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잘 아는 것들

문규화 — 화가

벽을 가득 메운 거대한 화폭은 규화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문규화는 직접 보고 경험한 걸 그리고, 종종 지나온 뒤안길에서 건져 올리기도 한다. 한 장, 한 장, 종이에 그려보다가 비슷한 소재가 쌓이면 ‘다음에 그릴 소재는 이거구나.’ 자연스레 알게 된다. 한때는 대파였고, 한때는 산이었고, 한때는 잘려 나간 나무였다. 나는 규화의 시선과 곧잘 만난다. 그가 바라보고 남긴 것들, 그가 겪어내고 남긴 것들, 그 아름다운 것들 속에서.

“티셔츠를 사려고 하면 어딜 가든 티셔츠만 보이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나무를 그릴 땐 나무만 보이고, 대파를 그릴 땐 대파만 보여요.”

“청운동 작업실을 그릴 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같은 포맷에서 계속 다른 그림이 나왔어요.”

2023년이 밝았어요. 새해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운동하고, 그림 그리고, 평소와 똑같이 지내고 있어요.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면 건강관리를 잘해 보려고 해요. 올해는 제가 하려는 일을 좀더 잘 해내고 싶어서 체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무언가를 내 마음에 쏙 들게 완성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특히 창작은 더욱 그러한데요. 머리로는 모든 작품이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늘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서 작업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그것도 체력이 잘 받쳐줘야 할 수 있으니까 자꾸 건강을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안 그래도 SNS에서 운동하는 거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낯선 운동을 하고 있던데요. 

펑셔널 트레이닝이라고, 고강도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번갈아 하는 인터벌 트레이닝이에요. 매일 아침 5시 40분쯤 일어나서 운동을 가요. 운동은 작년 2월에 시작한 러닝이 처음이었는데요. 점점 적응해 나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좀 부족하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9월에 센터에 등록하게 됐어요. 늘 운동하던 점심시간대 프로그램이 없어서 처음엔 저녁 운동을 다녔죠. 근데 집 겸 작업실을 사용하다 보니 나갈 일이 잘 없어서, 저녁에 운동을 가니 해 볼 일이 전혀 없는 거예요.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한 건데 해를 못 보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룻밤을 꼬박 새워서 작년 11월부터는 아침반으로 지속하고 있는데 너무 좋아요. 아침엔 해를 잔뜩 보고, 저녁엔 눈 감으면 바로 잠들어요. 

 

아침 운동을 시작하면서 하루 패턴이 잡힌 거네요. 앞서 완벽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최근에 만족할 만한 일 있었어요? 

작업으로는 작년 10월에 을지로 그블루 갤러리에서 한 전시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작업실 안 밖>이라는 드로잉 전이었는데요. 전시는 보통 1년 전, 짧으면 몇 개월 전에 제안이 오곤 하는데, 이 전시는 오픈 딱 한 달 남겨두고 제안을 받았어요. 처음엔 좀 갑작스러웠지만 드로잉 전이라는 기획을 듣고 나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새로운 작업에 들어갈 필요 없이 제가 그린 것 중에서 고르면 되니까요. 설치 직후 기분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데, 보여 줄 일 없을 거라 생각한 드로잉을 한 공간에서 펼쳐 볼 수 있어 새롭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정말 한 달 만에 오픈했어요? 

네(웃음). 심지어 도록 제작 과정에 이슈가 있어 직접 만들어야 했는데 세 시간 만에 뚝딱 완성했어요. 그 전시를 준비하면서 시간이 제한되면 영혼을 갈아 넣는 성격이란 걸 새삼스레 알았어요. 원래 마감을 잘 지키는 성격이긴 한데, 마감이 없어도 뭐든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저는 뭐든 처음을 궁금해하는데, 혹시 처음 미술을 하게 된 순간 기억나요? 

