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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담
랑아
랑아.
오늘따라 일찍 집에서 나갔더구나. 아침밥 먹고 깊이 자느라 네가 나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일어나보니 집이 서늘했다. 여느 때처럼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늘은 무얼 할까 생각하다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매일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 편지라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 그만둘까 싶다.
그래도 랑아.
네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를 잘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너무 어렸고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너에 대해 아주 단편적인 기억들만 몇 개 갖고 있단다. 누워 있는 내 몸 위에 따뜻한 등을 켜주던 모습. 수건으로 내 몸을 칭칭 감싸 너의 웃옷 속에 넣고 어딘가 바쁘게 걸어가던 모습. 그렇게 바쁘게 걸어가 도착한 병원에서 의사에게 뭐라 뭐라 목소리를 높이더니 밖으로 나와 계단에 앉아 한참을 울던 모습.
그렇게 잘 우는 랑아.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모습 중에는 우는 모습이 상당히 많다. 처음 네가 우는 걸 봤을 때 나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이쪽저쪽으로 굴리기에 어디가 아픈가 걱정하며 들여다봤지만 한동안 그러더니 멀쩡히 일어나 돌아다니기에 안심했었다. 몇 번 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게 ‘운다’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너만큼 자주, 그리고 많이 우는 인간을 본 적이 없다. 예전엔 자주 우는 네가 걱정돼서 그 앞을 서성거리며 오랫동안 지켜봤었다. 하지만 내가 있다고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고, 우는 네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기라도 하면 너의 숨과 눈물이 축축하게 몸에 닿는 게 싫어서 언제부턴가 네가 울기 시작하면 나는 다른 곳으로 몸을 피했다. 울다 만 네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도 나는 네가 더 잠잠해질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 너무 긴 시간 울음을 그치지 않거나, 큰 소리를 연달아 낼 때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확인차 네 방 앞을 슬쩍 지나갔지만 말이다.
내게 우는 방법을 일깨워준 랑아.
오랫동안 네가 우는 모습을 본 덕분인지 언제부턴가 나도 우는 법을 깨우치게 됐다. 먼저 가슴과 얼굴이 뜨거워지고 눈썹이 올라가거나 내려가고, 졸린 것처럼 시야가 아득해지며 맺힌 눈물을 아래로 떨구는 것을 나도 할 수 있게 됐다. 한 번 할 수 있게 되니 두 번째, 세 번째는 더 쉬웠다. 이제 나도 너처럼 외롭고, 속상하고, 화가 날 때 언제든 울 수 있게 됐다. 내 눈에서 나온 물이 투명한 동그라미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말라가는 것을 보면 울기 전에 느낀 감정들이 조금 해소되는 것 같더라. 게다가 내 눈물을 보고 당황하며 내게 사과할 말을 급히 찾느라 애쓰는 네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고. 그런데 가끔 랑이 네가 준 개다래나무 향을 맡을 땐, 기분이 좋은데도 눈물이 나더구나. 그것 참 신기한 일이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는 랑아.
네가 웃는 소리는 이 집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는 걸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네가 나를 안고 웃을 땐 온몸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가쁘게 드나드는 숨소리와 웃음소리가 시끄럽지만 왠지 기분은 좋다. 그렇지만 아직 나는 너에게 웃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네가 더 자주, 더 많이 웃는다면 나도 너처럼 몸을 흔들며 웃을 수 있을 텐데. 어제 너는 작고 동그란 것을 들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집에 늦게 들어왔더구나. 집에 오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운 너에게서 여름 밤바람과 흙냄새 그리고 다른 인간과 동물 냄새가 뒤섞여 났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여러 냄새에 내 기분도 신선해졌다. 그리고 오래전 작고 뜨거운 방에서 내 한쪽 손만큼 작고 동그란 것을 함께 굴리며 놀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너는 큰소리로 웃고 있었고 나는 작은 방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무척 숨이 찼었다. 문득 그 소란스러운 작은 방이 그리웠다.
랑아.
네가 매일 집을 나서기 전 현관문을 잡고 서서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며 네가 어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읊을 때마다 그 상냥함이 귀엽기도 하고 조금 쓸쓸하기도 하다. 문밖을 나선 네가 계단을 쿵쿵 걸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내 낮잠에 빠지지만 어떤 땐 낮잠을 방해하는 네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이 서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나 쿠웅- 쿠웅- 느리고 무거운 발소리가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하면 나는 서운함과 반가움을 동시에 느끼며 네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가볍지 않은 몸을 애써 일으킨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마주한 지 어느덧 열여섯 해가 지났더구나.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조금 더 덥고 조금 더 추워지지만 오늘도 너와 함께 살고 있어서 나는 좋다. 랑아,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오려무나. 함께 달을 보러 옥상에 가자.
글 이랑
그림 Hirokawa Takes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