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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 소설가
소설가 김금희의 세상에선 살아내는 일에 열심인 존재들이 등장한다. 때로는 먹고사는 게 고되고 때로는 쉬이 털어두지 못한 사연이 있더라도, 한 손에는 삶을 꼭 쥔 채 힘을 풀지 않는다. 출판사 ‘무제’와 함께 ‘듣는 소설’ 《첫 여름, 완주》를 선보인 그는 어느 더운 여름날, 속절없이 떠돌던 ‘열매’를 ‘완주’라는 마을로 등 떠밀었다. 사람이 사람을 보듬고 다독이는 한 계절 속에서 이기지 못할 것은 없다. 왕성하고도 무심한 이 여름을 보내는 우리의 마음속, 구멍 난 자리를 찾아 글로 옮기는 김금희 작가와 마주했다. 그가 꺼내두는 문장들을 따라 각자의 계절을 무탈하게 그리고 온전히 완주하길 바라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첫 여름, 완주》 OST를 들었어요. 저자인 작가님을 만나기도 하고, 하늘이 푸르고 해가 쨍쨍한 오늘 날씨와도 딱이라서요.
(웃음) 아, 윤마치 님의 ‘초록’이요? 너무 좋죠? 저도 한 두세 달은 ‘무한 반복’으로 설정해 두고 들었어요. 사실 데모 버전부터 조각조각 들을 수 있었는데 그대로도 마음에 들어서 받은 파일 여러 개를 제가 임의로 붙여서 무한 반복한 거예요. 그 후에 정식 녹음된 버전도 듣고 뮤직비디오도 봤는데, 뮤직비디오는 어느 여름날 불쑥 완주(소설 속 주요 배경의 이름으로, 서울에서 기차를 타야 갈 수 있으며 댐 근처 하천이 흐르고 숲이 가까운 가상의 마을)로 향한 열매가 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어요.
책을 읽고 난 후에 보면 여운이 더욱 오래 남더라고요. 《첫 여름, 완주》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우선 소개를 듣고 싶어요. 오늘 대화에선 그간의 작업물과 쓰는 삶에 대해 주로 나눌 테니, 하는 일을 제외하고 본인을 소개해 보면 어떨까요?
(가방에서 두툼한 노트를 꺼낸다.)
그게 뭐예요? 겉면에 판다 푸바오랑 스티커들이 잔뜩 붙어 있네요.
이건 항상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인데, 소중한 푸바오 증명사진 스티커를 붙여둔 거예요. 아기 때 찍은 건데도 사진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나요. 제가 푸바오 ‘덕질’을 한 지 2년이 넘었어요. 이제는 처음에 왜 좋아했는지를 잊어버렸을 정도로 완벽하게 사랑에 빠졌죠. 그래도 이유를 꼽아 본다면… ‘강바오’,’ ‘송바오’ 사육사와의 애정 어린 관계를 지켜보면서 도리어 제가 굉장한 위안을 받았어요. 엄마인 아이바오나 동생 루이바오, 후이바오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요. 푸바오의 유쾌하고 쇼맨십 넘치는 성격도 좋아해요. 방금 하는 일에 대한 수식은 제외하고 저를 소개해 달라고 하셨죠? (다이어리의 장장을 넘긴다) 스티커와 손글씨로 가득한 페이지들이 보인다.) 저는 그냥 이런 인간이에요(웃음).
(웃음) 다이어리를 오랫동안 써오셨나 봐요. 손길이 닿은 진한 흔적이 보여요.
손때가 묻어 있죠? 이쪽은 물에 젖어서 쭈글쭈글해요. 저는 아날로그가 편한 사람이라 휴대폰 대신 다이어리에 직접 적으면서 스케줄 정리하는 게 기억에 잘 남더라고요. 스티커 모으는 것도 좋아해서 이것저것 사서 페이지를 꾸미기도 하고, 독자분들이 주신 쪽지도 붙여놔요. 월간 페이지 하단에는 달마다 이루길 바라는 걸 적어두는데 6월은 ‘휴식’이었고, 7월은 ‘담대하게’, 8월은 ‘차분한 여름 엔딩’이에요.
