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갔다 , 다시 봄을 만났다

11월의 봄

갑작스러운 한파에 서울은 서로 경쟁하듯 두꺼운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 휘청였다.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기에 점퍼를 입고도 모자라 목도리까지 한 채, 남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출발하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창밖 너머 보이는 풍경들을 보면서 남해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겨울에서 봄을 향해 달려온 것처럼, 계절의 흐름이 그렇게 남해를 알린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미처 색깔을 바꾸지 못한 초록의 나무와 풀들이 나를 반겼다. 걸음을 옮기기 전, 단단히 둘렀던 목도리를 풀었다. 그곳에서 11월의 봄을 만났다.

겹겹이 쌓여 꽃을 피우다
가천 다랭이마을

이미 많은 사람의 발길이 오간 남해를 이번 여행지로 정한 건 가천에 있는 한 마을을 보기 위해서였다. 층층이 쌓아 올려진 논과 그 너머 보이는 파란 바다의 풍경은 감탄에 앞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빠질 듯한 기암절벽이 존재하는 그곳은 모아이 석상이 숨겨진 이스터 섬(칠레 서쪽의 남태평양에 있는 섬)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약 사백 년의 역사를 가진 이 마을은 배고픔과 눈물로부터 시작된 곳이다. 지주들의 착취를 피해 도망 온 가난한 이주민들이 경사가 험한 소울산과 응봉산을 개간하여 논을 만들었다. 걷어낸 돌로는 논둑을 쌓고 물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도록 흙으로 틈을 메우는 고단한 노동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논을 그 지역 사투리인 ‘다랭이(표준어: 다랑이)’라 불렀고, 그 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을 ‘다랭이마을’이라 명칭 했다. 억척스럽게 살아야만 했던 백성의 삶이 겹겹이 쌓여 완성된 다랭이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견고함을 잃지 않았다. 백여 개의 층층 계단은 세 평 정도의 작은 논에서부터 몇백 평에 이르는 광활한 크기의 논으로 이뤄져 있다. 

예전에는 대부분 벼농사를 지었지만, 수입이 적은 까닭에 마늘과 파농사로 전환을 하거나 아예 폐농한 곳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길 중간중간에 숨 죽은 잡초들이 무성한 논이 적지 않았다.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마을 사람들이 민박업으로 직종을 바꾼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변화야 유명 여행지라면 있을만한 고질적인 문제지만 이 마을에선 단점으로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대문에 투박한 간판만이 덜렁 걸려있는 어설픈 숙소이긴 해도 기다리던 손주, 손녀를 반기는 할머니가 방 한 칸 내어주는,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논과 논 사이에는 노인의 굽은 등을 닮은 꼬부라진 길이 있다. 지나치게 가파르고 위험한 곳은 목조계단과 다리를 이어 해안 산책로가 되었는데, 그 길을 걷다 보면 바다도 만나고, 산도 만나고, 가끔가다 길 한가운데에서 시금치를 파는 할머니도 만날 수 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며 시금치는 필요 없는지 슬쩍 묻는 할머니의 속 보이는 장사수완이 귀엽다. 또 어떤 할아버지는 내게 오더니 “니네는 사진만 찍고 구경은 안 하냐!” 하고 가버린다. 이미 남해의 온화한 날씨와 풍경에 빠져있어 고장난 386컴퓨터처럼 ‘좋다’는 말만 반복하는 상태였지만, 단연 좋았던 건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마을에는 꽃과 고양이도 많았다. 주민들의 집 앞마당에는 꽃들이 풍성하게 심어져 있었고, 골목을 누비는 고양이들도 몇 마리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계속되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화를 내는 주민도 있었지만, 야박해 보이지 않았다. 길고양이치고는 지나치게 포동포동한 모습을 보니, 분명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주는 듯했다

첩첩산중의 섬에 오르다
금산 보리암

다랭이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고 보리암을 보기 위해 상주리로 이동했다. 금산 정상에 위치한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하나로, 남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로 꼽힌다.

