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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머무는 집, 연암재
남쪽에서 온 초대장
인연이 머무는 집, 연암재
여행지를 낯설게 하는 몇 가지가 있다. 내가 사는 이곳에 비해 둥근 억양, 밑간이 다른 음식, 살에 닿는 공기의 촉감 같은 것들. 가장 멀고도 가까운 섬 제주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초대했다. 하얀 벽, 낮은 담, 마늘 향 그득한 작은 집에서 하루를 머물다 가라는 이야기였다. 제주는 지금 유채꽃이 한창이라고 했다. 바람과 파도가 가장 평화로운 계절에 우리는 남쪽 나라로 떠나기로 했다.
더는 올 사람이 없는
첫 번째 밤
처음 연암재에 도착했을 때 제주는 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산방산도, 풀벌레도, 하루 종일 동네를 어슬렁거렸을 이웃집 백구도 잠든 시간. 노란 핀 조명이 길을 안내했다. 자갈밭을 걸어 나무 바닥이 깔린 와인 저장고 앞에 닿자 아주 조용한 클래식 연주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꽃, 그 옆으로 간이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한 남자가 보였다. 아마도 그가 우리를 초대한 사람인 듯 했다. 우리는 잠시 서서 기다렸고, 머지않아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 악수를 건넸다. “더는 올 사람이 없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밤이라는 말. 기분 좋은 약속이었다. 그는 우리가 머물게 될 방을 함께 돌며 몇 가지 요긴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분의 이불이 놓인 장소라든지, 일정하게 유지되는 방 안 공기, 다음 날 해가 들면 창문 뒤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에 대해서.
욕조에 물을 받았고, 소파에 앉아 오렌지를 까먹으며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껍질을 두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릴 적 살던 집의 크림색 소파를 떠올렸다. ‘나는 지금 여행 중이야.’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 떠난 집’, 그러니까 집을 떠나서도 집에 머무는 느낌이라는 것, 그게 이 공간의 핵심이었다. 어느새 욕조에서 물이 넘치는 소리가 들렸고, 욕조 위 창문에서 제주의 까만 하늘이 쏟아졌다. 첫 번째 제주의 밤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낮고 단단한 집
공간에는 저마다의 울림이 있다. 단정하고 정돈된 목소리, 울창하고 푸른 목소리, 깊은 동굴의 목소리. 공간의 목소리는 그곳을 가꾸는 사람의 성격과 닮아있다. 어느 방향으로 창을 내고 어떤 눈높이를 유지할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느껴지는 첫 번째 향 같은 것. 고심 끝에 쌓아 올린 공간에는 하나같이 세심한 배려가 묻어있다.
아침을 깨운 건 초인종 소리였다. “아침 식사예요. 간이 세지 않아서 속이 편할 거예요.” 주인집 아주머니는 전복죽과 스콘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 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죽은 심심했고, 그래서인지 무리가 없었다. 견과류와 베리가 잔뜩 담긴 스콘은 속이 촉촉해 몇 개를 먹어도 괜찮았는데, 비결을 물으니 전날 만든 반죽을 아침마다 오븐에 구워 내온다고 했다. “그럼 아이들은 매일 이 스콘을 먹을 수 있는 거네요.” 아마 그때 나는 자기도 모르게 부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을 것이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정원을 산책했다. 전날에는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산과 구름, 멀리 유채 꽃밭이 보였다. 희고 단단한 벽, 벽과 맞닿아 흐르듯 난 길, 길을 드러내기 위해 쌓아둔 구멍 많은 돌, 구멍 사이 제주의 바람, 무심히 심어놓은 마늘 향이 한꺼번에 불어왔다.
손님의 숙소로 사용하는 두 개의 단층 건물은 각각 윈저하우스와 스톤빌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카페에는 커피 향이 퍼졌고, 전날 밤 잠시 들렀던 와인 저장 창고 앞 데크에는 살짝 이슬이 깔렸다. 이곳은 건물이 낮아 하늘이 더 잘 보였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을 좋아해서 다행이에요. 손님을 더 받기 위해서라면 건물을 높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앞마당은 태평양이요, 뒷산은 한라산이니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자연 공부가 어디 있겠어요.” 자연이었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훗날 고향을 떠나더라도 진짜 자연의 기억을 품고 살 것이다. “누구나 제주에 집 하나쯤 갖고 싶어 하잖아요. 연암재라는 이름 아래에 ‘제주 우리집’이라는 문구를 새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예요. 다시 돌아와도 언제나 그곳에 있는 고향 같은 집이었으면 하거든요.” 문득 나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단순히 하나의 잘 꾸며진 건물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소년의 꿈이
모여든 곳
소년은 호텔을 꿈꿨다. 커다란 요리사 모자를 쓰고 호텔 주방을 지휘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소년이 조금 다른 길로 가길 원했다. 둘은 갈등했고 오랜 고민 끝에 방법을 찾았다. 호텔에서 일하되 주방이 아닌 호텔 전체를 공부하기로 했다. 소년은 호주에서 호텔경영을 공부했다. 주중에는 학교에서, 주말에는 설거지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시간이 지나 소년이 청년이 되어 한국으로 넘어왔을 때, 그는 운 좋게도 커다란 호텔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처음 꿈꾸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주 즐겁게 일했다. 청년에게 호텔은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다양한 직업과 연령, 인종이 모인 곳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자신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곳의 총지배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는 단지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하는 것이 좋았다.
