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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다섯 장면
내가 있는 풍경
취향의 다섯 장면
《어라운드》 에디터들은 매달 한 권의 잡지를 만들면서 그 사이사이 이런 걸 감상하고 바라보고 먹고 생각하며 기꺼이 시간을 보낸다.
거리에서, 김혜원
01 걷고 달리고 매일 걷지만, 특별히 어떤 생각을 하고 싶거나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걷는다. 달리기도 한다. 걷고 달리는 그 길이 밤섬과 한강과 국회의사당이 내려다보이는 서강대교 위일 때 가장 행복하다.
02 영화 〈이터널 선샤인〉 어떤 장면은 계절로 기억된다. 요즘처럼 코끝이 시린 아침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생각한다. 출근 버스를 기다리다 조엘처럼 경로를 이탈하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 나를 잊은 누군가, 혹은 내가 잊은 누군가를 더하면 지루한 아침이 덜 지루한 것도 같다.
03 이적의 가사 내 낡은 서랍 속에는 이적의 가사들이 있다. 비가 오는 날이나(‘Rain’) 늦은 밤 퇴근길(‘누가 있나요’)에 꺼내 보게 되는 그런 것들이다.
04 시그리드 올여름에는 시그리드를 많이 들었다. 말간 얼굴로 리듬을 타며 “내 기분을 망치지 마Don’t kill my vibe.”라고 노래하는 그녀가 좋다.
05 이보 반 호프의 무대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나 〈파운틴헤드〉 같은 이보 반 호프가 연출한 연극을 볼 때, 나는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지켜보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는 결국 풍선을 터트리고야 마는 사람이라 매번 나를 (기쁘게) 놀래킨다.
06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네 인생의 이야기〉 SF소설 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직관적이고 이성적인 것, 금속성의 어떤 것, 파괴적이거나 폭력적인 것. 〈네 인생의 이야기〉는 내 착각의 증거이자 우주와 언어, 그리고 사랑에 관한 ‘고도로’ 근사하고 아름다운 SF소설이다.
07 엄유정이 그린 하얀 산 2014년 8월 문래동에서 그녀가 그린 아이슬란드의 눈 덮인 산을 처음 봤다. 계절과 공간, 어느 하나 자연스럽지 않았으나 그대로 좋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좋다.
08 르 코르뷔지에의 시선 결코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집에서 살 수 없는 나는, 한가람미술관의 전시장을 나오며 르 코르뷔지에의 얼굴이 커다랗게 인쇄된 포스터 한 장을 샀다.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나에게 ‘카프카의 도끼’와도 같다.
여름 안에서, 이현아
01 시력이 나빠지기 전 모네가 그린 아내의 정원 자주, 살고 싶은 집에 관한 상상을 한다. 그 모습과 가장 닮은 그림과 글이다.
“추운 날씨에 몸을 움츠렸는데 넓은 갈대 들판 위로 낮게 솟은 집이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잘 깎아놓은 돌로 조적한 내부에, 벽에 맞대어 놓인 나무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댔는데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름다운 형태로 잘린 햇빛은 벽에 투영되고 따스함은 다시 내 속으로 들어왔다. 무성한 여름 수풀의 깊은 내음도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벽을 긁으면서 내는 소리는 고양이가 제 볼을 내 손에 비비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추위가 가시었다. 그것은 추운 날에 받은 여름 상자였다. 고양이와 여름 수풀과 따뜻한 햇볕이 담긴.”
02 제임스 설터의 예리함 설터의 예리한 문장에 나는 종종 베인다. 불편하지만 덜 아문 채로 두고 싶은, 그렇게 머리가 아닌 몸에 새기고 싶은 글. 요즘 되뇌는 그의 문장은 이런 것이다. “행복에 관한 고대의 꿈. 야자나무가 열매와 그늘을 선사한다. 단순한 삶이다.”
