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디제이에게

잠을 청하기 전, 라디오를 듣고 말하던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끝내는 못다 한 이야기를 꺼내둔다.

화자의 기억

라디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다 늘어진 테이프와 개구리 라디오다. 우리 집에는 언제나 라디오가 있었지만, 그걸 우리 것이라고 하기에는 엄마와 아빠의 취향으로만 재생됐다. 그러다 나와 동생을 위한 ‘우리’ 것이 생겼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개구리 라디오’였다. 볼륨과 주파수를 조절하는 장치가 마치 개구리눈처럼 달려 있기에 붙여진 별명인데, 둥그런 몸체에 주파수 화면도 묘하게 입 모양처럼 생겼다. 영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라디오를 사준 거라는 엄마의 말에서 앞부분은 쏙 빼버린 나와 동생은 새로운 놀거리 등장에 마냥 신났다. 하릴없이 심심한 저녁, 하루는 개구리 라디오에 빈 테이프를 넣고 녹음 버튼을 눌러 아아오오, 의미 없는 단어들을 반복했다. 이어 재생 버튼을 누르니 완전히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눈을 동그랗게 뜨던 우리는 “사람 목소리가 내 귀로 들을 때랑 남의 귀로 들을 때가 다르대. 그래서 그런 가봐.”, “그럼 어떤 목소리가 진짜인 거야?” 하며 진지한 고민을 나눴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라디오 디제이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동시에 맞추려면 버튼을 누른 후, 손으로 셋까지 숫자를 세야 했다. 아무도 사연을 보내지 않았고, 아무도 신청 곡을 써주지 않았지만 모든 것은 나와 동생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럴싸한 사연을 즉석에서 지어내 보고(물론 전날 들었던 라디오의 사연을 베끼기도 했다.)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대화를 주고받다가, 녹음된 걸 다시 들으며 방 안에서 킥킥 웃곤 했다. 찬장 한 칸을 채우던 새 테이프들은 앞뒤로 녹음되고 연필로 감아서까지 써버린 후에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우리의 라디오는 자연스레 막을 내렸다. 나는 그때의 가짜 디제이들을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작은 라디오를 가운데 둔 채 팝콘 같은 웃음을 터뜨리던 그때를.

청자의 기억

그 이후의 기억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을 내려놓은 채 차려진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가족들과 웃다가도 텔레비전 옆에 걸린 시계를 살피다가, 시곗바늘이 정각과 얼굴을 비빌 기세가 보이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다 말고 어디 가?” 엄마의 물음에는 할 게 남았다는 대답으로 대충 둘러댄다. 좋아하는 가수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듣는다고 하면 될 텐데, 같은 시간에 같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혼자 방으로 쏙 들어가는 모습이 열성적인 애정 같아 부끄러웠다. 중학교도 입학하지 않았을 때니, 주변에 나만큼 라디오를 열심히 듣는 친구들이 없는 것도 머쓱한 이유 중 하나였다. 책상에 앉아 잔뜩 꼬인 줄 이어폰을 열심히 풀고 MP3 플레이어에 꽂았다. 나한테는 미키 마우스 모양의 작은 MP3 플레이어가 있었는데, 액정이 없다 보니 재생 목록에서 라디오로 채널을 옮길 때뿐 아니라 주파수를 맞출 때도 감각의 가늠이 필요했다. 

주파수의 늪에서 헤매던 것은 단 며칠, 노련한 손동작으로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면 소란스러운 CM은 끝나고 익숙한 오프닝 음악이 시작됐다. 슬그머니 미소를 흘릴 때쯤 어김없이 반가운 목소리가 인사를 건넨다. 그 시절 나에게는 라디오가 또렷한 행복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한 사람이 찾아와 안겨주는 선물이 기쁘지 않을 리 없으니까. 신청 곡을 보내라는 말은 어찌나 설레던지, 다음 날 또 만날 걸 알면서도 클로징 멘트는 어찌나 아쉽던지. 하루 끝에서 이름 모를 청취자들과 함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 밤의 문을 여는 디제이는 항상 오늘의 안부를 물었다. 기분 좋은 하루였다면 라디오를 들으며 그 여운을 이어 나가길, 아쉬움이 박히는 하루였다면 노래를 듣고 툴툴 털어내길 바란다는 말도 함께였다. 나의 다정함은 조곤조곤 전하는 마음을 듣던 그때에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밤의 세상을 유영하던 대화를 떠올리며, 나의 기억을 차지한 세 명의 디제이에게 부치지 못할 사연을 털어 둔다.