질문지 받고 생각해 보다가 중학생 때 기억이 떠올랐어요. 중학생 때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수업 시간에도 몰래 그리고, 쉬는 시간엔 선생님 자녀들 그림 그려서 선물하고 그랬죠. 그런 저를 보고 친구가 미술학원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잠깐 받은 수업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말씀드렸지만, 집에서는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제가 그림 그린다는 걸 못 믿으시더라고요. 그림을 보여드려도 미술학원에서 그려준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회사로 저를 부르시더니 A4용지랑 4B연필을 하나 내밀면서 “내 눈앞에서 손 그려봐.”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래서요? 

아직도 엄마가 정해준 자세가 생각나요. 한쪽 손을 이렇게 (검지와 엄지를 펴고 나머지 손가락을 구부린다.) 하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렸어요. 제가 그림 그리는 걸 보시더니 엄마가 “이제 집에 가.” 그러시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학원에 등록해 주셨어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제가 미술 하는 것에 관해서는 한 번도 터치하신 적이 없어요. 

 

그때부터 계속 그림 그리는 걸 꿈꿨어요? 

중고등학생 때는 가구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가구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앞으로 쭉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대학생 때였어요. 과제 때문에 밤새워 작업한 적이 있는데, 눈이 새빨개지고 피곤해 죽겠는 상태에서도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때 ‘아, 나는 이거 계속 하겠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한 번도 다른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규화 씨 작품은 시즌별로 하나의 키워드가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시즌에는 산이었다가, 그다음 시즌에는 작업실이었다가, 그다음 시즌에는 빵이었다가…. 같은 소재를 조금씩 다르게, 풍성하게 표현해 내는 것 같아서요. 

제 그림들은 그동안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의 결과물이에요. 어느 한 시기에 보고 겪은 것들이 소재가 되거든요. ‘이걸 그려야지!’ 해서 본격적으로 돌입한다기보다는 그 시즌엔 정말로 그것만 보여요. 설명할 때 자주 쓰는 말인데, 티셔츠를 사려고 하면 어딜 가든 티셔츠만 보이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나무를 그릴 땐 나무만 보이고, 대파를 그릴 땐 대파만 보이죠. 

 

뭐가 안 보이는 시기도 있어요? 

항상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으니까… 없던 것 같아요(웃음). 오히려 지금 그리는 것 말고 다른 게 안 보여서 답답한 적은 있어요. ‘나 왜 이것만 그리지?’ 그런 기분이 때때로 찾아오거든요. 물론 이건 페인팅 작업 이야기고요, 저는 드로잉이 쌓이면 페인팅으로 넘어가요. 지금껏 드로잉한 것들은 다 여기 모아두고 있어요. (서랍장을 연다.) 한 장씩 보여드릴게요. 

와, 엄청 아름다워요. 재료가 뭐예요? 

지금 보고 계시는 건 먹이에요. 동양화를 전공해서 동양화 재료랑 가깝거든요. 물론 동양화를 전문적으로 하진 않아서 도구만 친숙해요(웃음). 저는 드로잉이 웬만큼 쌓이면 바닥이나 보드에 쫙 늘어놓고 한눈에 보려고 해요. 드로잉북에 그리고 한 장씩 넘기면서 보면 전체적인 게 잘 안 보이더라고요.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한눈에 보려고 전부 낱장으로 펼치는 거예요. 그래서 자석판도 벽에 설치해 두었어요. 아무리 찾아도 제가 원하는 자석판이 안 보여서 철공소에 가서 아저씨들께 부탁해서 만든 거죠. 처음엔 바닥에 쫙 깔아서 보고 좋은 거, 안 좋은 거 걸러내는데요. 영 별로인 건 미련 없이 찢어서 버려요(웃음). 마음에 드는 것들은 자석판에 붙여서 다시 보는데, 그때 유난히 많이 보이는 대상, 장수가 쌓이는 것들이 새로운 소재가 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여기는 집 겸 작업실로 최적화된 공간이네요. 소파 옆에 자석판이 있고, 테이블에서 밥도 먹고, 드로잉도 하고요. 