담대하길 바란 7월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5월 초 《첫 여름, 완주》가 출간된 이후로 내내 바쁘게 지냈어요. 이보다 더 바쁠 수 있을까 생각하던 걸 훌쩍 뛰어넘으면서요. 무엇보다 그간 익숙하게 해오던 것들과는 달리 조금은 낯선 자리, 새로운 자리가 많았는데 원체 내성적인 편이라 마음을 담대하게 먹으려고 노력했죠. 책을 낸 출판사 무제의 박정민 대표가 배우이기도 하니까 함께 화보도 찍고 그분의 팬들과 마주 서는 기회도 있었거든요. 북토크에 모인 분들 중에 여태껏 소설책은 한 권도 사본 적 없다는 분들이 계셨어요. 제가 지금껏 책을 매개로 만난 독자들은 소설이라는 장르나 책을 애정하는 분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박정민 배우 자체를 좋아하니까 처음 소설을 사고 그 자리에 온 분들도 있는 거예요. 저녁 행사가 있으면 아침부터 줄을 서시고, “처음 읽었는데 재미있어서 앞으로도 읽어보려고요.” 하며 저한테까지 애정을 나눠주시는 게 특히 감사했어요. 사람에 대한 응원과 사랑을 안고 계신 분들이다 보니 마음의 온도가 책 읽는 분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뜨겁더라고요.
《첫 여름, 완주》에서 주인공 열매는 같이 살던 절친한 언니 수미가 돈을 갚지 않고 사라지자 수미의 고향인 완주로 향하지요. 오갈 데 없는 처지였던 열매가 수미의 본가에 머물며 완주 마을 사람들과 애틋한 여름을 보내는 이야기예요. 이 책의 특별한 점은 ‘듣는 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오디오북으로 먼저 공개되었다는 건데, 어떤 기획을 제안 받은 건지 궁금해요.
들을 수 있는 소설 시리즈의 첫 번째가 되어 달라는 제안이었어요. 시각 장애인분들은 책을 접할 때 주로 음성 언어에 기대게 되는데 책 한 권이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지려면 2-3개월은 필요하대요. 또 출판계에서는 오디오북 제작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지원 사업에 선정되지 못하면 자체적으로는 꾸리기가 힘들고요. 그럼 아무리 유명하거나 궁금해도 시각 장애인분들은 책을 바로 경험하기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무제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듣는 소설을 기획해서 동료 배우들의 힘을 빌려 오디오북으로 먼저 선보이고 싶다고 했어요. 박정민 대표의 아버지에 관한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책을 만들겠다는 그 마음에서 진정성을 느꼈죠.
그래서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셨던 거군요.
맞아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저를 새로운 환경에 두고 싶었다는 거였어요. 그동안 문단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출판사들이랑만 일을 했거든요. 그런데 무제라는 백지 같은 출판사라면, 가령 지금껏 쓴 적 없지만 쓰고 싶었던 외계인 이야기를 내더라도 뜻밖으로 여겨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김금희의 또 다른 ‘서브 캐릭터’가 등장한 것처럼 듣는 소설을 재미있는 프로젝트라고 받아들여 주실 것 같고요. 함께하기로 한 뒤엔 저는 글에 매진하고, 박정민 대표는 동료 배우들을 포섭하면서 오디오북 작업에 매진했죠. 원래 중편 소설을 예상했지만 장편을 쓰게 되면서 오디오북을 만드는 데도 두 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고 해요. 무척 고생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과거 인터뷰에서 “글을 쓸 때 스스로 특정 환경에 몰아넣는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워낙 루틴 지키길 좋아하고 먼저 나서는 데 서툰 편이라, 환경을 확 바꾸지 않으면 새로운 무언가를 잘 안 하거든요. 저를 낯선 상황에 던져두고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글 쓸 때만 해당해요. 등산을 싫어해도 써야 한다면 남극이라도 갈 수 있어요. 글을 위해선 제 삶을 조정할 수 있지만 다른 걸 위해서는… 잘 안 해요(웃음).