03 던컨 한나의 여자들 던컨 한나의 여자들은 멈춘 채, 액자 속에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고 그 액자를 부수고 나올 수 있다. 나는 그 여자들을 보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04 보거나 보지 않은 영화들의 OST 내레이션 트랙이 있는 영화 OST를 틀어놓으면 영화를 보지 않고 들을 수 있다. “오늘 아침에 지도를 봤어요. 당신이 가려고 하는 그곳이 어딘지를 찾았어요. 넓은 곳이라던데 지도에서는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당신을 본 적은 없지만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 것 같았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고 그냥 가는군요….”(영화 〈접속〉 OST, ‘수현의 전화’에서)
05 깨져도 별수 없는 도자기 자신만의 진리나 법칙이 깨져버리는 경험을 즐긴다. 그것들은 보통 배우는 일에서 온다. 손재주가 전혀 없다고 믿던 내가 도자기를 배우는 것도 그런 일이다.
06 수토메 아포테케리의 향기 관능적인 기운을 주는 ‘JASMINE’, 여름의 눅진한 잔향 같은 ‘LOVE’, 자기 전 침구에 뿌리는 ‘POET’. 일상에 완전함을 더해주는 것들.
07 달고 독한 포트와인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가끔, 달고 독한 술이 필요하다.
08 장 자크 상뻬의 투박한 다정 여러 감정 중에서 나는 다정함을 가장 경계하고 조심하며 어려워한다. 그래도 상뻬의 다정함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나에게서, 정혜미
01 커피와 앤트러사이트 매일 커피를 마신다. 두 잔은 기본인데, 아침의 커피는 거의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과도 같다. 당연히 즐겨 찾는 카페가 생겼는데, 앤트러사이트는 한낮에 가는 걸 좋아한다. 창고를 개조한 인테리어는 처음부터 좋았고 여전히 좋다. 요즘같이 선선한 날에는 옥상 테이블을 사수해야 한다.
02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여섯 살이었나. 큰이모네 놀러 가서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옆에서 엄마가 밥 먹으란 소리를 여러 번 했다는데, 전혀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통틀어 스무 번은 넘게 본 것 같다. 마리아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꿈만 다섯 번 꿨다.
03 숲 향, 이솝 마라케시와 딥디크 오 듀엘르 다른 건 몰라도 향의 취향은 확실하다. 조금은 중성적이면서 나무와 숲 향이 달달하게 어우러지는 향. 몇 년에 걸쳐 딱 마음에 드는 향수를 찾았다.
04 폴라로이드 사진 스무 살 초중반 때는 즉석 사진기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사하면서 수백 장의 폴라로이드 중 상당량을 버리고 감정이 선명한 사진들만 남겼다.
05 옛 다이어리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예전엔 다이어리를 열심히 썼다. 형식이 정해져 있진 않고 무지 노트에 사진을 붙이고 계획을 적거나 일기를 쓰기도 했다. 지금 보면 그때의 열정이나 순수한 마음이 보여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청춘이었던 나를 잊지 않게 해준다.
06 만화책 《파라다이스 키스》 이 책은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옷과 작은 지하 아틀리에, 만화 속 작은 소품까지 놓친 것이 없을 정도로 몇 번이고 읽었다. 야자와 아이 작가의 《파라다이스 키스》부터 《천사가 아니야》, 《내 남자친구 이야기》 등은 아직도 만화책 대여 1순위다.
07 내 이름으로 된 와인 와인 중에서 달콤한 화이트 와인을 좋아한다. 알자스 지역으로 와이너리 출장을 갔을 때 내 이름으로 라벨을 새긴 와인을 선물 받았다.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 와인인데, 마시기 너무 아까워 숙성을 핑계로 따지 않고 있다. 상하지는 않았겠지.
08 피크닉 가방 언제부터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때 귀걸이 같은 걸 넣어두는 용도로 썼던 것 같다. 한참 방치하고 있다가 최근 짐 정리할 때 다시 찾았는데, 이번 여름 마침 라탄 가방이 유행이라 종종 들고 다녔다.
과거에서, 김건태
01 유진식당 5년 전, 《서울신문》에 마지막으로 신춘문예 투고하던 날, 소설 쓰던 조우정을 만났다. 우리는 4천 원짜리 설렁탕 파는 곳에서 대화도 없이 소주를 마셨다. 가끔 그날의 먹먹함이 그리울 때마다 이곳에 들른다. 그러고는 식당의 거의 모든 메뉴를 시켜서 허겁지겁 먹는다.