“호텔에는 두 명의 공식적인 버틀러가 있었어요. 일종의 집사 개념으로 주로 해외 귀빈을 상대했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 미래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했어요. 매일 아침 출근해서 처음 하는 일 역시 눈을 감고 내일의 저를 그리는 거였어요.”소년이 청년이 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회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오르기까지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곳에서 그는 조금 다른 꿈을 꾸기로 했다. “처음 호텔을 떠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어요. 세계적인 호텔, 좋은 부서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데 어째서 떠나려고 하는지 걱정했죠. 그때 제 마음속의 90퍼센트는 두려움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실함으로 매일같이 계획을 세우고, 조언을 구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했죠. 그러자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는 산방산이라는 신비의 장소를 마주한 후 어떤 확신을 느꼈다고 했다. 이곳이라면 매일같이 일기장에 적은 소년의 꿈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과의
특별한 만남
다시 시간을 돌려 나는 어제 남자를 만난 첫 번째 밤으로 돌아간다. 그는 아주 편한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다. 살면서 한번은 그런 고상한 취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는 어떤 닮고 싶은 삶의 한 부분을 가진 듯 보였다. 그때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노라고 고백하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니, 음악 자체를 잘 듣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네요.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에 관해서는 저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했다. “호텔에서 일할 때 한 장면을 기억해요. 매일같이 호텔에 오던 노부부가 있었어요. 그들은 투숙객도, 그렇다고 여행객도 아닌 차림으로 호텔 카페에 앉아 커피를 즐겼죠. 보기 좋더라고요. 몇 번 지켜보다 말을 걸었고, 나중에서야 그가 아주 유명한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팔순이 넘은 노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상파 화가 윈저 씨였다. 그는 제주의 풍광을 그리며 자신의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작가는 남자의 가족을 초대했고 그들은 나이를 뛰어넘는 친구가 되었다.
작가의 그림은 남자에게 아주 커다란 영감을 줬다. 따뜻함과 묵직함, 다채로운 색감이 남자를 사로잡았다. 둘은 자주 대화하며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몇 시간이고 미동도 없이 음악을 듣는다는 말에 한번 따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저 역시 그를 닮고 싶거든요. 편안하더라고요. 가만히 눈을 감으면 그가 느꼈을 감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소년의 표정이 떠올랐다.남자는 연암재의 뜻이 ‘인연을 맺는 집’이라고 했다. 인연이라는 게 단순히 스쳐가는 것만이 아니라 각자의 한 부분을 허물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데 있다면, 연암재 역시 사람과 공간이 서로를 비우고 다시 빈 자리를 채우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남자는 덧붙였다. 느림과 쉼, 사색,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라는 것. 우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카페 바깥으로 경운기 소리가 요란했고, 고개를 돌리자 이웃에 사는 농부가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아주 천천히 길을 지나고 있었다.
연암재를
이루는 것들
윈저하우스& 스톤빌하우스
쌍둥이 구조의 독채 두 채에는 각각 다른 화가의 그림이 걸려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머물던 것처럼 적당한 온도와 창문 밖 풍경이 조화롭다. 밤이면 검은 하늘을 지붕 삼아 목욕을 즐길 수 있다.
옥상 공간
주변 건물이 높지 않아 건물 2층의 옥상 공간에만 올라도 전혀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멀리 산방산이며 유채 꽃밭이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와인하우스
와인 저장고가 있는 공간으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개방했다. 손님과 주인이 취향을 공유하며 새로운 인연을 맺기도 한다.
카페 윈저
화가 윈저와의 인연으로 카페 이름을 지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재즈 공연을 진행하는데, 시골 마을 작은 연주회에는 여행자와 동네 주민이 함께 어우러져 시간을 보낸다.
연암재
A.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북로 76
H. blog.naver.com/yeonamje
T. 010 9662 3030
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