쓰는 일이 삶의 큰 동력이겠어요. 닿는 독자가 명확한 시리즈의 첫 편으로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요?
시리즈의 시작이기에, 그 시리즈가 이타적인 목적을 가졌기에 이야기의 정도를 정하는 데 굉장히 신중했어요. 이타심은 때로는 상당히 위험해요. 사람들 마음에 무심히 자연스레 가닿는다면 가장 좋지만 핀트가 어긋났을 때는 되려 거부 반응이 올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 이야기가 음성 언어로 남는다는 점에서도 고민이 컸죠. 문학은 삶의 허무함을 드러내면서 반성적 사고를 일으키게 하지만 그런 메시지를 음성으로 듣게 된다면 읽는 것보다 더 큰 마음의 반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분노가 오가는 상황 등을 묘사하는 것도요. 과연 인물들에게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안겨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걸 타파하기 위해 박정민 대표에게 시각 장애인분들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요구했어요. 그분들의 정기 독서 모임에 참여해 기획을 설명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다루면 좋을지 여쭤봤죠.
어떤 의견들을 들려주셨어요?
우선 시제를 오가는 게 헷갈린다고 하시더라고요. 소설에선 과거나 현재로 오가는 게 매우 쉽고 그게 읽고 쓰는 묘미이기도 하지만 듣는 분들에겐 ‘갑자기 무슨 상황이지?’ 싶을 수 있죠. 그래서 《첫 여름, 완주》에서는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길게 묘사하지 않았고 지문과 대화 위주로 넣었어요. 또 처음부터 보지 못했던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분들도 계신데, 공통적으로 어릴 때 본 숲이나 나무 타던 느낌, 자연을 만끽하는 활동적인 모습들을 원하셨어요. 저도 덩달아 도화지를 채워 나가듯 감각적인 것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려고 했죠.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요.
그래서인지 “달을 비추기 위해 기꺼이 더 어두워진 연못의 물결 소리”라든가 “부후된 통나무 껍질을 쪼개며 버섯이 피는 소리”, “이불이 펼쳐지듯 밤안개가 너르게 이동하는 소리” 등 어느 여름밤 한구석을 떠올리게 하는 지문들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그 부분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독자들이 많더라고요. 특히 그 부분은 기억에 남는 게, 작업 당시 제 원고에서 오디오북으로 구현된 텍스트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어요. 보니까 딱 그 지문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더라고요. 어떤 의미인지 물어볼까 하다가, 괜히 작가가 자존심 부리는 거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웃음) 슬쩍 지웠죠. 그런데 다른 자료에서는 다시 그 부분이 살아나 있는 거예요. ‘써도 괜찮은가….’ 싶어서 지문을 다시 살렸어요. 이 이야기를 한참 뒤에 북토크할 때 말했는데 박정민 대표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자기는 그런 적 없다고!
어머나, 그럼 누가 그은 거예요?
그걸 아무도 몰라요! 사실 작업할 때는 지금보다 지문이 더 많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기고 덜어냈거든요. 그 지문을 특히 좋아해 주시는 독자들을 보면서 어떻게든 다시 살리기 잘했다 싶었어요(웃음).
여름은 비와 볕으로 만물이 생장하는 시기잖아요. 감각을 표현하기에 더욱 좋은 계절이었겠어요.
드라마를 넣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 같아요. 자연의 에너지도 폭발적이고 사람의 움직임도 많은 때잖아요. 생동성이 농축되어 있어 만물이 뒤집어지는 시기라고 할까요. 풍요로운 볕을 즐기다가도 이따금 휘몰아치는 비나 태풍에 자연의 무심함과 위대함을 느끼게 되는 게 여름이라고 생각해요. 떼인 돈을 받으러 온 열매나 아픔이 많지만 열매에게 방 한 칸, 밥 한 끼 매번 챙겨주는 수미 엄마,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중학생 양미와 친구들처럼 한여름 속 완주 마을 사람들은 유달리 특별하거나 빛나지 않아요. 저마다 품고 있는 어려움과 결손을 드러내되, 서로서로 또다시 품어주며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완성했죠.
