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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엔 가벼운 대화에서 답을 구하기도 한다. 문제인 줄도 몰랐던 것에 불현듯 답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그런 순간을 좋아한다. ‘말 시리즈’를 읽으면 내 안의 문을 하나씩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의 말을 통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덕분일 테다. 책 일부를 떼어 보여주는 것이 실례일 만큼 모든 말이 연결되어 커다란 흐름을 만드는 시리즈다. 부분을 발췌하며 훼손된 분위기가 있음을 미리 밝힌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말과 말 사이를 유람해 주면 좋겠다. 이 지면이 끝나면, 꼭 책을 펼쳐 한 자 한 자 정성껏 읽어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의 면면을, 그 표정의 파편을 여기 담는다.
소박한 개인주의자의 인터뷰
대화 속에서 문득, 박완서를 만날 때가 있다. 내가 호명한 적도, 누군가 소환한 적도 있다. 곰곰 되짚어 보면 모두의 이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엄마, 친구, 동료, 인터뷰이…. 박완서를 읽고, 박완서를 배웠으며, 대체로 박완서의 세계를 살아본 자들은 한 번쯤은 이 소중한 이름을 발음해 봤을 테다. 문득 어느 날 인터뷰에서 이슬아 작가가 ʻ나만의 작가’로 박완서를 꼽던 날이, 촉촉한 목소리로 읊던 문장들이 선연히 떠오른다. “박완서 선생님 인터뷰집 읽어보셨어요? 작품 바깥의 선생님은 우아하고 친절한 말하기를 구사하는 사람이에요. 박완서 소설은 서슬이 퍼럴 때도 있고 능구렁이를 품지 않고는 쓸 수 없을 대사가 나올 때도 있잖아요. 그런 작품을 쓴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설 바깥에서는 유순한 얼굴을 하고 계세요. (중략) 선생님이 일궈놓으신 곳에 제가 서 있다고 느낄 때마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샘솟아요.” 수많은 작가의, 수많은 여성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인 사람. 박완서는 “선생님의 문학세계는 어떤 것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내가 잘 아는 세계지요.”라고. 나는 그 문장에 몇 번이나 밑줄을 그었나. 지독히 인간적인 작가라 생각했음에도 나는 《박완서의 말》을 읽으며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일상적인 사람이라고는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한 까닭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하며 마음 한구석이 잔잔히 일렁인다.
피천득의 글을 읽다 전화를 걸어 마음에 드는 부분을 낭독하는 박완서를 상상한다. 둥글게 웃는 표정이나 나긋나긋한 말씨 같은 것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한 사람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너그러워질 수 있다니. 피천득이 “박 선생님 글이 참 좋아요.” 하고 운을 떼면, 박완서는 “그렇지 않아요.” 하고 대꾸하는 사람이다. 칭찬 앞에서 살며시 고개를 떨구고 좋아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선생을 상상하며 왜 나는 자꾸 종이에 곡선을 그렸을까. 책장이 온통 곡선으로 구불구불해진 것을 보면서 좋아하는 마음이란 그런 것일까 곰곰 생각했다.
박완서는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고 몇 번이나 받아 적으며 머릿속에 기록했을까. 선생은 알까, 수많은 사람이 박완서의 책을 가지고 있다는 걸, 또 누군가는 선생의 문장을 공책에 또박또박 옮겨 적어 놓았다는 걸, 앞으로도 그런 사람은 계속 생겨날 거라는 걸.
