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연약하다. 어른에 의해 부서질 수 있지만, 같은 이유로 단단해질 수 있는 존재. 아이들은 선생이나 부모에게 줄곧 재능을 평가받는다. 옆자리 친구가 훌륭하다고 칭찬받는 모습을 보며, 이건 틀렸다는 지적을 받으며 좌절한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피아노를 덮고, 붓을 내려놓고, 연필을 부러뜨리고, 스케치북을 창고에 넣어두게 된다. 여기에 그런 일에 굴하지 않고 혹은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먼지 쌓인 창고의 문을 연 예술가들이 있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76세에 붓을 든 화가
미국인이 가장 아끼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는 그녀는 76세에 붓을 들었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거니와 이전에는 연관 없는 일을 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에는 가정부로 일했고, 커서는 농장 생활을 하며 자수를 놓았다. 관절염으로 바늘을 잡기 어려워지자 그녀는 붓을 들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어느 수집가의 눈에 띄었고, 80세에 개인전을 열었다.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고 93세에는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모지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76세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천천히 하세요. 때로 삶이 재촉하더라도 서두르지 마세요.” 따스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그녀의 그림과 삶은 많은 이를 감동시켰고, 100번째 생일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지정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그녀를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로 칭하기도 했다. 76세부터 101세까지 그녀가 남긴 작품은 총 1,600여 점이다.
빌 에반스 철저한 노력으로 자유를 노래하는 재즈 피아니스트
1929년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서 태어난 빌 에반스는 교회에서 첫 음악 교육을 받았다. 빌 에반스의 어머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고, 덕분에 여섯 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음악을 곁에 두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고, 피아노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플루트를 함께 배웠다. 체계적인 배움을 통해 고전적인 음악을 해석할 줄 알았지만, 즉흥 연주는 그의 재능이 아니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평가되는 그가 즉흥 연주를 할 수 없었다니. 빌 에반스는 철저히 노력하고 연습했다. 초기에는 정확히 악보대로 연주하다가 곡을 하모나이즈(화음화) 하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익히면서, 조금씩 자유로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춤추듯이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면 ‘타고났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든 피아니스트에게도 피아노를 처음 만지던 날이 있었다.
야나세 다카시 호빵맨을 그린 아저씨 만화가
호빵맨 이야기는 다정하고 희망이 넘친다. 동심을 잘 읽어낸 이야기나 그림만 보면 젊은 만화가가 그렸을 거라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50대 아저씨가 그렸다. 호빵맨을 만든 아저씨는 야나세 다카시다. 1919년에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전쟁이나 여러 여건 때문에 그림만 그리며 살 순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빼어난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좋아했다. 그러나 훗날, 공예학교의 도안과에 입학하니 솜씨 좋은 학생들이 사방에 넘쳐났다. 만화가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 몇 번이고 자신감을 잃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그는 도쿄의 백화점에서 일하며 부업으로 만화를 그렸다. 호기롭게 만화가로 독립한 뒤에도 무명 시절이 길었기에 방송작가, 작사가, 시인 등으로 일해야만 했다. 50대가 되어서야 호빵맨을 그릴 수 있었고, 그 작품이 애니메이션이 되었을 때는 70대 할아버지였다. 호빵맨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떼어준다. 그가, 젊고 촉망받는 만화가였다면 그릴 수 없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박완서 아이들이 잠이 든 뒤에 글을 쓴 소설가
어린 시절의 재능을 둘째로 치더라도 성인이 되어 뭔가를 시작하면 ‘전공’ 운운하며 텃세를 부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늦게라도 뭔가를 시작해보고 싶을 때, 심심찮은 위로가 되어주는 작가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박완서. 그녀가 작가로 데뷔한 나이는 40세였고 그때 직업은 전업주부였다. 당선작인 《나목》은 박완서가 처음 쓴 소설인데, 당시 기자가 집으로 찾아가 “당신이 썼다는 걸 증명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기자에게 집필 메모를 보여주던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배운 사람만 뭔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지 않은 사람이 뭔가를 만들었을 때는 더 날카로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나더러 습작을 안 했느냐, 왜 습작기가 없었느냐 한다면,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나이 들어 글 쓰는 게 부끄러웠던 그녀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거나 잠이 든 뒤에 틈틈이 소설을 썼다.
앤디 워홀 가난의 시절에서 영감을 얻은 화가이자 영화제작가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인 앤디 워홀.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 예술 전반에서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전설’로 통했으며 죽은 뒤에는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불린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캠벨 수프’는 그의 유년에서 시작된다. 어릴 때 수없이 캠벨 수프를 그려봤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앤디 워홀은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도시의 소외된 빈민 구역에서 기죽은 소년으로 자랐고, 류머티즘 무도병에 걸려 병상에 있기도 했다. 오랜 시간 침대 생활을 했고 그때 곁에 있어 준 사람은 엄마였다. 그 시절, 워홀의 엄마는 저렴하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캠벨 수프를 자주 먹였다. 앤디 워홀은 그 기억으로 훗날 ‘캠벨 수프’ 연작을 발표한다. “대통령도 나와 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현대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이 대중에게 갖는 의미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영재 교육을 받은 아이였다면,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장 자크 상뻬 차가웠던 기억 위에 따뜻함을 입힌 삽화가
재치 있게 인간의 삶 이야기를 그려내는 삽화가 장 자크 상뻬. 그가 들려주는 따뜻한 이야기나 작품과 달리, 그의 어린 시절에는 따뜻함이 깃들 틈이 없었다. 장 자크 상뻬는 자기 자신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행위를 ‘자기 치유의 한 형태’인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주정뱅이 의붓아버지와의 어려운 관계, 소란스럽게 싸우던 부모님 모습, 매일 얻어맞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생의 한편에 남아있었다. “언제나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좌우간 잃어버린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떠오르죠. 정원에서 나던 향기, 화초에 물 줄 때 나던 향기 같은 후각적인 기쁨이 있을 테고, 또 이제는 나이가 들었다는 놀랍고도 근사한 감정이 있을 수 있죠. 어떤 시기에는 어린아이였는데 나이가 들었다니, 참으로 묘한 감정이 생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것들에 왜곡된 행복의 옷을 입힌다고 나는 확신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걸요.” 비참한 순간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는 그림의 시작이 슬픔에 있다는 사실은 보는 이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