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배우다

I’m an Actor!

나도 배우다

I’m an Actor!


“어머, 얘 넌 어쩜 눈이 이렇게 예쁘니. 커서 배우 해도 되겠다.” 어릴 적 이모(엄마의 친구는 모두 이모다)들은 내 연한 갈색 눈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들은 30년 후 내가 어떻게 자랄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 같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잘나가던(?) 과거의 영광을 더듬어,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혹시 알아? 제2의 인생을 스크린 안에서 살게 될지.

S#1. 배역은 어디에서 구하지

먼저 배우를 검색해봤다. “배우Actor: 연극이나 영화에 출연하여 연기하는 사람.” 연극은 무대공포증이 있으니 패스하고, 내 길은 영화다. 책상에 해리슨 포드의 사진을 붙여놓고 마인드 컨트롤했다. 주성치와 양조위의 영화를 번갈아 감상했다. 연기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나름의 이유였다. 여유로운 걸음걸이, 기품 있는 목소리, 사려 깊은 어조, 우수에 찬 시선과 천진난만한 웃음이 공존하는 눈. 머릿속에 큰 그림은 그려졌다. 그래, 이제 뭘 하면 될까? 

일단 영화판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배우로 전향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사실은 어디에 꽂아달라고(?) 부탁을 좀 하려던 거였다. 대배우가 될 광제의 문자, “파이팅이다 브로!” (음, 그래 너도 파이팅!). 연출부 출신 태연의 문자, “얼굴 때문에 안 될 거 같아요. 잘생겼다는 뜻은 아니고요.” (팩트로 뼈를 맞은 느낌이랄까). 영상을 연출하는 준용의 문자, “일단 프로필하고 연기 영상을 좀 보내주세요.” (네?). 그러니까 배역을 따내려면 자신을 알릴 수 있는 프로필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외장하드를 뒤져 나름 쓸 만한 사진들을 추렸다. 그러고는 얼마 전 구입한 아이폰8로 셀프 영상을 찍었다. ‘똥 군기 잡는 대학 선배’ 역할이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하정우의 연기를 몇 번이고 돌려보며 연습했다. 4.7인치 화면 속에서 발연기의 장인이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클로즈업 샷은 안 되겠어.’ 나는 동영상을 영구 삭제했다. 프로필은 둘째 치고 배역은 어디서 구하지? 마침 연기파 배우 대용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 사이트 하나 알려드릴게요. 잘 찾아보면 비중 없는 역할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예요.”

S#2. 캐스팅에 성공하다

‘필름메이커스’는 영화 정보와 시나리오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로 매일같이 배우 구인 게시물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나는 단편영화와 기타 SNS 영상 위주로 배역을 찾았다. 몇 개의 솔깃한 작품에 메일을 보내고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껍데기집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는 ‘대리2’ 역할에 캐스팅됐다. 제작진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모험을 했는지 의아했지만, 나는 내 모든 영혼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드라마 <미생>을 다시 찾아보며 회사원 특유의 피곤한 표정을 연습했다. 드디어 D-day 하루 전, 주연 배우 섭외 문제로 촬영이 무기한 연기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저, 혹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시는 건 아니시죠?’ 차마 문자를 보내지는 못했다. 배우가 자존심이 있지….

운이 좋게도 두 번째 캐스팅을 받았다. ‘페이스북코리아 29초국제영화제’ 출품작으로, 역할은 화장실에서 혼밥 하는 ‘복학생4’였다. “실제 화장실 혼밥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먹방을 자주 봅니다!” 아무래도 진심 어린 호소가 통한 것 같다. 촬영 전날까지도 확인 전화를 하고, 당일 입고 가야 할 의상도 복학생답게 준비했다. 자, 이제 진짜다!