당연히 돈보다 중요한 건 많다. 돈만큼 중요한 것도 많다. 그렇다면 박완서가 말한 ʻ인생에 귀하고 좋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문학이었을 수도 있겠고 책이었을 수도 있겠고, 책 바깥의 무엇일 수도 있을 테다. 선생이 모아둔, 마구 뜯어버린 편지봉투(“편지봉투를 뜯을 때나 신문이나 잡지에서 갈무리해둘 것을 스크랩할 때 곱게 자르지 않고 마구 뜯어버리십니다.”)도 ʻ귀하고 좋은 것’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귀함 안에 가족이라는 조각이 있었음을, 《박완서의 글》을 읽으며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손자 이야기를 하면서 ʻ하하하’ 하고 웃는 박완서의 모습을 그려 본다. 소박한 차림으로 방 한구석에 앉아 둥글게 웃고 있는 선생의 모습을. 이 대화는 1996년 《참여사회》에 수록된 인터뷰로, 인터뷰어는 오숙희 여성학자였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서 “요즘은 무슨 생각 하시느냐”는 마무리 질문을 건넸고 이에 박완서 선생님은 손자 이야기로 ʻ하하하’ 웃으며 대화를 맺는다. 문학계 안에서, 작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박완서를 넘어 할머니라는 역할의 박완서, 누군가의 엄마이자 어른으로서의 선생님을 만나 기뻤다. 문학이라는 옷을 잠시 곁에 두고 날것 그대로 웃고 있는 무구한 모습. 나는 책 속에 담긴 그런 표정과 말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70년 마흔이 되는 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장편소설로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세 가지 소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세상에 예쁜 것》,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 노릇 사람 노릇》,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1월 22일 여든 살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글쓰기의 경이
이 책의 서문은 인터뷰어 황인찬 시인의 글로 시작된다. “현존하는 시인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김혜순 시인의 이름을 말할 것이며, 그러한 선택을 할 이가 결코 나뿐만은 아니리라는 것 또한 확신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인터뷰어가 어떤 마음으로 대화를 임했을지 감히,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았다. 대화는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흐름과 분위기가 좌우된다고 믿는다. 어느 한쪽의 마음이 닫혀 있거나 다른 곳을 향해 있다면 대화는 매끄럽게 흘러갈 수도, 길게 이어질 수도 없을 터. 두 사람의 대화가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는 동안 그 사이를 좋을 대로 마음껏 부유하며 같은 곳을 향해 흘러가는 독자가 되었음이 못내 기뻤다.
가끔 궁금하다. 좋아하는 예술가의 생활은 어떠한지. 알게 되어 실망할 수도, 몰라서 좋을 때도 있겠지만 생활과 삶을 문득문득 상상하게 된다. 황인찬 시인은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어떤 딸이었다고 생각하고 계신지” 묻는다. 시인으로서의 김혜순이 아니라, 딸로서의 김혜순을 들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후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이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나는 오늘도 엄마한테 무심결에 내뱉은 작은 말씨를 떠올리며 후회한다. 조금만 더 둥글게 말할걸, 조금만 덜 날카롭게 말할걸. 엄마니까 괜찮을 거란 생각을 엄마여서 더 세심해야 한다고 바꿔 생각할걸.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딸 김혜순인데도 보고 싶고 그립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며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여느 자식이나 비슷하겠구나, 하고 다소 납작하고 편평하게 생각해 보기도 한다. ʻ그러니까 잘해야지.’라는 마음을 새기지만 언제나 마음이 이 자리에 있지만은 않을 것임을 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남은 것들에 대해 감각하고, 그 죽음을 다시 경험하는 시”(<빈집의 아보카도>)를 쓴다는 건 얼마나 아프고도 강한 일인가.
언젠가 가족의 죽음을 상상한 적이 있다. 형제가 없는 내가 훗날 진정한 고아로 지구에 혼자 남게 되면 마음이 어떨까 곱씹다가 정말로 ʻ가슴이 아파서’ 침대에서 한참 가슴 어딘가를 부여잡고 주먹으로 두드린 기억이 난다. <빈집의 아보카도>를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너에게 어디 가? 하고 묻던 모서리. 너는 이제 네 집의 쉰여섯 개의 모서리를 눈 감고 다 짚어야 잠을 잘 수 있다.”라는 대목이 왜 이토록 마음을 건드리는지. 지금은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차마 다 상상하지 못한 슬픔이, 고통이 여기에 있다. 나는 딸 김혜순의 문장에서 먼 미래와 엄마가 겪었을 어떤 과거를 본다.
어떻게 엄마 잃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나. 시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김혜순 시인이 “죽음의 존재는 몇 인칭일까요?” 하고 물었음을 기억한다. 언제나 생각하기를 미루는 일, ʻ죽음’이라는 것에 관해 처음으로 제대로 생각해 보았다. 마주해 보려 한 적도 없고, 마주하게 되면 먼저 피해버리던 존재를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는 일. 《김혜순의 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김혜순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입선했고, 1979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되어 2021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산문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삼성호암상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명예교수다.