‘어저귀’라는 캐릭터도 무척 인상 깊어요. 겉보기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숲속에 살면서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존재죠. 사백 년을 살았고 열매와 연애 감정을 나누기도 해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는 자연의 형태라고 생각하면서 어저귀를 만들었어요. 길 가다 어떤 나무를 봤다고 한다면, 겉보기엔 그냥 자라는 대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게 보통으로 여길 게 아니거든요. 삶의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서 있고, 삶을 지탱한다는 목적 이외에는 다른 꿈을 꾸지 않으니까요. 그런 자연의 형태가 곁에 항상 있는데 우리는 쉽게 잊고 말죠. 나무를 기본에 두고 반은 자연, 반은 인간인 어떤 존재를 상상해 봤어요. 태초에 인간이 어떤 형태인지는 알아도 그들의 감각까진 알 수 없는데 그 감각을 원천적으로 갖고 있는 존재가 현재에 산다면 겉은 낯설지 않아도 행동 방식은 다를 것 같았어요. 죽음과 삶을 순환하며 마주하는 인간들에게 가끔은 학을 떼기도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자연의 품을 내어주는 히어로 같은 능력도 조금은 있을 테고요. 열매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킬까 말까 조금 고민했지만… 사랑 이야기가 없다면 재미없잖아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이 둘을 연애를 시켜서 활기를 좀 줘야겠다 싶었어요.
(웃음) 어저귀는 뛰어난 후각으로 냄새 분자를 맡아 사람을 구별해요. 예를 들어 불닭볶음면 마니아인 양미에게선 캡사이신과 치킨 추출 농축액을 알아채죠. 만약 어저귀가 작가님을 본다면 어떤 냄새 분자를 느낄까요?
음, 글쎄요…. (잠시 고민한다.) 제가 아침마다 식물들에 물 줄 때 흙을 검지 손가락으로 찔러 보거든요. 그러면 본의 아니게 한 마디가 시커먼 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해요. 때가 낀 건 아니고요(웃음). 만약 아침에 저를 만난다면 손가락 끝에서 특이하게 흙냄새가 난다고 느낄 것 같아요. 그리고 늘 다이어리와 출력한 원고들을 안고 다니니까 종이 냄새도 날 거예요.
재미있네요.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하는 기분은 어떤가요?
작가라면 작품에 대한 애정은 당연하겠지만, 저는 모든 이야기를 꼭 껴안고 있는 기분으로 써요. “이거 내 거야!” 하면서요. 막상 소설이 공개되면 얘를 보내줘야 하니까 엄청난 슬픔과 상실감이 밀려오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보내줘야 다음 글이 저한테 또 오는 걸요.
올해 초에는 꿈꾸던 남극 기지에 한 달 동안 파견되어 얻은 관찰과 기록을 《나의 폴라 일지》라는 에세이로 펴내셨죠. 수많은 질문을 제쳐두고 가장 먼저 왜 남극이었는지 묻고 싶었어요(웃음).
20대 때 남극에 다녀오신 분이랑 인터뷰를 한 적 있는데 그때부터 막연하게 가보고 싶었어요. 이후에 작가가 되고 나니까 그 생각이 실현 가능해 보이더라고요. 단순히 남극이 아니라 소설 배경으로 점찍어둔 세종 기지까지 가려면 관광이 아닌 공익 목적을 가진 정식 파견이어야 했어요. 《한겨레》에 남극에서의 이야기를 연재하기로 하고 기지 방문을 위해 수많은 서류와 자격을 갖췄죠. 예를 들어 외교부와 환경부에는 내가 남극에 갔을 때 환경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리포트를 써야 했고요. 세종 기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려면 직접 두 발로 걷거나 대부분 보트를 타니까 수상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언제든 바다에 떨어질 수 있으니 어떻게 하면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을 것인지 아는 게 필수인 거죠. 1박 2일이었지만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힘든 교육에 열심히 임했어요.