오래된 집이어서 처음에 들어올 땐 모든 게 다 뜨악했어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부 철거하고 다시 시작했어요. 제 마음대로 해놓고 나니 지금은 대체로 만족스러워요. 오래된 체리색 몰딩과 노란 장판, 난초가 그려진 유리로 이루어진 공간이었거든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부엌이 보이는 게 싫어서 설계할 때 웬만한 건 다 숨겼어요. 원래는 신발장이 있던 공간을 편평하게 만들고, 전자제품은 다 베란다로 옮겼죠. 조명도 새로 달았는데, 일반 집에 붙어 있는 조명이 도무지 예뻐 보이지 않아서 직접 사 와서 설치했어요. 이건 보통 신발장이나 베란다에 쓰이는 등인데 여기 다니까 좋더라고요. 지금 이야기 나누는 이 공간도 거실처럼 보이지만, 사실 벽으로 나뉜 곳이었어요. 벽을 철거하고 테이블과 소파를 뒀죠. 가장 큰 방은 작업실로 만들었는데요. 재료가 튀거나 묻어도 상관없게끔 바닥을 뜯어냈어요. 

 

거의 모든 걸 고쳤군요. 이전에는 다른 동네에 계셨죠? 

한동안 청운동에 있었죠. 거기도 집이자 작업실이었어요. 청운동에서 겪은 것들이 그림 소재로 많이 이어졌어요. 올해 2월과 11월에 전시가 두 개 예정돼 있는데요. 2월엔 갤러리 SP에서 대파와 밭 그림을 보여드릴 것 같고, 11월에는 드로잉룸 갤러리에서 나무 그림을 보여드릴 예정이에요. 전부 청운동 작업실에서 보고 겪은 것들이 소재가 된 작업이죠. 청운동 작업실 자체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는데요. 사실 그 작업실에서 지내는 게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당시엔 작업실이 그림 소재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거기서 나오고 나니까 비로소 그때 겪은 것들이 소재로 보이더라고요. 

 

어떤 경험이었어요? 

여태까지는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 편하게 살다가 처음으로 목조 주택에서 지내보게 됐어요. 오래된 곳이라 층고가 낮고 비스듬한 계단이 있는 곳이었죠. 들어갔을 때부터 다사다난했어요. 수도관이 연결되지 않아 2주 동안 설거지를 못 했고, 비가 오면 물이 샜고,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고, 보일러가 고장 나서 땅 파서 공사까지 했어요. 그 과정에서 그림이 망가지기도 했죠. 게다가… 처음 보는 벌레가 엄청 많았어요. 하루하루가 사건사고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이사를 결정하고 나니 비로소 작업실에서의 이야기가 소재로 보이더라고요. 그때는 비가 오면 샐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그 상황에서 나오고 나니까 비 내리고 물이 새는 작업실도 그려보고 싶어졌어요. 거기서 겪은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2-3년을 꿋꿋이 버틴 제가 기특하게 느껴졌죠(웃음). 

 

규화 씨는 일상에서 작업을 끌어내고 있군요. 자연스럽게 나와 주변을 관찰하게 될 것 같아요. 

맞아요. 요즘은 정말 저를 돌아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감정을 그리고 있거든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정과 날씨가 다를 때.’ 

 

좀더 들어볼 수 있어요? 

언젠가 안 좋은 일을 겪고 기분이 바닥까지 다운돼서 걸어갈 힘도 없던 적이 있어요.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나, 너무 힘들다, 싶어서 감당이 안 되는데 햇볕이 너무 강렬한 거예요. 내 기분은 이 날씨랑 전혀 다른데… 그때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머릿속으로 간직만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티브이에서 윤여정 배우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LA에서 매일 아들 병원에 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너무 힘들었다고. 어떤 날엔 잔뜩 지친 상태로 병원에 가는데 해가 너무 쨍쨍 내리쬐더라는 거예요. 그때 “해가 정말 꼴 보기 싫었”대요. 제가 하고 싶은 게 그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청운동 작업실도 그렇고, 감정과 날씨도 그렇고, 힘든 상황이 작업으로 이어진 경우네요. 

