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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의 교토
시간이 생겼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고, 가끔 심야 라디오가 나오는 택시에 몸을 뉘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자주 잊는 시간. 계절을 불문하고 몸이 나른해지고, 해마저도 그림자를 길게 눕히는 시간. 오후 다섯 시, 나는 교토에 있다.
17:03
맥주를 마셔도 좋은
첫 번째 숙소에 도착했다. 식탁에는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갈 만한 장소와 정보를 꼼꼼히 적어놓은 앨범이 있다. 그가 내려가자마자 앨범을 집어 들고 식당을 골랐다. 못 먹는 음식을 제하고 나니 남은 건 함박 스테이크를 파는 가게. 숙소에서 딱 오 분,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서 가게를 해온 듯 손때 묻은 물건이 눈에 띈다. 오늘의 제대로 된 첫 끼. 맥주도 시키고 천천히 밥을 먹는다. 시계를 본다. 아직 다섯 시를 조금 지난 시간이다.
17:12
한 량짜리 열차
쿠라마Kurama는 교토 외곽의 마을로 운이 좋으면 한 량이 전부인 귀여운 열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이킹을 할 수 있는 얕은 쿠라마 산, 쿠라마 신사, 온천이 한 데 모여있다는 것만으로도 갈 이유가 충분하지만, 사실 열차를 타고 오가는 것만으로도 좋다. 기관사가 직접 표를 검수하고 잔돈을 거슬러 주는 수고가 여행자에게는 즐겁다. 창밖으로 교토 외곽의 작은 마을과 숲을 지난다. 가라앉는 해의 잔상이 키 큰 나무 사이로 언뜻 비친다.
17:25
식물의 시간을 지켜보는 일
기타야마 역 근처에 있는 교토부립식물원은 교토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그림 그리는 할아버지, 글 쓰는 할머니, 옹기종기 모여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아주머니들, 넓은 식물원의 수많은 식물에 고루고루 물과 시선을 주는 원예사들. 식물원에서는 갑자기 단풍이 들거나,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시간을 천천히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이다.
17:33
두 번째 루미
루미는 작년에 묵었던 숙소의 호스트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기사로 썼고, 그 기사를 본 몇 사람이 그녀의 숙소를 찾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딱 일 년 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담이 낮은 그녀의 동네를 걷는다. 지도 없이 왔지만 찾을 수 있는 곳. 꼭 오래 살았던 동네를 찾아가는 기분이 든다. 멀리 가게 문을 닫는 그녀가 보인다. 우리는 이제 약속대로 동네 식당으로 가서 맥주를 마실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읽고 이곳에 온 사람들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17:42
생각 없는 오후
긴 여행이 이어지면 하루 이틀 즈음 모든 게 지루해지는 날이 온다. 그런 날엔 얼마나 여행을 원했는지는 까맣게 잊고 내 시간이 보장되는 안정된 일상이 긴 여행보다 낫다는 생각도 한다. 오후 일정을 포기하고 이치조지의 한 빵집에서 빵을 사서 숙소로 왔다. 다섯 시 사십이 분. 하루의 여행을 마무리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인가, 잠깐 고민하다 생각 없이 빵을 먹고 침대에서 잠들었다. 맞다, 언젠가 내게도 이런 생각 없는 오후가 있었다.
17:57
고양이에게 말 걸기
숙소에 묵을 때면 언제나 집주인들이 내려준 미션을 한두 개쯤 실행하게 된다. 이번에 묵는 숙소에서는 고마라는 열다섯 고양이 할머니와 지내야 한다. 제 좋을 때만 애교가 많은 고양이다운 고양이. 나의 임무는 제때 밥을 먹는지, 화장실에 가는지, 산책을 가는지 지켜보는 일. 집에는 고마만 오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는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대면 몇 초 후 문이 열린다. 고마는 딱 자기 몸집만 한 작은 문을 오가며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자기만의 오후를 보낸다. 볕이 좋은 오늘은 화단에서 낮잠을 잔다. “고마야, 이제 타에코가 올 시간이야.” 잠든 얼굴에 말해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교토의 장소
아오 오니기리 Ao Onigiri
A. 39-3 Shimo Minamidacho Jodoji, Sakyo-ku, Kyoto
H. aoonigiri.com
O. 11:00~재료 소진 시 마감
비 오던 날 보물처럼 찾은 오니기리 가게다. 가격은 130엔에서 220엔 사이로 저렴한 편이지만 미소시루와 함께면 든든한 한 끼로 충분하다. 가게 안에는 동네 아이들이 그려준 푸른색 도깨비 그림이 가득하다. 도깨비라는 뜻의 ‘오니’와 ‘오니기리’의 음이 같은 덕분이라고. 오가는 동네 손님들이 많으니 자리가 없을 땐 포장을 하는 것이 좋다. 은각사에서 철학의 길을 따라 걸어오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쿠라마 온천 Kurama Onsen Hot Spring
A. 520 Kuramahonmachi, Sakyo-ku, Kyoto, Kyoto Prefecture
H. kurama-onsen.co.jp
쿠라마 온천은 실내, 실외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숲에 둘러싸인 노천탕이 아름답다. 쿠라마 역에서 내리면 온천까지 무료로 갈 수 있는 셔틀버스가 있고, 걸어간다면 15분 정도다. 비가 그칠 무렵 가고 싶어서 오래 기다렸던 곳이다. 적당히 습기가 있는 날, 해가 질 무렵 가는 것을 추천한다. 노천탕만 이용한다면 1000엔이고 수건은 제공하지 않으니 미리 챙겨가거나 100엔의 이용료를 내야 한다.
미나 페르호넨 Mina Perhonen
A. 252 Ichinocho, Shimogyo Ward, Kyoto, Kyoto Prefecture
O. 12:00~20:00
‘나와 나비’라는 뜻을 가진 브랜드 미나 페르호넨은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가 전개하는 패브릭 브랜드다. 1층부터 4층까지 직접 디자인한 원단은 물론 옷, 인테리어 소품을 만날 수 있다. 실제로 소품을 제작하는 작업 공간 또한 엿볼 수 있으며 맨 위층에는 아동복을 판매하는 공간과 작은 동화책 서점이 함께 있다. 무엇보다 한 층씩 올라가며 오래된 건물 곳곳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코토하 Cotoha
A. 67-38 Nishinokyo Shokushicho, Nakagyo Ward,
Kyoto, Kyoto Prefecture
O. 11:00~18:00
니조성 근처의 코토하는 식물과 원예 관련 용품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이다. 2층으로 가면 공간을 식물이 채우고 있는데 정성 들여 놓은 작은 온실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코토하가 있는 공간은 화원인 블루미스트 붐Blowmist BOOM, 클램프 커피 사라사Clamp Coffee Sarasa, 고재를 활용한 가구공방 아트크루Artcrew와 함께 있어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천천히 둘러보기에 더없이 좋다.
에디터·포토그래퍼 이현아
숙소제공 에어비앤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