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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중세의 시간 속’에 있다
겨울의 끄트머리, 마지막 추위가 위세를 떨칠 무렵 나는 프랑스에 도착했다. 남편을 따라 프랑스에 아주 살러 온 참이었다. 한국처럼 코끝이 아린 추위는 아니지만 음산한 기운이 뼛속까지 전해져 왔다. 흐리고 무거운 대기가 두통을 유발했다. 그 무렵 남편은 나를 데리고 로드 트립을 자주 다녔다. 이렇게 해서라도 우울해지는 걸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남편의 속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차를 몰고 주로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애써 복잡하고 굽이진 산길을 택해 마음에 내려앉는 풍경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달렸다.
론 강Le Rhône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고대 로마의 도시 비엔Vienne을 지나 S자로 꺾어진 국도를 조금 달리다 보면 비탈진 산에 빼곡히 펼쳐진 포도나무를 만나게 된다. 부르고뉴Bourgogne의 광활한 평야에 포도나무들이 지평선을 이루는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높은 곳에 차를 세우고 포도밭을 조심스레 거닐어본다. 깊은 잠을 자던 지난겨울의 포도밭과 달리 덜 여문 연두색 포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조금 더 먼 곳을 응시하자 산골짜기 틈으로 우리가 달려온 길이 마치 바느질 자국처럼 나 있다. 그 자국을 따라가면 회갈색을 띤 건물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13세기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말리발Malleval이다.
해가 질 무렵, 어스레한 하늘에 나트륨 등이 하나둘씩 켜지면서 고독의 감정을 배가시키던 지난겨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햇살 아래 빛나는 포도밭과 어우러진 마을이 여전히 투박함은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근처에 차를 세우고 암석과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향해, 아득한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특한 지형 탓에 오래전부터 ‘나쁜 골짜기Mauvaise vallée’라 불리던 말리발은 이끼가 뒤덮인 암석과 울창한 수풀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갑자기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을 한 듯한 느낌이 든다. 시간 개념이 사라진 이 마을에서 무엇을 더 보겠다고 서두르는 건 아무 의미가 없기에 천천히 작은 길을 따라 거닐었다.
이 마을에는 12세기에 지어진 성터나 오래된 교회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있지만, 그중 내 관심을 끈 것은 소금을 저장하는 집Grenier à Sel이었다. 지리적 여건상 바다와 거리가 멀고, 음식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 년치 소금 가격이 한 달 월급과 같았다고 한다. 창문을 열면 수풀이 울창한 골짜기가 바로 보이는 이 집이 매물로 나와있는 것을 보고 남편과 나는 잠깐 망설였다. 16세기에 지어진 집이지만 돌로 건축해 단단하고, 근처에 콩드리외Condrieu나 생조제프St. Joseph 같은 좋은 와인이 생산된다는 것은 충분히 우리 부부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였다. 그러나 늘 소음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자란 내가 이 마을의 고요함을 견딜 수 있을까. 특히 겨울날 박모薄暮의 풍경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적막의 한가운데 오롯이 서있는 기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말리발의 그런 풍경들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외롭지만 어딘가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완전한 나 자신으로 서있어도 될 것만 같았다.
오르막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이상한 조각이 붙은 집 한 채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뼛조각으로 추정되는 조각 네 개가 벽에 깊이 박혀있다. 이상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고. 이 집의 이름은 ‘Maison du Pendu’, 즉 ‘교수형을 받은 사람의 집’이란 뜻이다. 오래전 이 마을에서는 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을 형에 처하기 전에 잠시 이 집에 가두어 놓았다가, 산꼭대기에 데려가 목을 매달았다. 죄수들은 말리발의 산길을 걸으면서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데, 이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교수형에 처한 후 뼈의 일부를 가져와 집 외벽에 붙여놓았는데, 이는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중세 시대의 무거운 분위기와 마녀사냥이 연상되면서 그로테스크함을 더했다.
말리발은 14세기에 최고의 번성을 누렸지만 1574년 종교전쟁 이후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유럽 전역에 퍼진 흑사병으로 마을은 점차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돌로 지은 300여 개의 집들과 성은 이제 그 일부만 남아 과거의 찬란하던 때를 그저 반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소금을 보관하고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을 집은 텅 비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고, 일부는 여름 별장으로, 또 오래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한 공간으로 그렇게,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깊은 골짜기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도시의 것보다 짧고 강하다. 마을에 일찍 어둠이 찾아오고 사람들의 자취가 사라지면 말리발은 그제야 자신의 온전한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깊고 아득한 이야기를… 고개를 들어 골짜기 너머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느새 검어진 거대한 여백 위에 구름은 하얀 포말을 그려놓았다.
말리발
Malleval
11세기부터 자리 잡은 오래된 마을로 고풍스럽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돌로 쌓아 만든 벽채를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 북부 ‘론 지역 3대 와인’으로 꼽히고 있다.
글 사진 정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