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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종이를 붙든 고요한 순간. 내가 쥔 도구를 만든 이는 무수한 시간 동안 나를 떠올렸다. 나는 어떤 색과 질감을 좋다 여길지, 평소 사용하는 문구와의 조화는 어떨지. 섬세한 마음은 쓰는 이에게 결코 감춰지지 않는다. 기록자를 다정히 살펴 만든 도구들, 그 세심한 예술을 소개한다.
좋은 종이가 주는 충만함을 아는가. 바스락거리는 질감과 코끝에 닿는 특유의 향을 느끼다 보면 손안에 놓인 노트에 나의 세계를 어서 풀어두고 싶어진다. 이 순간을 사랑하는 스테이셔너리 브랜드, 트롤스페이퍼는 양질의 종이를 중심으로 한 문구를 선보인다. 쓰는 목적과 필기구와의 상성을 고려하며 재료를 연구하는 건 이들이 기꺼이 나서는 일. 고심해 선택한 종이를 엮어 해마다 새로운 다이어리를 선보인 지도 6년째다. 한 권의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간 미색 빛에 머무르며, 이들이 기록자를 위하는 깊은 마음을 헤아려본다. 높은 질을 추구한 물건에서는 때때로 묘한 무정함이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이들은 부드럽고 편안한 모습을 지향하며 기록자의 매일에 함께한다. 소재에 충실하기에 불필요한 화려함은 덜어냈다. 나와 종이가 고요히 마주 보는 시간. 트롤스페이퍼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다.
1. 패브릭 재킷
매년 다이어리를 감싸는 재킷을 선보여온 트롤스페이퍼. 올해는 자연의 소재로 옷을 짓는 의류 브랜드, ‘가정식패브릭’과 함께 재킷 원단을 선택했다. 고운 촉감이 특징인 ‘구자라트 토종면’은 인도 구자라트에서 자라는 유기농 목화로, 숙련된 직조 장인의 베틀질을 거쳐 완성된다. 트롤스페이퍼는 토종면에서 뽑아낸 실로 만든 ‘카디 아이보리’, 실을 천연 염색한 ‘매리골드 재킷’을 제작했다. 리넨도 원단의 주인공. 천연 리넨을 성글게 엮어 도트 패턴을 새긴 ‘도트 재킷’과 짙은 감색 ‘브라운 재킷’까지. 총 네 가지 버전을 만나볼 수 있다.
2. 그랜마 핸드 북마크
책장을 넘기던 할머니의 손을 닮은 북마크. 크림빛을 띤 부드러운 종이가 할머니의 포근함을 닮았다. 레터프레스로 새겨진 자그마한 꽃문양과 필기체 문자가 손목에서 은은하게 빛난다. 연필, 볼펜, 만년필 모두 적합한 종이가 쓰여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한다면 옮겨두어도 좋다.
커스터드 푸딩을 닮은 연필통, 메모를 꽂을 수 있는 얼음 모양 나무 큐브. 아쎄스튜디오가 상상력을 불어넣어 만든 물건들은 이토록 재밌고 새롭다. 이들은 일상품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해, 나무를 주된 재료로 아름다운 수공예 문구를 만든다. 아쎄스튜디오A-SE Studio는 ‘Almond-Shaped Eyes’를 줄인 이름. 작지만 균형감 있는 아몬드를 닮은 눈으로 세상을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바라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물건은 보기에는 즐겁지만 무용하지도 않고, 실용성에 집중하다 미감을 잃지도 않았다. 일상 공간 어디에 놓여도 제 몫을 해내는 든든한 친구들이다. 기록자의 책상 위에는 머리를 말랑하게 만들어줄 단서도 필요한 법. 재치 두 스푼이 담긴 아쎄스튜디오의 물건을 놓아보자. 먼저 적은 문장과 곧 흘러나올 문장 사이에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 테니.
1. 포스트 컬럼 펜슬 홀더
고대 건축물의 기둥을 닮은 연필꽂이. 책상은 일종의 작은 공간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고대의 기둥이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처럼, 쓰는 이가 삶에서 오래된 것의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했다고. 아날로그 방식의 기록을 사랑하는 이들의 책상에 잘 어울린다.
2. 크루아상 메모 홀더
잘 빚은 빵으로 착각할 법한 이 오브제는 아쎄스튜디오의 스테디셀러, 메모 홀더다. 반으로 갈리는 크루아상 사이에 자석이 부착되어 작은 종이를 단단하게 붙들어준다. 좋아하는 엽서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종이에 적어 끼워두어도 좋다. 책상 위에 놓인다면 은근한 미소를 불러일으키며 시선을 가져갈 것이다.
어떤 기록자는 종이에 글을 빼곡히 채우는 것만으로는 취향을 표현하기 아쉽다 말한다. 좀더 멋스러운 나만의 페이지를 완성하기 원한다면, 플래그와 함께해도 좋을 터. 롤 라벨 시리즈와 노트를 주로 제작하는 플래그는 색과 형태를 다루는 능숙한 감각이 돋보인다. 브랜드의 시작은 이곳을 이끄는 장소희 대표의 문구를 향한 오랜 애정. 취미로 수집하던 빈티지 문구를 일 년간 판매하다, 직접 만든 문구에 대한 간절함이 커져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단다. 그는 반복되는 하루의 곁에 플래그의 제품이 머무르길 바란다. 삶을 살아내는 일은 고단할 때도 많지만, 플래그가 매만진 라벨과 지류가 작은 깃발이 되어 기록자를 응원하길 원한다. 주인장의 다정한 마음은 실용성과 시각적 즐거움을 꾸준히 개선하는 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성 넘치는 색과 디자인 뒤에 나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니. 노트 한쪽에서 나부끼며 훈풍을 일으킬 조그만 조각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1. 롤 페이퍼 라벨
노트에 색과 모양을 더하는 재미를 즐긴다면 주목하자. 다채로운 라벨이 동그랗게 말린 제품으로, 제목을 써 붙이기 좋은 ‘타이틀 박스’와 꾸밈을 돕는 ‘데코 쉐입’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됐다. 연필과 볼펜 모두 명료하게 표현되는 소재이니 원하는 문구를 적어 노트 이곳저곳에 붙여볼까.
2. 커팅 포 MWD
일정과 목표 관리를 돕는 롤 스티커 라벨. 월, 주, 일 세 단위로 만들어졌고 패키지마다 일곱 가지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점선 커팅을 따라 툭 뜯어낸 다음, 한 달 습관을 잘 지켰는지 표시하거나 매일의 목표를 적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토록 감각적인 일정 관리라니, 계획형 기록자를 꿈꾼다면 마음을 쏟기에 부족함이 없다.
에디터 차의진
자료 제공 트롤스페이퍼, 아쎄스튜디오, 플래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