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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음악 감상을 목적으로 처음 보는 이들과 한 공간에 모인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풍성한 사운드가 빈틈을 메운다. 두 에디터가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한 서울의 청음 프로그램.
세월이 느껴지는 거대한 음향 기기들과 전선, 골동품 사이에서 누군가 디제잉을 한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춤사위로 음악을 즐긴다.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그 영상을 보자마자 나는 저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빈티지가 유행이라지만 이건 빈티지 콘셉트로 기획된 무언가가 아니라 빈티지 그 자체였다. 메일을 통해 조심스럽게 예정된 세션이 있는지 묻자 돌아온 답변은 간단했다. 주인 할아버지와 이야기해서 마련해볼게요. 그때 알게 되었다. 그 공간은 올해로 여든다섯이 되신 이부한 사장님이 수십 년째 지켜온 진짜 오디오 가게 ‘텐프로사운드’였다는 걸. 파티나 사운드 시스템 팀은 스피커를 구하러 이곳을 드나들다 사장님과 연을 맺었고, 사장님은 이들을 손주처럼 대하며 선뜻 공간을 내어주고 계셨다. 얘기해보고 연락 주겠다던 이들에게 메일을 받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없던 세션이 뚝딱 만들어졌다.
용산역 뒤편, 원효전자상가라는 생소한 건물 앞. 지금은 문 닫은 곳이 대부분인 이 오래된 상가에서, 예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가며 활력을 만들어냈을지 궁금해졌다. “4동 305호···.” 청음 프로그램보다는 친구 집에 놀러 가는 듯한 주소를 중얼거리며 걸었다. 건물 안은 꼭 옛날 아파트 같았다. 복도를 따라 늘어선 낡은 간판들에는 바래기 직전의 큼지막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호수를 하나하나 세며 들어갔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만치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파티나 사운드 시스템은 서울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컬처 스튜디오다. 클립쉬 라 스칼라 스피커 네 대와 매킨토시 앰프 두 대, 턴테이블과 로터리 믹서로 구성된 하이파이 사운드 시스템을 중심으로 한다. 이들이 지향하는 건 그저 음악을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취향을 천천히 쌓을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구조다. 낮에는 리스닝 세션과 커뮤니티 프로그램으로 조용한 교류를, 밤에는 디스코와 하우스 중심의 파티로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낮의 축적이 밤의 경험을 완성한다는 게 팀의 원칙이다.
팀은 최한별, 박현기, 김준영, 이현준 4명이 만들었으며 여러 DJ들과 함께한다. 지난 5월에는 연희예술극장에서 첫 파티를 열었고, 7월에는 성수동 ‘펍지 성수’의 1주년 파티에 초청되어 디제잉으로 무대를 채웠다. 잘 길들여진 빈티지 스피커는 단번에 티가 난다. 이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이다. 정해진 공간 혹은 장르 없이 매번 다른 곳에서 같은 태도로 스피커를 켠다. 영화 〈해피엔드〉(2024) 속 코우와 유타가 앰프를 질질 끌고 도심을 횡단하는 모습처럼, 이들은 80킬로그램이 넘는 스피커를 끌고 다음 장소로 간다. 덕분에 음악은 자연스레 이들을 따라다닌다.
왠지 피난처 같은 기분이 드는 전자상가에서 나는 두 시간가량을 꼬박 앉아 음악을 들었다. 나를 포함해 열댓 명의 사람은 라운지도, 그렇다고 고급스러운 음악감상실도 아닌 그 공간에서 같은 리듬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사 온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 것도, 눈을 감고 쉬는 것도 전부 자유였다. 온몸의 긴장을 풀고 묘한 기분으로 노래를 들었다.
앞에서는 두 디제이가 차례로 판을 올리며 중간중간 짧은 설명을 곁들였다. 어떤 곡이며 어느 시절 어떤 흐름에서 나온 앨범인지. 공간에 갖춰져 있는 이탈리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가 심장을 쿵쿵 울렸다. 클럽에서나 혹은 헤드셋을 통해 들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결이었다. 더 길게 듣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을 넘길 수 없었다. 사장님이 다음 일정을 위해 가게를 닫아야 했기 때문이다. 리스닝 세션의 묘미는 어떤 곡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흘러나오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곡은 온전히 나만의 추억이 되기도 하고, 옆 사람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쌓는 특별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파티나 사운드 시스템이 준비한 시간 속에서는 그 감각이 유독 짙었다. 낯선 이들과 낯선 공간에서, 오직 스피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긴 연대감이었다.
세션이 끝나고 오래된 건물을 걸어 나왔다. 밖은 아직 밝았다. 따로 메모해둔 노래들을 플레이리스트에 옮겨담으며 이어폰을 꼈다. 노르스름한 노을이 스며들며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 트랙 〈I Wanna Be Adored〉를 듣고 바로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던 앨범. 스톤 로지스는 1983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밴드로, 브릿팝의 선구자라 평가받는다. 현장에서 틀지 않은 DJ 영아일랜드의 추천 트랙으로는 수록곡 〈Waterfall〉이 있다.
