하구나, 세상이 원래 그런 거구나, 하고 생각하죠. 밖에 나가서 딱히 하는 건 없어요. 편의점에 가거나 그냥 휘적휘적 걸어 다녀요. 사실 ‘새탈’을 한 번 하고 나면 다음 날 리듬이 완전 깨져요. 눈 떴을 때 오후가 되어 있으면 기분이 무지 안 좋거든요. 하지만 그 순간이 저의 불안을 진정시켜줘요. 가족들이요? 아직 한 번도 안 걸려봐서 모르겠어요. 모른 척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고칼로리, 고가격 요리 먹기
이지영 | 방송국 막내작가
다짜고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방송국 취직하지 마세요. 막내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면 더 하지 마세요. 방송국 현장에서 일하면서 막내부터 시작하지 않는 일이 있냐고요? 맞아요. 그냥 다 하지 말라는 말이죠. 온갖 잡일은 수직으로 내려오고, 눈칫밥은 기본에 얄짤없는 야근. 박봉으로 ‘텅장’이 된 지는 오래예요. 집으로 돌아가는 밤, 택시 안에서 갑자기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느낌이 들면 저는 마구마구 먹어요. 특히 아주 비싼 것을 먹어야 직성이 풀려요.
쉬는 날이 오면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이것저것 시켜 먹고, 한밤중이라 갈 곳이 없을 땐 비싼 배달 음식을 시켜 먹죠. 한번은 한우육회랑 한우등갈비 시켜 먹은 적도 있어요. 먹으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건지, 돈을 쓰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폭식은 사실 위장이 두들겨 맞은 것과 같대요. 웬만하면 폭식이나 과식을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뒤통수로 스트레스가 쭈욱 올라오는 기분이 드는 날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어요. 제 위장에게 아주 ‘길티’하죠? 하지만 제 통장에게도 아주 ‘길티’하답니다
야한 영화 보기
안희진 | 대형 서점 직원
저는 가명으로 해주세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건데 저는 야한 영화가 너무 좋아요. 성인인데 이게 뭐 어떻냐고요? 맞아요. 이건 죄책감 들 일이 아니죠. 하지만 밖에서 전혀 그렇지 않은 척, 누구보다 성인군자인 척, 시사영화만 좋아하는 척, 전 세계의 모든 고민을 나 혼자 해결하려 끌어안는 척 하는 제 모습과 괴리감이 너무 크거든요. 남한테 말 못 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그게 ‘길티’하다고 느끼는 것 아니겠어요? 예전에 회식할 때 사람들이 당시 가장 야하다고 정평이 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세상에 저도 모르게 끼어들어서 얘기할 뻔 한 거 있죠?
사실 누군가 만나서 야한 영화 얘기가 나왔을 때 제가 모르는 건 거의 없어요. 영화 평가 어플에도 야한 영화뿐이에요. 야한 영화가 왜 좋으냐고요? 은밀한 멋이 있어요. 맞아요, 이것도 거짓말이에요. 왜 좋긴요,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죠. 그리고 익명을 빌려서 여기다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우리 회사 강대리! 그때 말했던 영화, 줄거리 말해줄 때 놀라는 척 하느라고 나도 힘들었어. 사실 나 그거 개봉날에 영화관에서 직접 봤어. 그것도 세 번.
거짓말
박재희 | 싱글대디
아이를 혼자 키우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요즘 손으로 뭘 만들고 그림 그리는 데 푹 빠진 우리 딸은 저를 위한 선물이라며 이것저것 만들어줘요. 고슴도치도 자식은 예뻐한다고 뭐든 예뻐 보이죠. 그런데 아직 아이가 어려 손을 잘 쓰지 못하다 보니까 꽃이라고 접어준 게 사실 꽃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가위로 뭘 오려서 과일이라고 주는데 말 안 해주면 도저히 알기 힘든 그런 것들…. 게다가 저는 청소 강박증이 조금 있어요. 딸이 만들어준 것들을 처음엔 간직하려고 노력했는데 쌓이고 쌓이니 종이 더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때부터 조금씩 거짓말을 했던 것 같아요.
“네가 준 종이꽃에 물을 줬더니 자라서 분갈이를 해줬어.” “어제 네가 그려준 하마의 엄마가 찾아와서 자기네 아들이라고 그림을 혹시 줄 수 있느냐고 해서 줬지 뭐야.” “색종이로 만들어준 과자집에 개미가 꼬이길래, 여왕개미한테 선물했어.”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점점 스토리텔링 실력이 늘어가는 게 너무 웃기더라고요. 나중에 우리 딸이 크면 저를 이해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요즘 걱정은 공룡 얘기를 해도 될까, 그건 믿어줄까 하는 거예요.
협박 편지 만들기
김아영 | 고등학교 2학년
대학 입학이 고등학교의 존재 목적인 것 같아요. 대학입시 제도에 따라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줏대 없어요(웃음). 고등학교는 그냥 그 자체여야지 참나. 반에서 반장도 하고, 체육부장도 하는데 성적은 별로 안 좋아요. 주변에서 정신 차리라고 무서운 말도 하고, 진지한 말도 하고요. 하지만 공부도 재능이잖아요. 엉덩이가 무거운 편이 아니어서 한군데에 오랫동안 집중하는 게 힘들어 죽겠어요. 그러다가 기분이 안 좋으면 저는 협박 편지를 만들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름 사랑과 정성과 애정이 깃든 거라고요.
책이나 신문이나 각종 지류를 모은 뒤 글자 하나하나를 잘라서 문장을 만드는 거예요.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협박 편지 많잖아요. 그런 거 따라 하고 싶었어요. 사실 이거 하면 눈알도 빠질 것 같고, 검지의 지문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한데 ‘재미’ 하나로 계속 하고 있어요. 세상에 내게 이런 집중력이 있나 싶더라니까요. 이런 일 하는 직업은 없겠죠? 진짜 떼돈 긁어모을 자신 있는데…. 이거 받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고요? 이제는 그냥 저인 거 알던데요. 그래도 해요. 제 별명이 김철판이거든요. 아니면 김뻔뻔.
에디터·포토그래퍼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