S#3. 진짜 배우들과의 대화

촬영 장소는 서울대학교 학생식당. 2시간 정도를 빌린 모양이었다. 먼저 도착한 배우 두 명과 인사를 나누고 순서를 기다렸다. “두 분 모두 배우이신가요?” 우스운 질문이었다. “아, 네 저는 아직 학생이고요.”, “저는 졸업했어요. 프로필 드릴게요.” 배역 사진이 빼곡하게 디자인된 인쇄물을 내미는 ‘복학생2’, 그는 연기 전공자로 북한군부터 야동 판매원, 심장병으로 죽는 역까지 두루 거친 개성파 배우였다. “프로필 없는 배우는 없어요. 자기를 알려야 하잖아요.” 아, 이 사람은 진짜다.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복학생1’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처음 만난 복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다. 경제적인 문제부터 경력에 꼭 필요한 조언까지. “‘죄송하지만 학생 영화라 출연료는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기에 체념하고 있는데 제 앞에서 티라미수 케이크랑 음료를 사와서 먹더라고요. 황당했어요.”, “배우들은 알바 구하기가 힘들어요. 혹시나 오디션 일정이 잡히면 당장 스케줄을 비워둬야 하거든요. 사장님들이 싫어할 수밖에요. 그래서 노가다나 택배 상하차 같은 일용직을 많이 해요.”, “유명 배우가 오디션 100번도 더 떨어져봤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100번이나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거죠.”

덜컥 부끄러워졌다. 그들의 일을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갑자기 고백합니다만, 사실 저는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뭐, 어때요. 연기 별 거 없어요. 혼밥 해보셨죠? 그 느낌만 단순하게 가져가면 돼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혼밥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과장된 연기를 할 것 같아 화장실에 갔다. 거울 앞에서 연습하다가 누군가 들어오면 괜한 헛기침을 한 뒤, 코털을 뽑으며 그가 나가길 기다렸다.

S#4. 기다림과 굶주림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복학생1과 2와 3은 각각 혼밥을 하며 페이스북에 자신의 상태를 업로드 한다. 그런 다음 자신들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함께 모여 즐거운 식사를 한다. 아주 단순하지만 고도의 심리 묘사와 적당한 과장이 필요한 연기였다. “이 부분에서는 미국식 제스처를 하면 어떨까요?”, “여기에선 이 정도 효과를 내면 좋겠는데요?” 처음 만난 스태프와 배우가 의견을 교환하며 더 나은 상황을 제시했다. 작은 규모의 현장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 롤’을 말하면, 감독은 ‘레디, 슛’을 외쳤다. 그리고 ‘오케이’. 한 장면을 찍어도 각도에 따라 몇 번의 촬영을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대기 시간만 3시간이 훌쩍 넘었다. 

“촬영 시간이 4시간이라고 하면 보통 6시간 정도 생각하면 돼요.” 배우들의 목소리를 녹음할 동안 스태프들은 촬영에 사용하고 남은 밥을 먹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식사는 하셨어요?” 스태프 중 한 명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니요, 일부러 안 먹고 있어요. 배우니까요.”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배가 고팠다. 마음 같아선 옆에 앉아 잔반을 함께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잊지 말자. 나는 배우다.

S#5. 사람이 발을 연기해

드디어 마지막 차례. 복학생4가 활약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공중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한 손에 김밥, 또 다른 손에 핸드폰을 쥐고 식당에 모인 친구들을 찾아 뛰쳐나가는 역할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할 재치 있는 연기력이 필요했다. 대사는 없었다. 표정만으로 모든 걸 압도해야 했다. 

“카메라 롤, 레디… 슛!”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아주 멋진 발을 연기했다.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어색한 표정과 행동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전 대사 연기를 더 잘하는 것 같아요.”, “아….” 감독님은 내심 실망한 눈치였고, 설상가상으로 소품으로 준비한 김밥마저 바닥에 떨어뜨리며 조금 위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짜인지 모를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저 이거 나갈 수는 있는 건가요?”, “글쎄요. 좀….”

S6#.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요

보름 전부터 시작된 대배우를 향한 여정은 대략 20분의 발연기를 남긴 채 마무리됐다. 내 분량은 아마 통편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나를 또 캐스팅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감독님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조금 얼버무렸다. 아마도 그는 거짓말 같은 건 잘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배우를 하면 인생이 크게 바뀌거나, 적어도 이 직업에 대해 한두 마디 정도는 덧붙일 말이 내 안에 생길 줄 알았다. 결과적으로 배우라는 일은 내게 전보다 흐릿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또다시 연기를 하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조금 망설이겠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다.

혼자 먹는 그대들에게

연출
김준겸 조동현 최원경

조연출
김은혜 

촬영
강재연 조동현 

편집
최원경 조동현

배우
복학생1 문창준
복학생2 박준수
복학생3 유병훈
복학생4 김건태 

장소 협조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식당

* 바보 같지만 경험해보고 싶은 꿈에 도움을 주신 스태프와 배우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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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건태

포토그래퍼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