두 작업 다 당시엔 소재가 될 줄 몰랐어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나니 그제야 소재로 보이더라고요. 

 

감정이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군요. 작업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나중에 작업 소재가 되기도 하고요. 

작년에는 <작업실 안 밖>과 <PLAY PAUSE REWIND> 전시에서 베이킹을 소재로 한 드로잉과 페인팅을 선보였는데요. 베이킹을 하게 된 것도 감정 때문이었어요. 슬픔에 빠져서 작업하지 못하던 시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도전한 게 베이킹이었거든요. 그 시기를 극복하고 나니까 베이킹이 그림 소재로 보이더라고요. 아, 베이킹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났는데, 며칠 전에 구운 파운드케이크가 있어요. 이거 먹으면서 이야기할까요? 

 

(테이블에 케이크와 커피가 차려진다.) 이걸 직접 구우셨다고요? 빵에… 금가루가 있어요. 

베이킹은 레시피가 전부예요. 정말이지 어렵지 않아요(웃음). 베이킹 이야기를 하려면 이전 생활을 먼저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운동도 하고 베이킹도 하지만 그전에는 저한테 오직 생활과 작업만 있었어요. 밥 먹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잠자고, 그림 그리는 일뿐이었죠. 그런 일상을 살아가던 중에…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저한테 할머니는 굉장히 큰 존재여서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어요. 

어떤 분이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웃음으로 승화해 주시던 분이었어요. 제가 하는 걱정이나 고민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겁지 않다는 걸 알려주신 분이죠. 우리 가족 모두가 할머니한테 의지하며 살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할머니가 편찮으실 때 병원 침대를 집 거실에 두고 간호할 정도였어요. 제가 나와 살게 되었을 때도 매일 통화하며 지냈어요. 그러던 분이 돌아가시니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슬프더라고요. 감정을 컨트롤하는 부분이 고장 나버린 것 같았어요. 저는 제가 일과 생활을 잘 나누는 사람이고, 나름대로 루틴을 만들며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요. 너무 큰 슬픔이 찾아오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작업실에 들어가면 캔버스 앞에서 울기만 하고, 작업실에서 나오면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어요. 이러다가는 병나겠다 싶은 생활이 한 달 넘게 이어졌죠. 뭐라도 해봐야지 하다가 우연히 베이킹 영상을 봤는데요. 갑자기 ‘이거다!’ 싶더라고요.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분야인데 어쩌다 그렇게 연결이 된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 길로 동생이랑 베이킹 숍에 가서 필요한 도구를 모두 샀어요. 레시피가 하라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니까 몸이 저절로 움직이더라고요.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페인팅할 땐 제가 주체가 되어 아이디어를 내거나 색 조합을 고민하고 모든 걸 선택해야 하는데요. 그걸 하려면 건강한 에너지가 필요하거든요. 근데 그게 안 되니까 뇌가 멈춘 기분이 들었는데, 베이킹은 크게 생각할 거 없이 하라는 대로만 하니까 좋은 냄새가 나고 맛있는 결과물도 나오는 거예요. 처음 만든 게 당근 케이크였어요. 완성되는 걸 보니까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시즌엔 하루에 빵을 네다섯 번 구우면서 지냈어요. 감정이 다루어질 때까지 해보자, 싶어서 엄청나게 몰입했죠. 

 

그렇게 다시 생활을 찾았어요? 

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빵만 마구마구 구웠는데, 베이킹을 힘들 때까지 하다 보니까 ‘작업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올라오더라고요. 빵이 구워지는 동안 종이를 꺼내서 빵 반죽이랑 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규화 씨 작업은 경험이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군요. 

제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제가 가장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잘 아는 걸 그리는 사람이고요.

 

한동안 전시를 쉬기도 했는데, 그땐 어떻게 지냈어요? 