열네 시간을 비행한 뒤 경유지를 거쳐 다시 열네 시간을 날아 남극에 도착했죠.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여전히 마음속에 선연한 남극의 풍경도 있을 테고요.
아직도 생생하죠. 남극은 자연이 만든 지리적 경계 이외에는 어떠한 인위적인 경계도 없어요. 국경도 화폐도 주인도 없는 공간, 시끌벅적한 지구상에 무엇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트였어요. 그리고 무척 평화롭거든요. 서울에서 비둘기 보듯, 길을 걸으면 펭귄이나 물개를 쉽게 만나는데 처음엔 신기하다가도 며칠만 지나면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서 사람이나 동물이나 각자 할 일 하면서 지냈어요(웃음). 제 할 일은 글쓰기였지만, 실은 다이빙하는 대원들 따라다니거나 ‘식생 팀’의 일원이 되어 식물 탐구하고’ 매일 띄우는 대기 관측용 풍선을 관찰하느라 바빴죠. 그곳에서 한 달을 보내면서 인간은 자연에 완전히 속해 있다는 걸 깨달았는데요. 거대한 자연을 경험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허해지게 되더라고요. 또 인간은 ‘남극 취약종’이에요. 그곳에서 죽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존재라 경각심을 갖고 살아남기 위한 룰을 따라야 하죠. 반드시 2인 1조로 다니고 날씨가 나쁘면 아예 기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만약 매일 아침마다 기상을 파악하는 대원이 “오늘은 못 나갑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준비했든, 그날엔 우리가 계획한 일을 할 수 없어요. 자연이 결정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시간인 거죠.
남극으로 가는 먼 길에 단 두 권의 책만 챙기셨다고요. 하나는 영국의 탐험가 스콧의 《남극일기》, 다른 하나는 작가님의 첫 장편 소설 《경애의 마음》이었어요.
사실 스콧의 《남극일기》는 남극에서의 탐험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야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하필 왜 그런 책을 가져갔는지(웃음). 《경애의 마음》은 남극 기지에 도서관이 있다고 해서 한 권 기증하려고 챙겨 간 건데요. 지금은 그곳이 인터넷도 되고 영화도 볼 수 있어서 즐길 거리가 있는데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대요. 책 구매 예산이 나오면 매번 100만 원어치씩 책을 사서 방 한 칸에 도서관을 꾸린 거죠. 도서 대장이 있어서 빌리고 싶은 책과 날짜, 이름을 적으면 되더라고요. 《경애의 마음》은 제 작품 중 가장 만족스러워서 기증하기로 한 건 아니에요. 누구나 처음은 좀 서툴고 만족스럽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정말 열심히 썼거든요. 매일 예닐곱 시간씩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앉아 최선을 다해서 쓴 책이에요. 마음에 오랫동안 남은 작품이라 세상 끝에 자리한 남극 도서관에 보존하고 싶은 마음으로 두고 왔어요.
세상의 끝에도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요. 어떤 상황에 놓이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책이나 영화처럼 푹 빠질 만한 거리들이 필요한가 봐요.
그럼요. 다녀온 후로도 함께 머물던 대원들과 종종 연락을 나누는데, 얼마 전 한강 선생님께서 노벨문학상을 타셨잖아요. 그래서 기지 안에서도 도서관 붐이 일어났대요(웃음). 작가님 책이 단 세 권 있었는데 거기 머무는 열여덟 분이 서로 읽겠다고 아우성이었다는 거예요.
아이고(웃음). 뜨거운 이맘때 돌아보면 마치 별나라에 다녀온 기분일 것 같아요.
