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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Spent Today like This
하루를 이렇게 썼다. 깊은 잠이 들기에는 여전히 생각이 많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눈을 뜨고 말았다. 잠들기 전 텅 빈 숙소에 누군가 함께 머물러 주길 바랐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다. 지독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꾸벅꾸벅 졸고 있다. 무거워진 머리는 버스가 흔들리는 방향대로 움직인다. 10시간의 다툼 끝에 도착한 곳 폴란드. 크라쿠프Kraków의 숙소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커튼을 열고 창 너머 날씨를 확인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그날은 유독 외로움에 허기진 새벽이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짙은 안개가 뒤덮고 있었고 누군가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아마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결국 나는 알 수 없는 끌림에 무작정 뛰쳐나갔다. 새벽의 안개속 세상은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 전혀 달랐다. 우선 고요했다. 이보다 더 고요할 수 있을까? 심장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였다. 며칠 동안 익숙하던 모든 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내 선택은 옳은 걸까?’ 여행을 떠나기 전 고민하던 생각들. 여행을 떠난 지금도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언제쯤 이런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문득, 안개 속 감추어진 무언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나를 찾고 싶어졌다. 더 는 망설이며 시간을 흘려보내기가 미안해져 길을 나섰다. 조금은 불안한 마음에 좋아하는 음악도 듣지 않은 채 말이다. 나는 사막의 미어캣처럼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애써 아닌 척했지만 사실 겁이 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선명해지는 풍경이 불안한 나를 다독이며 다가왔다. 건물 틈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바람에 울고 있는 나무와 그 울음으로 촉촉해진 잔디를 밟고 있었다. 그제야 그곳이 공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고 있는 신발이 온통 젖어있었다. 순간 카메라가 걱정되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렌즈에 습기와 얼룩이 가득했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 오른쪽 소매 끝을 잡아당겨 렌즈를 닦아냈다.
그 즈음 강아지와 산책을 나온 당신이 보였다. 당신을 담고 싶어 필름을 감고 렌즈를 통해 바라보았다. 안개 때문인지 초점 잡기가 어려웠지만 ‘찰칵’ 셔터를 눌렀다. 누른 순간, 시간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기억이 된다. 지금 당장 사진을 확인할 수 없지만, 여행이 끝난 후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이 좋아 나는 아직 필름 사진을 찍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공원 옆에는 강이 흐른다. 제법 큰 강인 것 같지만, 안개 때문에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궁금해졌다. 강 건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보이지 않는 너머를 동경하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본 마음일 테니.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가 들렸고 동물들의 사뭇 여유로운 모습이 보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더니 애원하듯 입을 벌리고 있다. 허기진 건 나와 마찬가지구나 싶었다. 밖으로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줄 수 있는 게 없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꽥꽥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아직 포기하지 않은 강 건너를 향해 걸었다.
공원 끝자락에 다리가 놓여있다. 다리에 올라 조금 걸었더니 얼마 지나지않아 반대편에 도착했다. 막상 무엇이든 하고 보니 생각보다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던 반대편의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똑같은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다시 공원으로 내려왔더니, 멀리 자전거 한 대가 느린 속도로 오고 있었다. 저 정도 속도면 충분히 담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전거가 지나가는 길보다 한층 더 높은 길로 올라갔다. 공원에는 강가를 기준으로 네 개의 길이 있었다. 강가 바로 옆길, 그리고 그 위쪽 언덕길. 또 그 위로 작은 오솔길. 그리고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있었다. 나는 두 번째 길에서 자전거를 기다리다 그 순간을 담았다.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롭게 맞이한 풍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개로 인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뻗어있고 왼쪽에는 큰 나무의 가지들이 풍성한 듯 앙상하게 흘러 내려왔다. 그 사이에 작은 의자와 쓰레기통이 놓여있는 모습이 나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게 했다. ‘누군가 나에게 걸어왔으면.’ 하는 마음에 한참을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가방에 넣어둔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고 음악을 골랐다. 이어폰 너머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한 곡의 노래가 끝나기 전에 누군가 걸어오길 바랐지만 노래가 끝날 무렵에도, 다음 노래가 흘러나올 때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매번 사진을 담을 때 사람이 필요하다 싶으면 사람이 없고, 한두 명만 있으면 하는 순간에는 많은 사람으로 인해 그 순간을 포기하고 돌아선 적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꼭 기다려야 할 것만 같았고 지금이 아니면 나중은 없다는 생각에 기다림을 택했다. 다음 곡이 차츰 늘어났지만 이제 그 횟수는 중요치 않았다.