2019년 3월에 개인전을 마친 이후로 한 3-4년 동안 작업만 했어요. 너무 한 가지 소재에 매몰돼 있어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그때는 눈앞에 뭐가 많아도 그릴 생각을 못 했어요. 그리고 싶은 게 산밖에 없어서 산만 그리면서 지냈죠. 근데 어느 순간 이렇게 하다간 산 그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다시 다양한 걸 보고 여러 그림이 나오는 사람이 될 때까지 전시를 안 하고 싶었어요. 부모님은 속이 터진다고 하셨지만(웃음), 전 그때 쉬길 정말 잘했다 싶어요. 그때 한 작업들을 올해 순차적으로 발표해요.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감정과 날씨 작업은 내후년에야 선보일 수 있겠네요. 

 

이렇게 시간 차를 두고 전시장에 발표되는 거군요. 근데 왜 한 가지만 그리는 걸 경계해요? 어떤 작가들은 한 가지를 내 것으로 만들어 어느 분야에서 아이콘이 되기도 하잖아요. 

눈앞에 사람도, 컵도 있는데 어떻게 그릴지 떠오르지 않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땐 너무 산에만 집중해서 틀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산 작업이 한창일 땐 산을 보는 게 좋았어요. 그때는 특히 밖으로 나가서 그리는 걸 좋아했죠. 사진보다는 현장을 보고 그리는 걸 재미있어했거든요. 산이나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가면 눈에 보이는 게 너무 많아요. 잎도, 가지도 수두룩하죠. 많은 걸 관찰하다가 그리고 싶은 게 눈에 띄는 순간을 특히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자연을 보고 싶었고, 어느 날엔 아이슬란드에 가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다녀왔어요? 

네. 모르는 사람들이랑 가게 됐는데, 멤버 중에 남극기지 연구소에 다니던 분이 계셨거든요. 대화를 나누다 제 그림들을 보여드리게 됐는데, 제가 그린 산에 전부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그림들을 보면서 이 산은 눈이 녹아 물줄기가 흘러내려서 이런 모양이 됐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깎여서 이런 형태가 된 거다, 해가 잘 드는 곳에 나타나는 색이다,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걸 듣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산들이 이런 모습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더 빠져들게 됐어요. 그 여행 이후로 더더욱 산만 그리게 된 거죠. 

직접 본 풍경들이라 그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근데 왜 사진 보고 그리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사진을 보고 그려본 적도 있어요. 근데 한창 몰입하다 보면 제가 사진을 그대로 따라가더라고요. 구도에도, 색에도, 형태에도 제 생각이 크게 담기지 않는 것 같고…, 그렇게 그리고 나면 그림에 제가 없는 것 같았어요. 그 느낌이 싫어서 사진을 안 보기 시작했어요. 최대한 제가 경험하고 느낀 걸 그리려고 한 거죠. 직접 본 풍경이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으로 그리곤 해요. 베이킹도 보고 그리는 게 아니에요. 제가 여기서 했던 행동들이라 어렵지 않게 머리에 그려지거든요. 그래서 자세히 보면 도구 같은 건 형태가 좀 다른 것들도 있어요(웃음). 

 

요즘은 어때요? 소재로 관찰하거나 발견한 거 있어요? 

특별히 “이걸 발견했어요!” 하고 내세울 만한 건 없지만, 요새는 ‘나를 다루는 게 전부다.’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좋은 작업을 해내기 위해서는 제가 편안하고, 건강하고, 좋은 기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특별히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평소에, 잠깐잠깐 스치는 순간에 행복하기를 바라요. 그래서 주변을 좋아하는 걸로 많이 채워두려고 해요. 제가 유리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수집도 많이 했는데, 좋아하는 유리컵이 많으니까 커피나 물을 마실 때에도 컵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려요. 어떤 컵을 쓰고 싶은지 고민하느라요(웃음). 그런 것도 잠깐씩 일상을 살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행복의 연속성을 만드는 거네요. 