나는 무교이고,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에 이곳을 찾았다. 차도 없지만, 그전에 운전면허도 없는 내가 이곳을 갈 방법은 딱 하나였다. 바로 택시. 지나가는 할머니께 어렵사리 콜택시 번호를 물어 택시를 탄 지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새 보리암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산을 오르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차들이 길게 서 있는 게 아니겠는가. 기사 아저씨가 앞서 말한 금액보다 더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빠져있을 때, 택시는 꼬리를 물고 늘어진 차들을 비웃기나 하듯 옆으로 쓱 지나갔다. 아저씨는 굉장히 자신감 있는 얼굴로 택시니까 가능한 일이라며 젠체했다. 알고 보니 주차시설이 부족해 들어올 수 있는 차량의 수를 제한하고 있고, 택시는 승객이 금방 내리기 때문에 출입구까지 통과할 수 있던 것이었다.

등산하기 위해 단단히 먹은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사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고, 무성한 대나무가 양옆으로 길을 내어준 계단을 내려가니 사찰이 있었다.

유명한 관음성지(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가 맞는지 관광객들과 관계자들로 우글거렸다. 다소 산만하고 어수선한 느낌이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이야기이고,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보리암은 어질할 정도로 빼어난 절경이었다. 

절벽에 간신히 자리 잡은 사찰은 금방이라도 바다에 빠질 듯이 아슬아슬했다. 밑으로는 섬들이 듬성듬성 심어진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는데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섬처럼 느껴졌다. 내게 보리암은 종교적인 공간이라기보다 남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경치 좋은 공간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이곳이 가벼운 관광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장엄함, 웅장함 같은 것을 느꼈으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이 산 한가운데 자리한 사찰이 주는 위엄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 옆에서 우두커니 산을 내려 보고 있는 스님의 뒷모습에서도 단단한 무언가를 느꼈다.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보리암을 찾긴 하지만 문득 고요한 밤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보리암에 와서 ‘소원 따위 없고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고 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다에 빠지는 별들을 보며 조용히 사색하는 것도 눈 부신 해를 보는 것만큼 황홀할 것 같다. 고요 속의 풍요, 그것은 어느 신을 믿든지 차별하지 않는 자연의 가르침이었고, 종교의 본질이기도 했다.

늘 반대는 있기 마련이다
원천마을

원천마을은 가장 기대하지 않은 곳이었다. 상주해수욕장을 가기 위해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시 쉬어가는 목적이 있을 뿐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올댓남해’는 9월에 오픈한 곳이라 모든 시설이 깔끔했다.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남해로 내려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던 사장님은 본인을 진부한 사람이라 소개했다. 사장님이 내려준 라떼를 마시며 말을 이어가다 보니, 예전에 묵었던 게스트 중에 기자가 있었는데 계속해서 인터뷰를 요청하여 정중히 거절했다는, 자랑 섞인 말도 듣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상황이 참 묘하게 됐다. 마치 당사자 모르게 인터뷰를 시도한 여우 같은 기자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찔려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직업이 뭐냐는 급작스런 질문이 오자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입니다.” 사장님과 나는 서로 머쓱하게 웃곤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가벼운 산책을 하기 위해 게스트하우스 뒷골목에 있는 길을 걸었다. 이 길은 남해 바래길 코스 중 하나로 ‘앵강다숲길’이라 불리었다. 서쪽의 설흘산과 북쪽의 호구산, 그리고 동쪽의 금산에 둘러싸여 파도 없이 잔잔한 앵강만을 중심으로 남면, 이동면 등을 걸쳐 어촌마을의 삶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다. 나는 그곳을 기준으로 한쪽에선 생기 넘치는 활력을, 반대편에선 버석한 죽음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원천항이 있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어항에는 쉬고 있는 몇 척의 배들과 간간이 보이는 어부들이 있었다. 그물망에 있는 고기들을 떼어내고 있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던 차에 부산스레 내 앞을 뛰어가는 한 아저씨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아마존에서나 쓸 법한 긴 나무창을 들고서 항에 있는 계단을 밟고 내려가더니 불과 몇 초 만에 문어 한 마리를 잡은 게 아니겠는가.

