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단단한 사람

박유림―배우

<드라이브 마이 카>(2021)의 유나는 존재만으로 단단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말없이 가장 와닿는 메시지를 전하는 인물. 유나를 연기한 유림은 자신의 일부를 캐릭터 속에 차곡히 기록하며 유나와 함께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나아갔다. 그는 요즘 스스로를 향한 호기심으로 빼곡히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곧은 중심에 타인의 마음을 이끄는 ‘비밀’을 숨겨놓은 사람, 배우 박유림을 만났다.

인터뷰 장소로 ‘커피사’를 추천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장소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친구 소개로 우연히 들르게 됐는데 처음엔 입구가 숨어 있어서 여기가 맞나(웃음) 반신반의하면서 들어왔는데, 가만히 시간을 보내다 이 공간에 반해버렸어요. 처음 오는 곳인데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여기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커피사의 주인, 초록 언니와도 친해지고 싶었고요. 마침 함께할 사람을 찾으셔서 운 좋게 같이 일하게 됐죠. 커피사에서 1년 동안 함께했어요. 

 

연이 깊은 장소였네요. 1년 전이면 <드라이브 마이 카> 촬영이 끝났을 때인가요? 

맞아요. 일본에서 촬영을 마치고 막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어요. 일본에서는 한 달 정도 지냈는데, 아쉬운 마음이 가득할 때였어요. 믿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내다 왔거든요. 한 건물에서 다 같이 지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한 공간에 모여서 밥 먹고 대화도 많이 하고 잊지 못할 시간들이었어요. 촬영도 그랬지만 일본에서의 생활도 즐거웠고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일상의 연속이었어요(웃음). 

 

얼마 전에 미국에도 다녀왔잖아요. 아카데미 시상식은 어땠나요? 

너무 소중한 경험이었죠. 제가 평소에 동경하던 배우들과도 마주할 수 있었고요. 다녀오고 나서는 목표가 생겼어요. 연기를 하면서 큰 목표를 세운 적은 없었거든요. 원래 계획을 세우거나 목표를 정해 놓지 않고 상황에 맞게 움직이는 성향이기도 하고요. 이제는 명확한 목표가 생겼어요. 

 

어떤 목표인가요? 

또 가고 싶다(웃음). 더 열심히 해서 다시 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큰 목표가 생겼네요. 시상식 일정이 끝나고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함께한 배우들과 유니버셜을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기 전날에 혼자 여행을 했어요. 파머스 마켓에 들렀다 바다에 갔죠. 제가 바다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여행을 좋아하나 봐요. SNS에도 여행 사진이 많더라고요. 

여행도 좋아하지만, 사실은 ‘집순이’에 가까워요(웃음). 집에서 청소하고 낮잠 자고 넷플릭스 보고, 그런 시간들을 좋아해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엔 정말 밖을 안 나갔어요. 그래도 요즘 운전을 시작했어요. 겁이 되게 많은 편인데 운전할 때는 신기하게 겁이 없어지더라고요. 너무 재밌고, 운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저 자신이 멋지게 느껴져요(웃음). 친구가 얼마 전에 춘천으로 이사를 갔는데 운전을 해서 꼭 놀러 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곧 혼자 운전해서 춘천 여행까지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유나가 등장한 첫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요. 수어로 연기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었죠. 

첫 촬영 신이라 긴장을 많이 했던 날이었어요. 

 

유나가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 혼자 다짐하는 듯한 액팅이 인상적이더라고요. 

스스로 혼잣말하는 순간이 종종 있어요. ‘파이팅’을 외치고 싶은데 크게 외칠 수 없으니까 속으로 하는 거죠. 집중이 필요하거나 저한테 용기를 주고 싶을 때 혼자 하는 행동인데 그 습관이 연기할 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제가 집중을 해야 사람들이 저한테 집중할 거라고 생각했고요. 첫 촬영을 후회하지 않게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집중하기를 넘어서, 저는 유나와 함께 긴장했던 것 같아요. 

긴장이 되었다는 피드백은 처음이네요(웃음). 오디션 장면이라서 더 그렇지 않았을까 싶은데, 속으로 정말 오디션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했거든요. 

 

첫 장면 외에도 유나가 등장하는 여러 장면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어요. 뭐랄까, 유나는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수어의 힘인 것 같기도 해요. 수어를 배울 때 깨달은 점이, 수어로 말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멈추게 된다는 거였어요. 상대방의 손짓을 집중해서 보게 되고, 무슨 말을 할까 해석하기 전까지 눈을 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관객분들도 저를 그렇게 봐주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번 영화 준비로 처음 수어를 접했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어렵지 않고 재미있었어요. 현장이 워낙 즐겁기도 했고, 유나를 연기하려면 꼭 필요한 배움이라고 생각해서 당연하게 느꼈어요. 수어를 배우는 건 해야만 하는 도전이자 경험이고, <드라이브 마이 카>와 관련된 모든 순간들이 다 소중하게만 느껴졌거든요. 수어를 특별한 언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영어처럼 말로 하는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과 큰 차이를 못 느꼈어요. 요즘은 일본어와 영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앞으로 큰 목표가 생겼으니, 뭐든 배우고 싶고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 같아요. 다 재밌어요.