그때쯤 한 남자가 걸어왔다. 두근거렸다. 오지 않는 기다림에 셀 수 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놨다 하며 연습을 했건만, 정말로 기다리던 이가 다가오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조금 더. 찰칵.’ 셔터를 눌렀다. 기다린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 행복했다. 지금 바로 확인할 수 없는 필름이 얄미울 정도로 행복했다.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 곁을 지나갔다. 멀어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비록 그 남자는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그에게 고마웠다.
점차 안개가 사라지는 듯 보였다. 아니면 이제 내 눈이 주변 모습에 익숙해져 변해버린 것일 수도 있다. 공원을 지나 광장을 향해 걸었다. 벌써 출근 시간이 되었는지 광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보였다. 다시 카메라를 들어 분주한 거리의 모습을 담았다.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을 담았고,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을 담았다. 세 번째 필름을 카메라에 넣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를 카메라에 담아주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유유히 그 틈을 지나간다. 묘한 느낌의 순간이었다. 멈추어진 시간과 흘러가는 시간이 함께 공존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시간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탓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따스한 커피 한 잔과 아늑한 침대가 간절했다. 우선 잠을 좀 더 자야겠다는 생각에 거리의 유혹들을 무시한 뒤 숙소로 향했다. 자주 가던 카페마저 포기한 채 그대로 침대에 스며들었다.
오후 3시. 애매한 시간에 눈을 떴다. 숙소 부엌에서 어제 먹다 남은 피자로 대충 허기를 달래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안개는 이내 도시를 떠났고 눈부신 태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쩐지 어색한 날씨였다.
오후 4시. 노을이 지기까지 조금 남은 시간을 카페에서 보내기로 했다. 주문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흘러넘치는 온기를 감싸 안았다. 뜨거웠던 정오의 햇볕이 빛을 잃어갈 때쯤 머그잔도 천천히 온기를 잃어갔다. 새벽과 다르게 오후의 도시는 분주했다. 지고 있는 노을빛을 담기 위해 나 또한 분주히 필름을 감으며 셔터를 눌렀다. 새벽에 본 강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이번엔 강가를 거닐며 그들의 일상을 담았다. 조금 더 걷고 싶었다. 내일이면 변해버릴지 모르는 오늘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한가로운 그들의 모습이 정말 좋았다. 백조와 함께 저녁을 나눠 먹고, 소중한 시간을 아이와 공유하고, 무심하게 던져놓은 낚싯바늘을 더 무심하게 지켜보는 청년도 카메라에 담았다. 걷다 보니 그대를 만났다. 그대가 카누를 머리에 이고 언덕을 내려오는 모습에 단숨에 달려가 도와주고 싶었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강인함이 보여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지켜주는 일이 그를 위한 일이리라 믿었다. 강물 위에 카누를 내려놓고 밧줄로 단단히 고정 후 머리카락을 올려 묶었다. 그리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역광에 가려진 검은 실루엣이 예뻤다. 이제 그대가 강물 위로 오른다. 가볍게 노를 저으며 유유히 그대가 흘러갔다. 그대를 위한 작별의 인사는 잠시 아껴두기로 했다. 제법 기울어진 태양은 모든 그림자를 길게 만들었고 다리 위로 올라 주인보다 앞에 서 걷는 그림자를 담았다. 이제 태양은 반대편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느새 밤이 내렸다.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는 일마저 낭만이 되었다.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의 열기가 사라진 태양의 열기를 대신했다. 혼자여서 쓸쓸해 할 필요는 없었다. 같은 장소,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 그 순간이 좋았다. 흔들리고 있는 도시를 담았다. 종아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몸은 또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익숙한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작은 불빛의 숙소 간판이 선명히 보였다. 가방에서 열쇠를 찾는 것도 귀찮아 벨을 눌렀고 그대로 방으로 향해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만사가 귀찮았다. 밥을 먼저 먹을지, 아니면 샤워를 먼저 해야 할지가 그 순간의 가장 큰 고민이 되었다. 결국, 밥을 먹고 샤워를 했다. 여행은 고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복잡한 고민을 단순하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고, 내일은 뭐 하지?’
되찾은 여유에 수첩을 열어 뒤엉킨 마음을 정리했다. 모든 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스며드는 것. 그렇게 스며들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잃었던 나를 찾아낼 수 있다고. 아니면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하루를 이렇게 썼다.
크라쿠프 역사 지구
폴란드의 옛 수도인 크라쿠프는 바벨 성Wawel Castle 기슭에 역사 지구를 품고 있다. 14세기에 지은 요새의 흔적,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한 야기엘로니안Jagiellonian 대학, 유대인이 살던 카지미에시Kazimierz 지구, 폴란드 왕들이 묻혀있는 고딕 양식의 대성당 등을 볼 수 있다. 바벨 성 입구에서부터 역사적 건물들이 늘어선 고대의 왕도가 시작되고 이 길을 따라서 걷다 보면 역사 지구의 시장 광장에 다다르게 된다.
글 사진 백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