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방 관찰기

영화

남의 방 관찰기

트레일러에 사는 여자와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사는 남자

영화 <나 없는 내 인생My life without me>

영화 속에서 방은 그저 배경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야기 진행의 결정적인 장소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생활이 낱낱이 묻어있는 공간이기에 스크린으로만 짐작할 수 있는 주인공들의 소중한 물건, 사소한 습관이 우연히 드러날 때도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자와 사랑에 실패한 측량 기사, 둘의 방엔 무엇이 있었을까.

앤의 방

결혼은 가족이 생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 없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부부는 자연스럽게 한 침대에 눕고, 주방과 화장실과 거실을 같이 쓴다. 결혼은 공간의 공유인 동시에 개인 공간의 상실로 이어진다. 

앤의 집은 작은 트레일러다. 앤과 남편, 두 딸은 트레일러에 산다. 그리고 트레일러는 엄마의 집 뒷마당에 있다. 트레일러는 침대 두 개, 부엌, 뚱뚱한 티브이, 책상이나 식탁으로 쓰다 애들 옷을 갈아 입히기도 하는 작은 탁자가 전부다. 트레일러는 문대신 흔들리는 조악한 모양의 붉은 발로 구분된다. 집이 곧 방인 셈이다.

길어봤자 두세 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앤의 인생은 그 작은 트레일러와 닮았다. 일을 마치고 오면 잠든 남편의 옆자리를 힘들게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에도 편히 둘 수 없다. 그녀의 물건, 그녀가 하는 생각, 그녀 안의 불안, 둘 곳이 없어서 차마 가질 수 없는 꿈까지. 물론 그녀도 하염없이 달을 쳐다본다거나 몇 시간씩 파도나 석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열일곱에 아이를 낳은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그녀는 카페에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는다. 자신의 예정된 죽음을 모르는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딸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매년 들려줄 생일 축하 메시지 녹음하기, 남편에게 조신한 신붓감 구해주기, 가족 모두 해변으로 놀러 가기.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 적은 건 이런 것들이다. 담배와 술을 맘껏 즐겨보기, 내 생각을 말하기, 인조 손톱 끼워보기(머리 모양 바꾸기). 그리고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한 후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알아보기, 몸 바쳐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만들기.

리의 방

리는 측량기사다. 고속도로나 교각 등을 건설할 땅을 측량한다. 알래스카, 칠레, 노스캐롤라이나, 핼리팩스를 떠돌며 일했다. 앤은 가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그런 땅이다. 그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앤을 카페에서 처음 본다.

리의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 손님이 와도 가볍게 건넬 쿠키조차 없다. 책 몇 권과 스탠드만 바닥에 놓여있다. 누군가 이사 준비를 마친 집처럼, 버려도 상관없는 물건들만 남은 집처럼. 아무것도 없어서 방과 거실과 부엌의 구분조차 의미가 없다.

앤이 그의 집으로 처음 찾아온 날, 누군가 가구를 다 가져갔다는 그에게 말한다. “그 여자분이 다시 돌아올까 싶어서 가구를 안 들여놓으려는 거죠?” 가구조차 다시 들여놓지 못했던 리의 방에, 앤은 처음으로 들어와 방을 채운 사람이다. 둘은 책을 쌓아 의자로 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넓은 거실의 구석 바닥에 앉아 서로를 껴안는다. 그는 그녀를 안고 슬프고 아름다운 책을 읽는다. ‘그녀의 능력은 하나둘 사라지고 이제는 밤도 없고, 별도 없는, 그녀가 나갈 수 없는 지하실만이 남았다. 다른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지하실. 그녀는 약을 먹었지만 악화되기만 했고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잠시 동안 그들은 두려워졌다. 나도 두려워졌다.’ 

그녀는 죽기 전, 그에게 녹음테이프 하나를 남긴다. “벽 좀 칠하고 가구 좀 들여놓으세요. 알았죠? 다음에 만나서 집에 데려올 여자가 당신을 오해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당신을 알게 될 기회를 날리게 하면 어떡해요.” 리는 아무것도 없는 거실에서 혼자 페인트칠을 시작한다. 그녀 없는 그녀의 인생은, 그의 방에서 얇고 가벼운 모습으로 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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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