열정이 막 느껴져요(웃음). <드라이브 마이 카> 촬영 동안 일기도 열심히 썼다고 들었어요. 

매일 쓰지는 못했지만, 기억하고 싶은 날엔 꼭 일기에 마음을 남겼어요. 나중에 돌아봤을 때 하루하루가 아주 소중한 순간이 될 거라는 걸 알았거든요.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때그때 느낀 마음을 날것 그대로 적은 문장들이 많아요.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어제 다시 읽었는데요. (일기장을 펼쳐 본다.) 음… 사랑하고, 행복하다는 단어가 정말 많이 적혀 있네요. 

 

어떤 순간들이 그렇게 행복했을까요? 

<드라이브 마이 카> 팀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행복이었어요. 첫 영화라서 의미를 많이 두기도 했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에 남는데 마지막 촬영 날에 정말 많이 울었어요. 지금 그때가 바로 떠오르네요. 끝이라는 생각에 행복하기도 하고 되게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그때 쓴 내용이 이렇네요.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나는 잘 달려왔는가,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람 있게 채웠는가. 그냥 너무 고마워. 일본에 가기 전, 연기라는 것과 사이가 안 좋아서 서먹서먹했지만 연기는 역시 재미있고 짜릿해.” 그리고 다음 장에는, 이건 마지막 촬영 이후인 것 같아요.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 작품을 위해서 살았고 모든 것을 걸었고 내 삶이 <드라이브 마이 카> 하나를 위해서 돌아간 것 같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미련과 후회라는 감정이 들지 않아. 왜냐하면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쏟아내려고 노력했으니까. 너무 행복했고, 자유로웠고, 기뻐. 내가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연기할 날이 또 있을까? 감독님이 해주신 말씀과 표정과 음성을 잊지 않을 거야. 행복해서 벅차고 눈물이 나고, 세상이 다르게 보였던 한 달여간의 시간. 사랑해 다 사랑해.”라고 적어 놨네요(웃음). 

 

와… 감동이에요. 울컥해요. 희망적이고요. 열심히 했던 시간들이 느껴져요. 

저도 놀라워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저에게 터닝 포인트 같은 작품이에요. 연기하는 게 정말 힘에 부치던 시절에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이 되었어요. 

 

언제 처음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궁금해져요. 

일단 영화를 좋아했어요. 어릴 때 가족들과 극장에 갔던 기억이 정말 많거든요. 비디오를 빌려 본 기억도 많고요. 어떤 특정한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영화를 좋아했고, 그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 속에서 직접 보이는 게 배우들 모습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배우라는 꿈은 대학교 전공을 선택할 때 정했어요. 그 전까지는 무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흥미롭게 느껴진 직업이 없었나 봐요. 

사실 기억이(웃음)… 오히려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은데, 항상 유행하는 꿈을 택했거든요. 장래 희망을 적을 때는 친구 따라서 적기도 했고요(웃음). 

 

어릴 땐 어떤 아이였나요? 

지금은 MBTI 검사를 하면 I형이 나오는데, 어릴 때는 확실히 E형이었어요. E형이 되고 싶었던 I형이었기도 하고요. 활발해지고 싶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매일 친구들과 뭐 먹지,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고민이었고(웃음), 잘 울고 잘 웃는, 감정 표현에 솔직했던 아이였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다 표현하고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면이 있어요. 감정 기복이 있는 편인데, 다 표현해 버리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할 것 같아서요. 배려하는 마음으로 감정을 절제하는 면이 생겼어요. 내 고민을 다 말해버리면 약점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요. 제 감정을 혼자 느끼고 스스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너무 큰 감정이 몰려올 때는 일기에 쓰려고 노력해요. 

 

일기를 잘 쓰는 편인가 봐요. 

렇지는 않아요. 꾸준히 일기 쓰는 일이 참 어렵더라고요. 잘 쓰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예전에는 이상하게, 꼭 누군가가 제 일기를 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항상 솔직하게 적지 못하고 누군가 볼 수도 있다는 전제 하에 쓸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드라이브 마이 카> 촬영 동안 썼던 일기에는 아주 솔직한 내용들만 담았어요. 

 

감정을 혼자 정리하고 싶을 때 일기를 쓴다는 말에 공감해요. 

스스로 중심을 잡기 위한 노력이기도 해요. 제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죠. 

 

솔직한 마음을 담은 일기를 방금 다시 읽었는데 어땠어요? 