마음을 주고받은 명배우와 명감독의 인터뷰
<걸어도 걸어도>(2008)
이 대목을 읽으며 왜 그렇게나 울었을까. 책장이 다 젖을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세심하게 연기하는 키린의 모습을 내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고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것은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고, 멈춰 있지 않다는 것”을 살아 있는 키린의 입으로 들었던 것이니까,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으니까. 키린의 대화를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삶이라는 경이를, 일상이라는 소소함을,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을. 너무 당연해서 지면을 할애해 적어 내기도 아쉬운 시간의 소중함을. 어쩌면 이런 당연한 것을 몸소 깨달을 때 사람은 어딘가 자라나게 되는 게 아닐까.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 관해 대화 나누는 대목에서 키린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 가치관 가운데 ʻ좋고 나쁨과는 별개로 사실을 하나씩 확인해 나가는 게 사람 아닐까’라는 게 있어서.” 나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믿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성선설을 믿었다. 태어나 터뜨리는 첫울음은 항상 선하고 착한 소리일 거라고 여겼다. 세상을 너무 순수하게(적확히는 ʻ나이브하게’) 보는 거 아니냐는 지적을 들어도 그렇게 믿어야 옅어지는 믿음을 꽉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조차도 본래 선한 사람은 아닐 수 있겠다는 의심을 어떻게든 지우고 싶었다. 성선설을 향한 믿음이 자꾸 깨지는 바람에 어느새 집착 비슷한 걸 하게 되어버린 나에게 키린이 해답을 주는 듯하다. 좋고, 나쁨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어떤 좋음에도 어떤 나쁨에도 분명히 이유와 배경이 있다고.
이어지는 답변 중 한 대목에서 키키 키린은 말한다. “나 자신을 물처럼 만들어서 세모난 그릇이라면 세모, 네모난 그릇이라면 네모, 동그란 그릇이라면 동그라미가 되어 꾸밈없이 거기에 들어가 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요.” 연예계라 함은 꾸미는 것을 잘해야 한다고, 짐짓 그런 체하거나 그렇지 않은 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의 세계가 어딘가가 모양을 달리했다. 그것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체 같은 사람이 또 다른 고체인 척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액체가 되기를 자처하는 일. 나는 무언가를 지독하게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방송 하는 사람들은 꾸며놓은 자아 안에서 살아간다고 여긴 안일한 생각이 ʻ기꺼이 꾸며질 각오를 한다.’는 용기로 모습을 달리한다.
<어느 가족>(2018)
어느 날엔가 키린이 나오는 영화를 연달아 본 적이 있다. 어느 영화에서 그는 철저한 엄마였고, 또 어디에서는 할머니였고, 그냥 여자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빵을 만들었고, 어떨 땐 밥을 지었다. 차를 우리거나 다과를 만질 때도 있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를 거닐 때도 있었고, 매서운 폭풍우 치는 곳에 서 있거나 캄캄한 부엌에서 뒷모습을 보여주기만 할 때도 있었다. 무서운 얼굴도, 온기 어린 얼굴도 모두 키린의 것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이 다채로운 표정은 그간 만들어진 너무 많은 그릇에 담겼던 액체가 된 키린이었음을. 그리고 문득 말해보고 싶어졌다. “언니, 자세히 보니까 예쁘네.” 키린의 세계를 연달아 경험하고 나니 감히 그런 말을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책 첫 장에 적혀 있는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키키 키린은 재밌다. 훌륭한 것도 즐거운 것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재밌다.”
키키 키린
배우. 1943년 도쿄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우치다 게이코다. 1961년 극단 분가쿠자의 연극연구소 1기에 합격, 유키 지호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 1977년 키키 키린으로 예명을 바꾼다. 1964년 TV 드라마 <일곱 명의 손주>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인기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한다. 2007년 영화 <도쿄 타워>(2007)의 주인공 어머니를 시작으로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 <일일시호일>(2019) 등 다수의 영화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았다.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비롯 일본 국내외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2008년 <걸어도 걸어도>(2008)를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 처음 출연한 후, 2018년 <어느 가족>(2018)까지 총 여섯 편의 작품에 함께했다. 2013년 전신으로 암이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뒤에도 꾸준히 연기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한 2018년 9월 15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삶이 작품이 된 예술가, 집요한 낙관주의자의 인터뷰