02 에곤 실레의 녹색 얼굴 우울과 몽상과 연민과 환희, 그리고 무력감. 에곤 실레의 녹색 얼굴을 사랑한다. 그의 초점 잃은 눈을 동경한다.
03 영화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술, 마약, 거짓말, 도박, 청춘, 촌스럽고 드센 영국식 억양, 달리기, 방화, 갱스터, 골동품, 흑인과 백인, 내가 좋아하는 영국 영화의 모든 것.
04 ‘NEW YORK’이 새겨진 저지 동대문 프레야타운 수입 매장에서 구입한 저지. ‘뉴욕’이 새겨져 있지만 사실은 일본 브랜드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교복 대신 저지를 입었다. 10년도 훨씬 지났는데, 이 옷을 입을 몸도 마음도 그대로라는 게 신기하다. 10년 후에도 여전한 마음이었으면.
05 연두색 색연필 나는 밑줄 긋는 사람이어서, 연두색 색연필이 없으면 책을 읽지 않는다.
06 우주 ‘아주 많은(‘많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검은색 타원이 중첩되며 만든 얼룩 같은(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겨우 유리잔에 구슬 몇 개를 넣는 것으로만 우주를 보여줄 뿐이다.
07 유디트 헤르만 내 친구 전진우에게는 도벽이 있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를 티셔츠 속에 숨겨서 도망갔다. 이빨 빠진 건반처럼 책장 속 《알리스》의 구멍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08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 속 “킥킥”이라는 두 글자 술을 마시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허수경의 시를 읽어주곤 했다. 가만히 그녀의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킥킥대며 운다.
하늘 가까이에서, 이자연
01 옥상 옥상으로 얼굴을 삐죽이 내밀면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다. 바람도 소리도 하늘의 변화도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한국식 옥상 특유의 초록색 페인트칠도 촌스러워서 마음에 든다.
02 영화 〈아가씨〉 이 영화를 처음 본 날, 나는 연이어 세 번을 더 보았다. 숙희와 히데코는 사랑을 찾아 떠나버렸는데, 나는 이 현실에 그대로인 것만 같아서 퍽 쓸쓸했다. 사랑으로 구원받는 이야기는 언제나 황홀해.
03 배우 에디 레드메인 그의 연약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좋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진한 눈빛은 또 어떻고? 그는 다정하고 묵직하고 소란스럽고 영웅적이고 소담한 듯하다가도 귀엽고 간지러우면서 강렬하다. 무슨 말이냐면, 그라면 모든 것을 다 소화해낼 수 있다는 말이지!
04 해리포터 내 10대의 모든 것.
05 랑방 잔느 쿠튀르 우먼 오드퍼퓸 달큼하고 가벼운 자두 향이 난다. 나는 이런 향을 종종 ‘예쁜 냄새’라고 표현하는데, 말 그대로 향을 맡으면 모든 것이 예뻐지는 느낌이 든다. 아냐, 실제로 예뻐진 건지도 몰라.
06 차 차를 마시면 속이 뜨습게 데워진다. 장 안으로 따뜻한 찻물이 꿀렁꿀렁거리는 기분이 퍽 좋다. ‘차’라는 이름 안으로 느긋함이나 미적거림이 배어있는 것도 근사하다. ‘차 한잔 하자’는 말이, 왠지 모르게 멋져 보이는 이유일까.
07 드라마 〈청춘시대〉 중학생 때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아빠한테 말했다. “시골 마을 사람들이 다툰 뒤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해.” 그랬더니 “너도 언니랑 싸우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풀잖아.” 했다. 나는 “그건 가족이잖아.” 하고 반문했다. 아빠는 “그 사람들도 가족처럼 부대끼고 산 거지.” 했다. 다섯 명의 하우스메이트 이야기인데, 나는 왠지 이 대화가 떠올랐다. 복닥복닥, 이들도 가족인 거지.
08 수채화 그리기 나만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잘해도 1인칭짜리 기쁨이 되고, 잘 못해도 딱히 괴롭지 않은 그 중간 지점의 애매한 일들. 그러니까 좋은 말로는 취미고, 또 다른 말로는 ‘뻘짓’인 일들. 그리고 나는 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에디터 김혜원
포토그래퍼 무궁화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