맞아요. 그 연장으로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이불이나 소파 커버처럼 피부에 닿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몸에 닿을 때의 기분이 있잖아요. 좋은 소재의 옷을 입으면 기분도 좋아지는 것처럼요. 그래서 2014년에 독립하면서부터 소파 커버나 이불도 그때그때 직접 만들고 있어요. 동대문에 가서 천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서 사이즈에 맞게 재단해서 바꿔주는 거예요. 

 

그런 일들을 잘하려면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 알 수 있을 만큼 나를 잘 관찰해야 할 것 같아요. 

전 그걸 잘하는 편 같아요.

 

그럼 이 질문이 어렵지 않겠네요. 규화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제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에요. 우선 정리하는 걸 좋아해요. 눈앞이 깨끗해야 뭔가를 할 수 있거든요. 가벼운 예를 들면, 전날 술을 마셔도 술자리는 반드시 깨끗하게 치우고 자요. 전날 어질러둔 것들이 다음날 영향을 주기를 바라지 않거든요. 제가 싫어하는 건 좋아하는 것의 반대급부인 것 같아요. 아, 제가 정말 싫어하는 게 하나 있는데요. 다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웃거든요(웃음). 이건 제가 집 겸 작업실을 쓰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한데… 저는 선크림을 바르고 그림 그리는 게 정말 싫어요. 얼굴이 숨을 안 쉬는 것 같아서요. 작업실이 따로 있으면 옷을 입고, 선크림도 바르고 오가야 하잖아요. 근데 저는 그게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지금은 완전히 자연인 상태로 작업하곤 하는데, 그렇게 안 하면 작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자연인 상태로 저쪽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거군요. 구경해도 되나요? 

그럼요. (작업실에 놓인 캔버스를 가리키며) 이건 곧 발표할 대파들이에요. 코로나19가 처음 막 발발한 시기에 작업한 건데, 이때 유난히 대파가 많이 보이더라고요. 온라인 쇼핑이나 배달에 차질이 생기니까 이웃들이 직접 대파를 키우기 시작한 거죠. 매일 산책하던 동네인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대파가 자라나니까 묘하더라고요. ‘왜 다들 대파를 심었지?’ 싶어서 관찰해 봤는데요. 그때 대파 값이 7천 원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저는 정원에 심어지는 대파를 보면서 코로나19를 실감한 거예요. 마침 그때 살던 집 창문으로 옆집 정원이 보여서 매일 부엌에 앉아 옆집 대파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갓 심어진 모습도 그리고, 엄청 크게 자란 모습도 그리고. 어느 날 뎅강 잘린 걸 보면 ‘드셨구나.’ 생각도 했고요(웃음). 가끔 대파가 엄청 많이 자라서 꽃이 피거나 시들어서 축 늘어질 때도 있어요. 

 

흙이 전부 다르게 표현된 게 재미있어요. 단순히 갈색인 것도 있고, 다른 색이 섞인 것도 있고, 벌레가 있기도 하고요. 

대파를 그릴 때 흙을 표현하는 게 유독 어려웠어요.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그려졌음 싶은데, 제가 흙을 배경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는 데에 소홀해지는 것 같았어요. 흙이라는 형태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데, 흙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집 밖으로 나가서 흙을 손으로 한 줌 떠봤어요.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죠. 생각해 보면 그래요. 우리는 뭐든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자세하게 관찰한 경험이 얼마나 있을까요? 자세히 보지도 않고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오래 들여다보면 내가 아는 것 이상이 보여요. 흙이 그랬어요. 자세히 보니 갈색 안에 흰색도 있고, 붉은색도 있고, 초록색도 있더라고요. 갈색도 모두 같은 갈색이 아니에요. 어디는 흙이 빨갛고, 어딜 가면 굉장히 밝은색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날그날 제가 본 흙들을 다르게 표현해 봤어요. 유리 입자가 섞인 흙을 보면 흙 안에 유리를 그리기도 했고요. 그때 흙이나 비처럼 형태를 정확히 인지할 수 없는 것들을 공부했고 그런 걸 그리는 게 재미있었어요. 