<행복Le Bonheur>(1964)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그러니까 1960년대에 행복의 색조를 띤 이 영화를 보고 행복해하는 이들보다는 불쾌해하는 이들이 많았다는데, 단지 시대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가치 판단이라는 건 공적인 듯하면서도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나는 그런 논의는 마음 저편에 두고 아녜스 바르다의 말을 좀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끝없이 물음표로 이어지는 바르다의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어보지만 답을 내릴 수 없다. 애초에 행복이란 너무도 쉽게 형태를 바꾸는 것이어서 순수한 모습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쾌락이나 욕망의 형태를 취할 때도 있지 않은가. 목적과 의도가 있는 행복을 행복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 내가 누린 몇 개의 행복을 떠올려 본다. 별로 좋은 날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피로해질 대로 피로해진 상태였고 여유를 누릴 만한 상태도 아니었다. 혈관에 카페인을 욱여넣고 ʻ이래도 되나.’ 생각하던 날이었음에도 나는 행복을 감지했다. 사람이란 아무리 캄캄한 동굴에 있어도 작은 기쁨을 오감으로 발견해 내려는 동물이니까, 그렇다고 믿으니까. 차디찬 커피를 손에 쥐고 무심코 창문을 열었다. 한여름답게 눈부신 햇살이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활기찬 사람들이 거니는 공원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다양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커다란 물총을 들고 물줄기를 발사하는 여자아이의 싱그러움, 본격적으로 공원을 빠르게 걷는 듬직한 청년의 모습, 가벼운 차림으로 산책하는 강아지와 아주머니의 다감한 걸음, 운동기구를 느리게 움직이는 노인의 친숙한 발짓. 그런 장면과 함께 훅 끼쳐온, 내 주변을 감도는 여름 냄새. 시간을 쪼개서라도 여름이 건네는 행복을 힘껏 감각하고자 집 밖으로 나섰을 때, 누군가 나를 불러 세운다. “학생….” 학생이 아닌지라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내게 건넨 건 구깃해진 종이 쪽지와 옆 동네 주소. 땀을 흘리며 웃을 기력도 없어 보이는 노인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가 한껏 느낀 여름날의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안전보단 고통에 가까울 수 있겠구나. 목적지까지 바래다 드리면서도 여름의 행복, 혹은 고통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순진한 행복이 오만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그 모든 감정을 두고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바르다가 말한 대로 행복이란 어떤 모습이든 ʻ사람들이 쫓아가서 잡을 수 없’는 것이며 ʻ무슨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창문을 열지 않았다면 나는 작은 행복감을 만나지 못했을 테고, 의도나 목적 없이 창문을 열었기에 행복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다만, 그렇지 못한 장면들에 마음이 작아지는 순간까지 온전한 행복이라 이야기할 수 있나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7)
고백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녜스 바르다의 말》을 읽으며 보지 않은 영화의 서사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ʻ여성들 간의 우정’이라는 것에 관하여.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몇 가지 감정과 이야기와 친구들 얼굴을 떠올린다. 불과 오늘만 해도 작은 신경전을 겪고 ʻ역시 사람은 힘들어.’ 하고 고개 젓고는 몇 시간 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친구가 먹고 싶어 하던 아이스크림을 발견하곤 금세 기뻐지지 않았나. 기분의 생채기 같은 건 금세 하찮아지게 하는 어떤 감정들이 있다. 그것은 우정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바르다가 말했듯 “서로를 만지고 싶은 욕망”과는 거리가 멀지만 분명히 강력한 무엇. 함께한다는 즐거움, 같이 있지 않아도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기쁨. 그런 것이 분명히 친구와 나 사이에 있음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무심코 흘려보냈을 우정이라는 단어를 《아녜스 바르다의 말》을 읽으며 낯 간지럽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책과 말이 주는 힘이라 믿는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바르다는 말한다. “1980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프랑스 영화를 주제로 두 차례에 걸쳐 특별호를 발행했는데, 저는 지나가면서도 언급이 안 됐죠. 제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요. 세상에!” 나는 바르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들을 돕기도 하고 함께 신뢰하면서 일을 해나갔다.”는 말에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건가요?” 하고 묻는 인터뷰어에게 이렇게 말하는 면모를. “용기 같은 건 없었어요. 제겐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오빠나 남동생이 저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죠. 그들도 나쁘진 않았지만, 제가 그들보다 못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아녜스 바르다의 말》에서 그를 ʻ집요한 낙관주의자’라고 했던가. 이에 보태어 나는 무구한 얼굴을 본다. <쉘부르의 우산>(1964)을 “참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ʻ누벨바그의 대모’라는 말을 온전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저는 개척자였고, 개척자는 언제나 모험을 추구하죠.”라고 말하는 당당한 모습에서.
아녜스 바르다
전방위 예술가. 사진가, 영화감독, 미술작가를 넘나들며 특유의 작품 세계를 펼쳐 보였다. 누벨바그의 유일한 여성 감독으로 주체적 여성으로서 자각과 삶에서 발견하는 모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했다. 1962년, 죽음을 앞두고 자신과 세상을 재인식하는 한 여성을 다룬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로 대중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영상미의 <행복>(1964)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다큐멘터리의 예술적 걸작이라 불리는 <방랑자>(1985)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다. 말년까지 왕성한 창작욕을 보이며 젊은 예술가 JR과 협업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로 칸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에 수여하는 골든아이상을 받는다. 2019년에는 베를린영화제에서 60여 년에 이르는 영화 창작 인생을 회고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2019)를 발표해 영화 팬들을 기쁘게 한 바르다는 그해 3월, 파리 자택에서 암 합병증으로 90세에 생을 마감한다.
글·사진 이주연
자료 제공 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