물이 맑아 바닷속이 훤히 보이긴 했지만 몇번의 동작으로 간단히 문어를 잡다니, 정글의 법칙에서나 볼 법한 상황을 실제로 보니 웃음이 터졌다. 아저씨는 신이 났는지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물음에 흔쾌히 포즈를 취해준 뒤 문어를 들고 홀연히 길을 떠났다. 바다에서 느낄 수 있는 생명력이란 이런 건가 싶었다. 수면 위를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들과 뜻밖의 수확에 청량한 웃음 짓는 아저씨의 모습 같은 것.

방파제로 막힌 길 끝에 앉아 바다구경을 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길의 끝은 방파제가 아닌 배로 인해 막혀있었다. 바다 바로 옆에서 파도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더 이상 바다 위를 헤엄칠 수 없는 죽은 배들이 모여 있는 그곳은 배 ‘무덤’이라 할 수 있었다. 여느 묘지와 같이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배 곳곳에는 선장이 지었을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제는 불릴 리 없는 배의 이름은 묘석에 깎아 새겨진 글귀처럼 선명했다. 나는 참 묘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이 아닌 시멘트 바닥에 배를 붙인 어선들이 낯설었다. 뒤로는 낙엽이 가득 쌓인 폐가가 있어 그 기분은 더했다. 날이 조금만 어두웠다면 엄두도 안 났을텐데 궁금한 나머지 건물 안을 기웃거렸다. 그곳은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으슥했지만, 발소리에 놀라 도망간 새끼 고양이 두 마리 빼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사람의 손을 떠난 보통의 것처럼 초라할 뿐이었다. 밖에 있는 어선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항해했던 흔적도 이제는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에 부식되어 떨어져 나간 어선의 표면들, 그 위에 기생했던 따개비들이 변변치 못한 현재를 보여줄 뿐이었다

겨울바다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라보는 일
상주은모래해수욕장

해변에서 반소매 차림으로 족구를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따뜻한 날씨였지만 그래도 바다는 겨울이었다. 얼음장같이 시릴 게 빤한 바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라보고, 조개껍데기를 줍는 일 정도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영화 <이파네마 소년>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모델 이수혁이 나온다는 정보 하나로 찾아간 상영관에는 나를 포함한 세 명의 관객이 전부일 정도로 인지도가 낮았다. 그나마 러닝타임의 삼 분의 이를 상의 탈의한 채 나오는 이수혁과 그보다 더 아름다운 바다가 배경이었기에 영화는 빛날 수 있었다.

해변 뒤로는 울창한 송림과 보기만 해도 정겨운 민박들이 모여있어 아늑했다. 은모래해수욕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래 입자는 곱고 반짝반짝 윤이 났다. 하지만 직접 찾아온 이곳은 어째서인지 영화에서 나왔던 장면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이수혁이 없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그 미묘한 차이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애쓰면서도, 애써 아쉬운 표정을 감추고 사진을 찍기 위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변을 빠져나와 작은 도로를 건너고, 다랭이논을 올랐다. 한층 한층 오를 때마다 고개를 돌려 바다를 확인했다. 우거진 풀과 나무 사이에 해변이 보일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그리고 더 이상 다다를 곳이 없을 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뒤를 돌았다.

“……와.”
말이라기보다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반사작용이었다. 백사장에서는 일직선으로만 보이던 바다가 둥근 아치형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옥빛의 잔잔한 물살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갑작스레 스노우 글로브가 떠올랐다. 유리 안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이 작아진 바다를 보아서라기보다 지금의 장면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생각이 난 걸지도 몰랐다.

벅찰 만큼 아름다운 장면을 마주했을 때 나는 항상 고민한다. 이 순간을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릴 것 같은 마음에, 카메라와 펜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어깨에 멘 짐을 내려놓고 언덕에 앉아 바라볼 뿐이었다. 잔잔히 일렁이는 파도가 두 눈을 채웠고, 비료가 섞인 오묘한 흙냄새가 코에 스며들었다. 그곳을 조용히 응시하던 영화 속의 소년과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드디어 내가 상상하던 이파네마 소년의 바다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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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혜인

포토그래퍼 박소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