진심을 담아 쓴 일기인데요. 되게… 다른 사람이 쓴 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웃음).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지금은 또 다른 시간에 살고 있어서 다르게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때는 정말 <드라이브 마이 카>에 빠져서 달려들던 때였으니까요. 일기를 타인 앞에서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네요. 

 

요즘 마음은 어때요? 첫 영화를 통해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데, 부담감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부담감보다는… 행복해요(웃음). 지금은 그냥 충분히 행복해하고 있어요. 분명히 처음엔 고민과 부담을 느꼈는데, 최근에 함께하게 된 회사도 생겼고, 당분간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1년에 꼭 한 번 여행을 가자는 혼자만의 약속을 지켜왔는데, 최근에 국제 시상식을 다녀오면서 해소가 됐어요. 에너지를 가득 채워서 돌아온 거죠. 지금은 고민이 막 들어와도 튕겨내는 시기인 것 같아요(웃음).

좋은 시기를 지나고 있네요(웃음). 취미 이야기가 궁금한데, 요즘도 발레를 하고 있나요?

그럼요. 아직 배운 지 4개월밖에 안 돼서 완전 초보자예요. 막 부들거리면서 하고 있어요(웃음). 발레가 되게 재미있는게, 하루하루 제 몸을 자세히 관찰하게 돼요. 발레를 하고 나면 안 쓰던 근육을 쓰게 되어서 엄청 아프기도 한데, 그게 또 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뿌듯하고요. 일상에서는 몸이 삐뚤면 안 되니까 계속 자세를 고쳐 잡아서 신경 쓰게 되는 것도 좋은 변화예요. 

 

방금도 자세를 고쳐 앉았어요(웃음). 운동은 발레만 하나요? 

발레 하기 전에는 수영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해온 운동인데, 물속에서 자유로운 기분을 좋아해요. 오히려 물 밖에 있을 때 몸이 더 안 움직인다고 느낄 때도 있고요. 물장구칠 때 보이는 물 기포를 보는 것도, 가만히 물빛이 일렁이는 걸 보는 것도 좋아해요. 수영장 특유의 락스 냄새도 저는 좋더라고요(웃음). 발레도 수영도, 운동 자체보다 운동 덕분에 생기는 시간과 제 몸에 찾아오는 변화를 즐기는 것 같아요. 

 

취미가 많네요.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잖아요.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해요? 

좋아하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사실 딱 하나를 꼽기가 어려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늘 고민하게 되는데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웃음). 

 

기다릴게요(웃음). 

음… 지금 떠오르는 건 <카모메 식당>(2006)과 <버드맨>(2014)이에요. <카모메 식당>은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싶을 때마다 꺼내 봐요. 영화가 가진 색감이 아름답고 그 안에 제가 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저기서 같이 빵 먹고 싶다(웃음). 뭐랄까, 커다란 사건 없이 유유히 보게 되는 영화잖아요. 보고 있으면 어떤 일도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주인공 사치에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녀와 함께 살면 마음이 잔잔해질 것 같아서요. <버드맨>은…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많이 울었어요. 주인공 리건은 배우이고 사랑받고 싶어서 애쓰는데 그렇지 못해서 슬퍼해요. 결국 마지막엔 버드맨이 되어서 날아가는데, 그 장면에서 깊이 공감했어요. 박수를 쳐주고 싶기도 했고, 누구보다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당시 제 상황과 심정이 리건과 많이 닮아 있었어요. 저도 연기를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한참 연기하는 일에 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였죠. 

 

어떤 고민이었을까요. 

잘하고 싶은데 이뤄낸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죠. 서른 살이 가까워질 때쯤이면 뭔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죠. 연기를 잘하는 게 맞나, 연기를 계속하고 싶은 것은 맞나, 하는 고민들이었어요. 연기 생각을 아예 안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힘든 시기를 지났네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면, 할 줄 아는 게 연기밖에 없었어요(웃음). 딱히 다른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다른 일을 해볼까, 하다가도 다시 돌아오게 됐죠. 

 

유림 씨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는 어떤 배우일까요? 

많은 선택지가 있겠지만, 좋은 배우가 되려면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과 시간, 그 모든 것들을 다 쏟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저에게 바라는 일이기도 해요. 앞으로 작품을 만나고 좋은 인물을 만났을 때, 후회가 없다고 느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배우들마다 열정을 쏟는 방식은 다 다르겠지만 저는 대본을 깊이 읽고 넓게 사유하는, 그런 시간을 아주 오래도록 갖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노력인데 그걸 잊지 않고 꾸준히 이어가고 싶어요. 그래야 기대가 되는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저를 계속 궁금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배우로서 굉장히 감사한 일이니까요.

유림 씨도 자기 자신이 궁금한 것 같아요. 