 

대파 그림들 보면 볼수록 오묘하네요. 소재가 뭔가요? 크레파스 느낌도 나고…. 

아크릴인데 많이들 아크릴로 안 보세요. 아마 바탕이 생천이어서 그럴 거예요. 캔버스가 아니라 동대문에서 사 온, 코팅이 안 된 천이거든요. 어떨 때는 매니큐어처럼 붓 자국이 그냥 올라가길 바라고, 어떨 때는 스며들거나 번지게 하고 싶거든요. 그런 여러 질감 표현을 위해서 천을 바꿔봤어요. 이불이나 소파 커버를 바꾸려고 동대문에 가면 천을 이것저것 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그게 다 재료로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저것 천을 사서 그려 봤어요. 처음엔 번지고 스며들기를 바라서 캔버스 천을 뒤집어 뒷면에 그렸는데요. 앞면에선 붓 자국 그대로 올라가던 천이 뒷면에선 싹 스며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동대문에서 천을 본격적으로 탐색했어요. 어떤 건 빛이 투과될 만큼 얇고, 어떤 건 촘촘하고 두꺼워서 물감이 잘 안 올라가기도 하고…. 

 

소재도 그렇고, 재료도 그렇고 계속 새로운 걸 찾아 나가네요. 또 재미있던 재료 있어요? 

종이죽이요. 감정적으로 좀 지쳐서 한두 달 페인팅이 안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음이 계속 불안하더라고요. 그때도 기분을 환기하려고 단순노동이라도 한번 해보자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작업실 공사하고 남은 목재들이 보였어요. 캔버스에서 볼 수 없는 크기와 비례가 재미있더라고요. 작업도 안 되는데 재료라도 만들자 싶어서 무작정 톱으로 잘라서 그 위에 종이죽을 붙여봤어요. ‘여기에 그림을 그리면 재미있겠다.’ 싶었죠. 캔버스는 규격이 호수로 정해져 있어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캔버스만 봐도 몇 호인지 다 보이거든요. 그때는 캔버스 호수가 읽히는 게 싫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호수가 읽히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매일 보던 비례가 아닌 곳에 그리고 싶던 것 같아요.

(작은 작품을 가리키며) 저 작품이 혹시 종이죽인가요? 

맞아요. 크기도 작고, 질감도 새로워서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오밀조밀 모여 있으니 귀엽네요. 새로운 재료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겁이 나진 않으세요? 

전혀요. 망하면 버리면 되니까요. 오히려 예상과 다른 걸 더 좋아해요. 

 

규화 씨는 하나에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하나로만 설명되는 게 즐겁지 않아요. 지금 그리는 것에 대해 더 그려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할 때, 흥미를 잃을 때 소재나 재료를 바꾸는데요. 생각 없이 지금 하는 작업을 수량만 늘리는 식으로 그려나가는 걸 경계하려고 해요. 이를테면, 청운동 작업실을 그릴 때도 ‘다음엔 이렇게 바꿔 그려봐야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같은 포맷에서 계속 다른 그림이 나온 거거든요. 그러면서 배우는 게 분명히 있는데, 이다음으로 나아갈 이유가 딱히 없을 땐 멈춰야겠다고 생각해요. ‘지붕을 빨갛게 바꿔볼까.’ 같은 건 그냥 작품 수를 늘리기 위한 방편인 것 같아서요. 

 

예술은 창작과 긴밀한 관계이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예술이란 말이 아닌 걸로 소통하는 거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규화 씨는 작업으로 어떤 방식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감정과 날씨 작업을 해나가면서 새롭게 알게 된 건 있어요. 저는 제 얘기를 하거나 저를 드러내는 걸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정도냐 하면, 남들이 볼 일 없는 일기장에도 그날 뭘 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유추할 수 없게 쓰곤 했어요. 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도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도 했고요. 근데 그게 작업에도 투영되더라고요. 지난 작업들을 보면, 그 그림 속에 제 감정은 없어요. 근데 이번에 감정과 날씨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제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는데요. 제 경험과 감정을 이렇게 온전히 드러내는 게 처음이어서 좀 발가벗겨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리면서도, 그리고 나서도 생각이 많아져요. 제가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 감정은 담지 않고 경험한 것만 그릴 땐 보는 사람들이 각자 느끼고, 각자 생각하기를 바랐어요. 근데 지금은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돼요. 

