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고양이를 따라

아사오 하루밍의 《고양이 눈으로 산책》을 읽다가 내 안의 고양이를 그려봤다. 하루밍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고양이와 대화하며 산책길을 잇는 사람이다. 그의 고양이는 하루밍에게 묻고 답하며 종종 엉뚱한 생각으로 그를 이끌곤 한다. 그 엉뚱한 생각들은 어떤 길을 만들어 하루밍 씨의 몸과 마음을 안내한다. 어쩐지 여유로운 고양이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목도하고 싶던 세상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내 안의 고양이를 찾아 걷고 또 걸어본다.

지붕 위에서 바라본 길

“나는 잘 모르지만, 어떤 일이든 자기 생각대로 다 되진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란 걸 잘 안 해요. 따뜻한 밤에 지붕 위로 올라가고 싶을 뿐이에요. 하루밍 씨도 한번 올라와 볼래요?” / 이 못된 고양이 같으니라고. 그런데 지붕 위라니, 제법 상쾌할 것 같다. 마을 풍경이 어떻게 보일까?

하루밍 씨의 고양이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하다. 고민을 안고 있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듯 내뱉는 그 말들이 이름 없는 안심을 불러온다. 푸른 달빛을 등지고 지붕 위에 서 있는 고양이, 나무가 무성한 담벼락에 올라 해를 바라보는 고양이, 풀숲을 침대 삼아 포근히 잠을 자는 고양이. 길을 걷다 보면 꼭 신선처럼 영험한 고양이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그러곤 ‘부럽다….’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언제부터인가, 길가의 여유로운 고양이와 맞닥뜨리면 귀엽다는 생각보단 부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 신비로워 보이는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늠해 보지만 그 마음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부러웠던 걸까. 상상할 수 없는 고양이의 마음 사이로 ‘자유’가 묻어나 보였다. 

하루밍 씨의 말처럼, 어떤 일이든 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고양이는 알고 있는 걸까. 그래서 그 발걸음이 산뜻해 보이는 까닭일까. 한 드라마의 대사였던 ‘고양이의 신피질’에 관해 생각해 본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여 살아가는 것은 머릿속 ‘신피질’ 때문이라고 했다. 신피질이란 세포는 시간을 인지하게 해 감정을 만들고 쓸데없는 돈을 쓰게 해 인간을 조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안고 있는 ‘신피질의 재앙’이라고. 반면에 고양이는 신피질이 없어서 서른도 마흔도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가 없고 오롯이 현재만 있는 머릿속. 기억에서 해방된 그들이라 더욱 신선처럼 보였을까. 그런데 고양이에게 신피질이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드라마 대사일 뿐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신피질의 재앙에서 해방된 고양이 이야기는 어쩐지 잊히지가 않는다. 과거에서, 또 기억에서 해방된 존재가 내가 걷는 길을 함께 걷고 있다고, 그렇게 믿어버리고 싶다.

당신의 고양이 씨

“나는 물건을 쌓아 두고 사는 타입이다. 고양이가 되어도 그 버릇은 못 버릴 것 같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쓸데가 있을 거라며, 물건을 수레에 가득 싣고 다니는 길고양이. 나는 아무리 오래 쓴 물건이라도 잘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 몸이 홀가분해지면 감기 걸릴 것 같아 무서워서 그런다. 왠지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기분?”

하루밍 씨는 길고양이가 살기 좋은 마을에서 자신의 고양이에게 물었다. 고양이에게 제법 괜찮은, 친절한 이 마을에서 살아보지 않겠느냐고. 그의 답은 의외였다. “모르게쨔옹.” 그러곤 되물었다. “그럼 하루밍 씨는 어쩔 건데?” 내가, 당신이 길고양이라면 우리는 길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사실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좋은 걸 왜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고양이가 될까. 온종일 거리를 쏘다니며 친구가 되어줄 고양이를 찾아 헤매이며 외로이 살아갈까. 아니면 이미 친구 고양이가 너무도 많아서 패거리를 이루고 먹이를 찾아 열심히 사냥을 하러 다닐까. 왠지 현실은 전자일 것만 같아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함께 산책을 하던 동료 H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길고양이가 될 것 같냐고. 그는 두 고양이의 미래를 상상했다. 첫째는 저 먼 나라의 광활한 자연 속, 윤기가 흐르는 삼색 털을 가지고 자유로이 영위하는 고양이, 둘째는 서울 변두리의 작은 자연 속에서 힘이 센 다른 고양이들을 피해 홀로 살아가는 고양이였다. 덧붙여 이 고양이는 어두운 색의 털을 가졌다고 한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삼색 고양이의 삶에 비해, 다른 고양이의 하루는 조금 슬프고 먹먹했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되고 싶은 고양이의 삶’과 ‘될 것 같은 고양이의 삶’을 번갈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이 대화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린 될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되고 싶은 상상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 테니까. 그런데 가만히 걷고 있던 H가 말했다. “사실 어두운 색의 털을 가진 고양이가 더 용감하대요. 보호색을 가져서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고양이래요.”

당신의 고양이 씨

“우리는 찜찜한 것에 모래를 뿌려요. 똥을 눈 다음이나 다 못 먹고 남긴 밥을 감추고 싶을 때 말이죠. 이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찜찜한 것뿐만 아니라 소중한 것에도 우리는 모래를 끼얹어요. 그러니까 찜찜한 것과 소중한 것은 친척 관계예요. 이 방에 우리보다 먼저 다른 고양이가 들어와서 모래를 뿌려놓았는지도 몰라요.”라고 내 안의 고양이가 추측했다. / 나는 고양이의 그 행위를 ‘사라져버려라’라는 의미로 생각했다.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던가?”

하루밍 씨는 자신의 고양이와 낡고 고풍스러운 산부인과 병원 건물을 산책했다. 그 병원의 주인인 ‘쵸키 선생’이 돌아가신 후 남긴 먼지 쌓인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본다. 거기엔 오래되어 까맣게 변한 매실주와 누군가 비밀스레 숨겨놓은 포르노 사진들이 있었다. 하루밍 씨는 고양이와 함께 그가 남긴 흔적들을 바라보며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누군가의 삶을 상상했다. 몇 년 전, 도시 한가운데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에 사는 고양이들을 본 적이 있다. 건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밧줄로 막혀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고양이를 따라 밧줄을 넘어 들어가 버렸다. 거긴 마치 고양이들의 집과 같았다. 그들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자기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 눕듯 아파트 계단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녹슨 놀이터의 풍경, 아직 잘 자라고 있는 커다란 나무, 우편함에 쌓인 고지서들. 사람만 없고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한 아파트는 천천히 늙어가고 있었다. 그때 오래된 아파트의 곳곳을 산책하는 고양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고양이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지키는 존재와 같다고. 아파트의 모든 것들은 먼지 가득 낡고 어둡고 축축해, 찜찜하고 쓸모없는 것들이었지만 그 풍경 너머엔 한 사람의 기억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반드시 소중했을 것이다. 고양이는 그 한가운데 남아 아파트의 마지막을 함께 추억하는 듯했다. 과한 망상일지 몰라도 고양이에겐 그런 힘이 있다. 귀엽고 영험한 몸짓 뒤에 늘 어떤 이야기를 남긴다. 

저벅저벅 곧 사라져버릴 발자국처럼 곧 증발할 이야기들, 그래서 살아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이야기들. 고양이의 눈으로 걸어보자.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게 찜찜한 것이든 소중한 것이든 우리의 주변이고 오늘일 것이다.

Book — 《고양이 눈으로 산책》 아사오 하루밍 | 북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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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지수

자료 제공 북노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