맞아요(웃음). 그래서 지금은 고민이나 걱정보다 기대감이 더 커요. 모든 게 재밌고요. 

 

유나를 연기할 때 그 열정을 쏟아냈잖아요. 앞으로 어떤 배역에 애정을 두고 싶어요?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어떤 인물을 만나게 될지는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아직 연기하고 싶은 특정 배역과 인물은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어떤 인물을 만나게 되든 제 내면으로, 제 몸으로 표현하는 한 사람이 되겠죠. 그래서 애정과 열정은 당연히 쌓일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 속에 지어진 인물이라고 해도 완전히 저와 다른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안에서 나온 사람이니까 제 경험과 생활, 평소에 느끼는 감정들이 묻어나겠죠. 유나가 저였고, 제가 유나였던 것처럼요. 그러고 보니 제가 연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이유일까요? 

처음 연기할 때는 배역이 정해지면 아예 다른 사람을 탐구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먼저 저 자신을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엔 연기가 좋은 이유로, 타인을 연기하며 또 다른 삶을 사는 게 흥미롭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오히려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는 건 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시간들이 제가 배우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같고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말하는 메시지와도 이어지네요. 타인을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는, 중요한 가치가 영화에 녹아 있죠. 

맞아요. 그렇게 이어지네요. 

 

앞으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지 더 궁금해져요. 혹시 연기해 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어요? 

얼마 전에 <봄날은 간다>(2001)를 봤어요. ‘은수’라는 사람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일단 너무 아름다우시고, 은수라는 캐릭터가 너무 새롭게 느껴졌어요.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이해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카모메 식당>을 좋아하는 이유처럼 영화에 담긴 색감도 너무 좋았고요. 

 

궁금한 사람을 연기하고 싶은 거네요. 스스로 평범한 사람이라, 무지개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죠. 

저는 제가 눈에 확 띄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어요. 오디션장에 가거나 같은 배우들과 있을 때 정말 연예인 같은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무지개 같은 사람들이라고 느꼈던 거죠. 저보다 훨씬 더 다양한 색들로 채워진 사람들을 부러워했어요. 

 

지금은요? 바뀌었죠. 저는 제가 너무 좋아요. 나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드라이브 마이 카>로 조금씩 알아봐 주시기 시작했고, 응원도 많이 해주시니까 제가 걸어온 시간이 맞았구나, 저 같은 배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어요. 저 자신을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나무처럼 단단한 사람 같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거든요. 감사한 말들을 떠올리면서 영화를 다시 봤는데 유나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제 모습이, 유나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정말 확고하고도 단단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어요. 물론 앞으로 나무처럼 단단할 때도 있고 이파리처럼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이젠 그 흔들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중심이 생긴 것 같아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관객들의 피드백도 많았어요. 유림 씨는 어떤 존재한테 의지하고 위로받고 있나요? 

고민하게 되네요(웃음). 음… 지금은 저 자신인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엔 위로가 되는 다른 존재들을 떠올렸는데요. 가까운 지인의 응원을 받을 때 정말 괜찮아지고 위로가 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허용되는 것 같아요. 제가 절 위로할 수 있어야 진짜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아주 오래도록, 그 위로가 지속되는 것 같고요. 지금은 저 자신에게 온전히 위로받고 있어요. 

 

벌써 마지막 질문이에요. 아까 일기를 읽어본 것처럼, 나중에 읽을 수 있도록 여기에 짧은 문장을 남겨볼까요? 

음… 정말 단순한데 놀라지 마세요(웃음). 

 

네(웃음). 

사랑해 유림(웃음)! 나중에 이 인터뷰를 읽을 때 이 순간, 내가 나 자신을 참 사랑했다는 걸 돌아보게 된다면 좋겠어요.

함께 하고 싶은 영화 속 사람들

“저 장면 안에 속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연기를 꿈꾸게 된 이유도 이런 감정 때문이죠. 직접 영화 속 저 사람이 되어 보고 싶기도 하고, 박유림이라는 저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서 영화 속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1. <카모메 식당>(2006) 사치에

사치에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평화로워질 것 같아요. 그녀 옆에 있으면 깊은 고민도 사라질 것 같고요. 가방을 잃어버려도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나란히 앉아서 사치에와 함께 오니기리를 만들고 싶네요.

2. <킬 빌>(2003) 더 브라이드

킬 빌의 브라이드는 단순히 멋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좋아하는 인물이에요. 햐얀 눈밭에서 오렌 이시와 대면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해요. 피가 흐르는 잔인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또 묘하게 아름다운 장면이죠.

3. <데몰리션>(2015) 데이비스

헤드셋을 끼고 막춤을 추고 벽을 치는 장면이 있어요. 볼 때마다 희열을 느껴요. 가끔 답답해서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데이비스가 저 대신 그렇게 해주는 것만 같았어요. 영화 속에 제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한 해방감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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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임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