영국의 패션 사진가이자 뮤지션인 스티브 히트의 음악 커리어를 상징하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일본의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바이닐로 비밀스럽게 공유되다가 2019년 유럽 레이블을 통해 재발매되며 다시금 조명받았다고. 개인적으로는 여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느꼈다.
3인조 밴드 마야 온가쿠의 기념비적인 데뷔 정규 앨범. DJ 시티보이가 가장 먼저 들려준 음악으로, 명상하는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사이키델릭과 앰비언트 사운드를 통해 인간과 자연, 정신세계의 연결고리를 음악으로 탐구하려는 밴드의 철학을 담았다.
이날 세션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곡. 이글스의 다섯 번째 정규 앨범이며 미국에서만 1천7백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파티나 사운드 시스템 팀이 스피커를 구매하기 위해 여러 가게를 돌아다닐 때, 모든 사장님이 이 곡을 틀며 스피커 성능 테스트를 했다고. 그날만 스무 번 넘게 들어야 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 덕분에 더 기억에 남게 됐다.
성수율 뮤직은 좋은 음악을 좋은 환경에서, 타인과 함께 나누는 경험을 제안하는 문화 플랫폼이다. 미디어 아트 그룹 ‘사일로랩SILO Lab’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자체적으로 기획한 공연을 선보이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 협업한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같은 공간이라도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밤새 테크노 음악이 흐르는 파티가 열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애니메이션 OST 상영관이 되고, 느지막한 오후에는 재즈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성수동이라는 동네가 가진 유연함처럼, 장르와 형식의 경계 없이 음악을 매개로 서로 다른 취향을 이어준다. 성수율 뮤직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간을 가득 채운 22개의 스피커다. 우리의 귀 높이와 바닥, 천장, 그리고 2층 공간 뒤편까지 촘촘히 배치된 스피커 덕분에 소리가 단면으로 들리지 않고, 사방에서 입체적으로 울려 퍼져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청음 환경을 만든다.
사전 예약을 통해 신청곡 프로그램에 참여해 원하는 음악을 감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평소 자주 듣던 곡을 신청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레 보컬 너머의 악기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러 방향에서 겹쳐 들려오는 소리 덕분인지 음악이 입체적으로 펼쳐졌고, 평소에는 지나쳤던 소리들이 하나씩 귀에 들어왔다.
이날 성수율 뮤직을 찾은 이유는 ‘포엠매거진’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여름, 녹아버린 사랑〉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여름’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시와 음악을 감상하는 모임이었다. 1부에서는 호스트가 직접 고른 작품을 차례로 읽고 듣는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 여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노래, 시인의 슬픈 목소리와 닮은 곡까지. 이어진 음악과 시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여름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어진 2부에서는 서너 명씩 작은 조를 이뤄, 자신이 가져온 책을 교환하고 그날의 감상을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혼자 읽고 혼자 듣는 데 익숙한 책과 음악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저마다 다른 여름을 품고 모인 사람들이 시와 음악을 사이에 두고, 잠시 같은 계절을 건너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첫 소절만 듣고 가볍게 넘겼을 노래도, 첫인상만으로 성급히 지나쳤던 음악도 이곳에서는 마지막 음까지 놓치지 않고 듣게 됐다. 일을 하거나 이동하는 동안 배경음처럼 흘려보내던 음악이, 온전히 집중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호스트가 ‘왜 이 곡을 골랐는지’ 그 마음을 가만히 짚어보았다. 시의 구절과 음악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천천히 곱씹게 됐다. 어느 곡에서 “엇갈리던 숨소리가 어느새 하나로 들려와”라는 가사가 귓가에 얹혔을 때, 나도 모르게 노랫말의 박자에 맞추어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가는 일은 꽤 익숙했으나, 오직 음악을 ‘듣기 위해’ 청음 공간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무대와 퍼포먼스, 관객의 반응까지 함께 경험하는 공연과 달리, 이곳에서는 소리만이 중심에 있었다. 소리로 가득 채운 성수동에서의 하루. 다른 무엇도 얹지 않고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날이었다.
기존 자신의 발표곡을 밴드 셋 사운드로 새롭게 재해석한 곡. 빠른 템포의 보사노바 리듬 위에, 사랑에 빠진 사람이 “내가 정말 미친 건가” 하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들뜬 마음을 사랑스럽게 그려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램의 첫 장을 열기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박소란의 시 〈맴맴〉과 함께 소개된 음악. 호스트가 떠올린 ‘여름’의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곡. 노루가 스쳐 지나가는 사려니숲길을 노래하는 가사와 느긋한 연주가 어우러져, 한여름 숲속을 걷는 장면을 자연스레 그려낸다.
잔잔한 어쿠스틱 사운드 위에 사랑을 담담하게 풀어낸 곡이다. 손미 시인의 시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와 함께 소개됐는데, 질문과 대답처럼 이어지는 두 작품의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제목은 분명 ‘사랑을 하고 있어’지만, 노래에는 사랑의 기쁨보다 망설임과 쓸쓸함이 잔잔히 흐른다.
에디터 황진아, 정지윤
포토그래퍼 박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