디제이
타블로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타블로 디제이에게 안부를 물어요. 당신을 알게 된 건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을 즈음과 비슷해요. 그때 저는 아직 한참 어린 학생이었는데요. 위로 형제가 있는 동생들은 언니나 오빠가 보고 듣고 즐기는 것들이 좋아 보이기 마련이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언니들이 듣는 에픽하이의 노래 몇 곡을 곁에서 맴돌다가 따라 듣고,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다가 앨범 전체를 찾아보기도 했어요. 가사를 외우고 에픽하이가 출연한 방송을 이것저것 챙겨 보다 마침내 라디오까지 닿게 된 거죠.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 그러니까 ‘꿈꾸라’와 이어진 소소한 추억들도 떠오르네요. 공부하는 척 몰래 듣다 보니 문제집을 풀다가 킥킥 웃음을 터뜨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슬쩍 옆을 보면 몰래 같은 라디오를 듣던 동생도 웃음을 참고 있었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은 동시간대에 방영하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 이야기를 하는데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인 적도 많아요. 꿈꾸라를 들으면서 듣는 이에게 다정함을 전하는 방법을 알게 됐어요. 당신은 오프닝 멘트에서 하루의 기분을 묻는다면 클로징 멘트에서 듣는 이의 꿀 같은 잠을 빌어주잖아요. 매일 말하는 인사 덕분에 나의 사위를 둘러보고 밤을 부드럽게 매듭지은 후 잠을 청할 수 있었어요.

타블로 디제이도 어릴 때 라디오를 많이 들었죠? 음원 사이트도 없었고 음반이나 테이프를 맘껏 살 수 없었던 때라, 좋아하는 뮤지션의 노래를 들으려면 내내 라디오를 틀어놓고 기다려야 했다고요. 우연히 기다리던 노래가 나오면 기적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는데, 그 마음을 청취자에게 선사하는 디제이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던 게 기억나요. 그 기적에는 라디오의 화자와 청자가 내밀한 마음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연결되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네요. 사연을 읽고 전하는 위로가 한 사람에게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엇비슷한 모양의 고민을 가진 모든 이에게 닿잖아요. 당신의 한 마디에 따뜻한 다독임을 받았던 청취자로서, 진심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라디오에서는 언제나 마지막에 타블로 디제이가 직접 쓴 짧은 글을 ‘블로노트’라는 이름으로 선물해 주었죠. 지금 떠오르는 블로노트를 하나 적어 볼게요. “영원한 건 없다지만 잘 생각해 보면 영원하지 않은 것도 없잖아.” 언젠가 디제이로 다시 안부를 물어주세요.

디제이
타카무라 미소노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잘 지내고 있나요? 미소노 디제이의 팟캐스트 <귀에 맞으신다면お耳に合いましたら。>을 무척 재미있게 들은 청취자예요. 미소노 디제이는 체인점 음식을 먹고 맛의 감상과 자신의 에피소드를 아울러 전하고 있죠? 어떤 음식이든 그 향을 맡는 순간, 팟캐스트를 진행하던 평범한 방이 가게 한복판이 되는 상상도 하고요. 저는 무엇보다도 방송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기억에 남아요. 당신은 좋아하는 작가의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었죠.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말로 남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마음이 무뎌져 버린대요. 한마디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입 밖으로 오랫동안 꺼내지 않으면, 감동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마음이 무엇을 좋다고 느끼는 감정조차 없애버린다는 거죠.” 여기다가 결국 좋아하는 마음이 죽어버린다는 충격적인 말까지. 깜짝 놀란 미소노 디제이만큼이나 저도 겁에 질렸답니다. 좋아한다는 건 겉으로 내뱉기에는 쑥스럽고 귀가 빨개질 것만 같아서 마음속으로 간직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마음을 절대 죽이지 않으려 말 밖으로 꺼내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어요. 이 편지도 그 노력 중 하나고요.