 

다른 생각이라 함은요? 

최근에 공감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는 타인에게 동감하는 건 쉽지만, 공감은 잘 못 하는 것 같아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이 기분이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어릴 때 뜨거운 것에 손을 덴 적이 있어요. 그때 어른들이 “물에 닿으면 쓰라리겠다.”라고 하시는데, 그 ‘쓰라리다’라는 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공감이 잘 안 갔는데, 데인 데 물이 닿는 경험을 하고 나니까 비로소 알겠더라고요. ‘아, 이게 쓰라린 거구나.’ 그래서 저는 소통이라는 게 실은 각자 경험에 따라 깊이나 정도가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제 작업을 보고도 다들 자기만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내 그림은 이런 거고, 이런 감정을 느끼면 좋겠어.’ 하고 정해주는 게 아니라, 저는 생각할 거리를 건네고,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거죠. 마치 시처럼요. 공감이 된다면 더없이 좋을 거고요. 

 

저는 이번에 <PLAY PAUSE REWIND> 전시에서 베이킹 페인팅을 보고 저를 위해 빵을 만들어 준 사람을 생각했어요. 이제는 사이가 틀어져 보지 않게 된 사람이죠. 그러니까 저는 베이킹 페인팅을 보고 인간관계의 덧없음을 생각한 건데, 이렇게 자기만의 무언가를 떠올리면 좋겠다는 거죠? 

맞아요(웃음). 다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을 거고, 각자 다른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을 테니까요. 

 

앞으로 규화 씨가 건넬 생각할 거리들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마지막 질문으로 어떤 게 좋을까 하다가 이걸로 골랐어요. 예술, 예술이라는 단어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뭐예요? 

할머니요. 돌아가실 즈음 요양원에 계셨는데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라 면회가 어렵던 때였어요. 식구들도 그렇지만, 할머니한테 가족과의 단절은 무척 큰일이었어요. 긴 시간을 오로지 혼자서, 무료하게 보내야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종이랑 색연필, 그리고 꽃과 민화 사진을 여러 장 보내드렸는데요. 할머니가 틈날 때마다 그림을 그려서 모아두셨더라고요. 그걸 요양병원 직원분을 통해 보내주셨는데, 정말 아름다워요. ‘이런 게 진짜 예술이구나.’ 싶었죠. 그걸 모아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 이름이 새겨진 책을 만들어 선물해드렸어요. 할머니가 직접 이룬 성취감을 선물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할머니만을 위해 만든 책인데 그 책 덕분에 아직도 살아 계신 것처럼 느껴져요. 이런 게 예술 같아요. 만나본 적 없는 작가지만 이 세상에 없어도 작품을 통해 계속 영향을 받고, 위로받고, 감동하게 되잖아요. 저희 할머니 그림이 지금 저한테 그래요. 이틀 만에 만든 책이라 엉성하긴 한데, 한번 보실래요? 정말 아름다운 그림들이 담겨 있거든요.

판형이 조금 큰 책을 꺼내서는 테이블에 가만히 둔다. 색연필로 그린 듯한 그림과 또박또박 적힌 할머니 손 글씨가 눈에 박힌다. 건드리면 흩어질 것처럼 연한 그림들이 꼿꼿한 자태로 장장이 담겨 있는 책이다. 아름다운 색들의 향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규화 씨가 말한다. 매일 그림을 그리시던 할머니가 어느 날엔 색이 더 많은 색연필을 보내달라셨다고.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을 감히 사랑스럽다 여기면서 어쩌면 그것이 예술 그 자체 아닐까, 잠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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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