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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여행을 싫어하던 하정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독일 베를린으로 향하는 장거리 버스 안에서 한 사람을 만난다. 코펜하겐에서 나고 자란 그의 이름은 쥴리. 단 여덟 시간의 대화 동안 둘은 서로의 주파수가 비슷함을 알아챈다. 하정의 영어 이름 ‘썸머’를 다정하게 부르던 쥴리는 머나먼 타국에서 온 낯선 여행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웃음기를 머금은 눈빛에 홀린 듯, 다시금 길을 돌아간 하정. 쥴리와 그녀의 부모인 아네뜨와 옌스, 할아버지 어위의 이야기까지 한데 품은 이국의 친구 집을 노크해 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모르던 이의 집에 하정은 들어섰다. 낯선 나라 덴마크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내려둘 곳이 된 쥴리의 집. 나무로 된 마룻바닥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를 내고, 거대하고 두꺼운 책장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쥴리의 집에 놓인 물건들의 출처를 물으면 그 이야기는 혼자에서 그치지 않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친척의 가구를 얻어 오거나, 부모님이 플리마켓에서 산 물건을 졸라서 가져오기도 했다고. 무엇 하나 쉬이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로 저마다 장면이 깃들어 있다.
내가 머무는 공간을 내어준다는 건 나의 일상을 나누겠다는 의미와도 같다. 하정은 쥴리가 쓰던 숟가락과 접시, 치약과 샴푸를 얻어 쓰고, 그가 밑줄 그은 책을 이어 읽기도 했다. 쥴리라는 사람의 한 조각을 이루었을 이들이 궁금해지는 찰나, 쥴리가 말했다. “썸머, 네가 우리 엄마를 만나보면 정말 좋아할 거야.” 당시 귀국을 앞두고 있던 하정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고, 같은 향이 폴폴 나는 두 사람은 헬싱괴르Helsingør라는 소도시에 자리한 부모님 댁으로 향한다. 동네에서 가장 높고 울창한 참나무가 있는 집. 나무로 만들어진 현관문을 밀자마자 누군가가 보인다. 반짝이는 은발에 빨간 안경테 너머로 파란 눈동자가 보이는 그 사람은 아네뜨, 쥴리의 엄마였다. 걸을 때마다 움직임에 맞춰 부드럽게 흔들리는 단발의 아네뜨는 사근사근 대화를 나누면서도 손에서 뜨개감을 놓지 않았다. 두어 시간의 티타임 동안 하정은 다짐한다. 친구와 친구의 가족을 기록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떠나기로.
“하이, 썸머?” 첫 만남을 가진 지 일 년쯤 지난 후의 여름, 다시 만난 아네뜨는 여전히 조곤조곤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아네뜨의 남편 옌스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쥴리의 친구를 위해, 거품 목욕을 마친 캠핑카를 내어줬다. 부엌이며 화장실, 작은 책상이 있는 데다가 무려 70년대 빈티지 모델이라니! 오래된 것과 그 안에 잠든 이야기를 좋아하는 하정은 아늑한 캠핑카와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시간을 품은 것을 사랑하는 건 쥴리네 가족도 마찬가지. “여긴 그동한 변한 건 없단다. 아, 이것만 달라졌을 거야.” 처음으로 이 집에 왔을 때 티타임을 나누던 소파가 새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헌 소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아네뜨는 집에 새것이 들어온다는 이유만으로 괜히 헌것을 쫓아내지 않으니까. 버려지는 것은 최소한으로 두고, 뜨개와 바느질을 통해 자투리 물건의 새로운 쓰임을 발견한다. 그렇게 헌 소파의 줄무늬 패브릭도 정원 의자의 커버로 썼다가, 다시 떼어내 캔버스 가방이 되며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다시 찾은 손님에 반가운 기색을 내보이던 아네뜨는 곧이어 복슬복슬한 무언가가 가득 담긴 커다란 수납함을 가져왔다. 안에 있는 건 직접 만든 양모 가방인데, 넉넉하게 둥근 모양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하정의 눈에는 곰돌이 푸가 좋아하던 꿀단지와 비슷해 보여 ‘허니쟈Honey Jar’라 부르곤 했다고. 만드는 과정이 꽤 지난한 탓에, 아네뜨는 여든 번째 허니쟈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만들지 않을 거라 선언했고 하정과 다른 가족들은 그 마지막 매듭을 축하했다. 이후로도 지하와 거실을 넘나들며 커트러리와 골동품, 가구와 책을 둘러보던 하정에게 쥴리가 수납함에서 간직하던 천 하나를 건넸다. 1981년부터 2014년까지, 아네뜨가 무려 33년간 수를 놓았다는 천에는 쥴리와 동생 니나의 이름과 생일, 과일과 동물, 학교 그림 등이 새겨져 있다. 덴마크의 엄마들은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혹은 자라날 아이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며 탄생 자수를 놓는다고. 자수에 넣을 모티브를 연습용 천에 여러 번 수놓았다는 아네뜨에게서 여태 바래지 않은 따뜻한 애정을 마주한다.
옛 물건이라고 해서 먼지가 풀썩이고 빛을 잃은 골동품만 떠올린다면 아쉽다. 물건들은 저마다 현재를 사는 이의 취향이 더해져 새로운 색을 띠고 있으니까. 할머니가 쓰던 커프스 단추는 목걸이용 펜던트가 되어 쥴리의 출근용 정장에 매치되고, 할아버지가 쓰던 쟁반은 쥴리가 해변에서 주운 조약돌을 끌어안고 창가에 놓여 있다. 이 집은 쥴리를 이루는 한 조각인 아네뜨 그리고 아네뜨를 이루는 한 조각인 어위를 담고 있는데, 아네뜨의 아버지인 어위는 유려한 디자인 제품을 만든 산업 디자이너였다. 물병과 커트러리, 패턴과 벽지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작품뿐 아니라 만드는 과정에 남긴 기초 스케치나 아이디어 메모도 여전히 집에 남아있다. 모녀는 하정이 가족의 흔적을 마음껏 둘러보도록 허락했고, 하정은 예술가의 흔적을 탐구하는 태도로 어위의 물건에 좀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들였다.
체류 도중 생일을 맞은 하정에게 쥴리는 불쑥 선물을 건넸다. 덴마크 여왕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종이 인형 놀이, 시간이 부족해 한 짝밖에 만들지 못한 파란 양말 그리고 어위의 유품인 연필 상자였다. 새것처럼 완벽한 상태의 종이 상자 안에는 노란 연필 열 자루가 들어 있었다. 1930년대의 근사한 디자인과 어위가 작업하던 나날이 하정의 손에 놓인 것이다. 이어진 쥴리의 말과 함께. “아, 세 자루는 쓴 흔적이 있더라. 할아버지가 쓰시고 넣어 두셨을 거야.” 행여 귀한 연필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평범한 이방인에게 와 버리는 건 아닐까, 한 가족의 의미 있는 유산을 연거푸 사양하는 하정에게 쥴리는 덧붙였다. “할아버지도 네가 갖기를 원하실 거야.”
에디터 이명주
자료 제공 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