그러고 보니 미소노 디제이도 라디오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화자가 되었죠. 즐겨 듣던 방송을 녹음해 둔 테이프와 이런저런 굿즈들을 틴 케이스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요. 게다가 대학에서는 절친한 친구 카스미랑 단 둘뿐인 라디오 동아리를 꾸리잖아요(웃음). 트러플 소금맛 프렌치프라이를 먹으면서 라디오 기획을 짜고, 종이 상자 부스로 들어가 휴대폰을 마주 본 채로 녹음하고요. 저의 어릴 적 추억이 겹쳐 보여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어요. 그뿐인가요? 녹음한 방송을 세상에 내보인 적도 없고, 바라던 라디오의 세계를 업으로 삼지 않는 모습도 닮았어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좋아하잖아요, 라디오를. 어쩌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무언가를 오래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네요. 이런 생각을 북돋아 주고 함께 고민해 줄 사람이 미소노 디제이라서 행운을 얻은 기분이에요. 좋아하는 것을 순수하고 반짝이는 솔직함으로 전하는 당신이라서요. 또 한 번 맛있는 음식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디제이
배미향에게

미향 디제이에게 인사를 건네게 되어 기뻐요. 우리 집 거실에는 오래된 시디플레이어가 있는데, 라디오를 곧잘 틀어둬요. 채널은 단 하나, 엄마와 아빠가 사랑해 마지않는 당신의 라디오죠. 그러니까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는 아주 오래전부터 해가 사그라드는 시간이 되면 우리 집 문을 두드렸던 거예요. 엄마는 집에서, 아빠는 퇴근길에서 이 라디오를 듣는데 한번은, 결혼기념일에 아빠가 미향 디제이의 목소리를 빌려 메시지를 전한 적 있어요. 집에 와보니 선물로 도착한 빨간 호접란처럼 엄마가 발그레한 얼굴로 웃고 있던 날이지요. 아빠에게 “저녁스케치 들어봐.”라는 문자가 도착한 후 조금 지났을까, 엄마에게 고맙다는 아빠의 담백한 문장이 들렸고 그 후 결혼기념일 사연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함께 그날을 떠올려요.

당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마치 융단 같다고나 할까요?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차분하고도 나긋하면서 낮을 수가 있구나, 생각하면서 자꾸만 따라 읊조려 보았어요. 아무리 해봐도 제 목소리는 가볍게 여기저기로 튀어 나갈 뿐이지만요. 미향 디제이의 방송은 집이 아니라 퇴근길 버스 안에서도 자주 만나요. 하루를 잘 마쳤다는 신호 같아 포근하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지켜봐 주는 것 같아 마음이 곧아져요. 그도 그럴게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는 올해로 23주년이잖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음악감상실에서 우연히 임시 보조 디제이를 맡게 됐는데, 처음에는 선곡만 하다가 우연히 멘트를 한 뒤 반응이 좋아서 아예 정식 디제이가 됐다고 들었어요. 이후에는 방송국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제작 PD 겸 디제이로 이 방송을 꾸리게 됐고요. 아마 그 사람들도 미향 디제이의 보드라운 목소리를 잊지 못했던 모양이네요. 게다가 올드 팝송과 샹송, 칸초네, 라틴 음악 등 장르를 넘어 선곡하는 노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람이 많은 버스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고 당신이 골라준 노래를 듣다 보면 스르르 창문에 머리가 기울어 닿아요. 잔뜩 움츠러든 마음을 살살 풀어주는 기분이 들죠. 서툰 외국어로 제목을 알아듣지 못해도 음악이 전하는 온기만은 또렷하답니다. 미향 디제이가 그려주는 저녁을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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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명주

일러스트 추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