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떼 써본 적 없는 아이였다. 갖고 싶은 인형을 만나도 “비슷한 게 있으니 그냥 가자.”라는 엄마 말에 순하게 “응, 알았어.” 했다. 남자친구를 사귀거나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려고 외박하지 않는 ‘착한’ 딸로 중고등학교 시절이 갔다. ‘착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착해주는’ 일임을 머리로 알게 된 후에도 스스로 착한 삶, 내 욕망을 우선하는 선택은 여전히 어려웠다. 회식 술자리에서 추근대던 상사에게 선명하게 싫다고 말하지 못했고, 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간다는 그에게 욕이 아니라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덕담을 남겼다. 그렇게 어중간하게 착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욕 좀 먹더라도 소리 빽- 지르며 욕망대로 살아보고 싶던 그때, <레이디 맥베스>에서 제대로 나쁜 년, 캐서린(플로렌스 퓨)을 만났다. 여성은 긴 원피스 안에 반드시 코르셋을 해야만 했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캐서린은 농장주의 아들에게 팔려 간다. 결혼식 날, 캐서린은 면사포 속에서 처음 본 남편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규율보다 자신의 호기심에 충실한 캐서린의 매력이 처음 드러나는 장면이다. 첫날밤, 캐서린은 앞으로 집에만 있으라는 남편의 말에 “저는 바람도 쐬고 싶고 바깥 구경도 하고 싶은데…” 대꾸해보지만 그는 입 닫고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할 뿐이다. 교감할 생각이 없는 그는 캐서린을 물건처럼 세워두고 자위한다.
기쁨 없는 밤들이 지나고, 캐서린이 드레스 속에 갇혀 시들어가던 어느 날, 그녀의 눈에 야생마 같은 하인 세바스찬이 들어온다. 하녀를 매달아 놓고 무게를 재며 희롱하던 그에게 “나는 몇 파운드나 나갈까?” 캐서린은 묻는다. 그 도발에 도발로 응대하듯 그는 주인마님을 번쩍 들어 올린다. 지루한 일상의 장막을 훅 걷으며 들어온 세바스찬과 그녀는 짐승처럼 서로를 탐하기 시작한다. 규율과 도덕을 무시한 그들의 폭발은 아슬아슬한 냄새를 피워올리고, 사실을 알게 된 시아버지는 벌 받을 준비를 하라지만 그녀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며 대든다. 그리고 그를 독살한다. 이 첫 살인을 시작으로 그녀의 욕망은 폭주한다.
영웅의 역할인 남성을 보조하거나 순응하는 여성 캐릭터가 넘치는 중에, 캐서린은 독보적 악녀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자신을 창녀라며 모욕하자 그가 보는 앞에서 세바스찬을 벗기더니, 싸움을 붙여 남편마저 죽인다. 살인이라는 죄 자체를 옹호할 수는 없으나 화병의 꽃과 같은 운명 앞에 캐서린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사랑 없이 영혼이 시들어 죽거나, 불륜 죄로 목매달려 죽거나, 아니면 내가 먼저 죽이는 것뿐. 블랙홀처럼 모든 방해물을 삼켜나간 캐서린은 끝내 살아남기 위해 세바스찬마저 배신한다. 대저택에 홀로 남은 그녀의 뻥 뚫린 눈빛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여성을 옭아매는 창살에 온몸을 내던진 이 맥베스 부인을 닮아보고 싶다면 위험한 생각일까. 대를 이을 생각은 안 하고 바람이나 피우냐는 시아버지에게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 속엣말을 쏘아붙이는 당돌함, 언제나 자신을 버려두었으면서 이제는 ‘창녀’라 욕하는 남편 눈앞에 정부를 데려오는 그 맹랑함, 세바스찬을 잡아먹을 듯 탐하던 붉은 입술, 욕망의 폭풍이 지난 뒤 형형하던 그 마지막 눈동자까지. 지옥에서마저 ‘사랑한 것이 죄가 되냐’며 웃을만한 이 악녀를.
We Around Project 영화 속 그녀들을 말하다
에세이《혼자서도 일상이 로맨스겠어》(2019, 새움출판사)를 썼습니다. Humans of Seoul 인터뷰어, MBC 다큐스페셜 취재 작가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화제 스태프로 일하며 ‘글로 나와 타인을 위로하며’ 살고자 합니다. 다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삶의 태도를 배워왔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혹은 애달파서 응원하는 영화 속 여자들을 만나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