여기서의 일상을 가져간 게 아니라 그곳에서만의 삶을 새롭게 꾸린 거라 정말 재미있었어요. 함께한 이들과 돈독해지고 맛있는 음식도 잘 챙겨 먹으면서 살도 많이 쪘고요. 지인들과 여행 얘기 나눌 때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물어보면 저는 곧장 남극이라고 답해요.
너무나 부러운 답변이네요(웃음). 올해 작업물에 대해 지금까지 긴 이야기를 나눠주셨는데 작가님의 쓰는 생활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 간단히 챙기고 자주 가는 카페로 가요. 저는 무조건 집 바깥으로 나가야 글이 써지는데, 하루 중에서도 특히 오전은 머리가 맑고 집중이 제일 잘될 때라 꼭 소설을 쓰죠. 오전 작업을 잘 마쳐야 나머지 시간에 마음이 편해요. 점심을 먹은 후에는 급한 작업이 있다면 또 다른 카페로 이동하고, 그렇지 않다면 집으로 돌아와 자료를 읽는데, 할 일을 마치면 그제야 보고 싶은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마쳐요. 직장 다닐 때부터 작가가 된 지금까지 하루에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이는 생활이 꾸준히 이어져 왔어요. 지금도 단편을 하나 쓰는 중인데, 어떤 날은 잘 쓰다가 반대로 어떤 날은 써지지 않아 괴로운 날도 있죠. 그렇지만 저한테는 몇 줄 썼느냐보다 시간이 중요해요. 두 문장을 쓰든 세 문장을 쓰든 정해진 시간부터 쓰려고 노력했으면 더 이상 안달복달하지 않아요. 쳇바퀴 돌 듯 임하고 있어요.
그래서 본인을 “글쓰기 숙련공”이라고도 표현하신 거군요.
(웃음) 맨날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최대한 기술을 발휘해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저녁 챙겨 먹고 하루가 끝나니까요.
소설가가 되기 전엔 편집자로 오랫동안 일하셨죠. 계기가 있었나요?
어릴 때부터 꿈이 작가였지만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을 한 거예요. 그래도 책과 가까운 일을 하고 싶어서 편집자가 되었는데, 문학 출판사는 절대 가기 싫더라고요. 질투 때문에(웃음). 그때의 저는 등단하지 못했는데 문학을 다루면 자괴감이 들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철학이나 역사, 인문서 내는 출판사에 지원했어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원서에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적은 거예요. 일할 사람을 뽑는 면접에선 굉장히 불필요한 말이었겠죠(웃음)? 하지만 사장님께서 저를 부르더니 잘 찾아왔다고 하셨어요. 소설을 쓰려면 그 바깥의 것을 읽고 배워야 한다고요. 백 년 전 세워진 창경궁 내 대온실과 역사적 사연, 사건이 얽히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거예요.
《너무 한낮의 연애》 속 ‘양희’를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로 꼽으셨던 게 떠올라요.
양희는 주로 말도 없이 혼자 있고 되게 재미없는 희곡을 완성하려는 인물이에요. 예술가로서의 꿈을 가진 내성적이고 가난한 사람이죠. 제가 20대 때 말이 정말 없었어요. 오죽하면 같은 과 친구들이 “야, 김금희라는 애랑 대화해 본 적 있어?” 이럴 정도로요.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국문과에 갔는데, 국문과에는 쓸 만한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는 수업이 없다는 걸 대학 가서야 알았거든요. 혼자 심각하게 소설이나 그걸 쓰는 과정에만 몰두하니까 인간관계도 서툴렀죠. 당시엔 저에게 소설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되려 소설에 대해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곧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언제 글을 쓸 수 있을까, 초조함과 무기력함이 양희와 많이 닮았었죠.
경험에서 비롯된 얄팍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는 글쓰기나 책과 가까운 어른이 되려면 어린 시절의 습관과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작가님은 어땠어요?
맞아요.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어요. 그래서 밥 먹을 때도 책을 읽었는데, 어리니까 먹으면서 다 흘린 거예요. 책마다 펼쳐보면 찌개 국물 묻어 있고 그랬죠(웃음). 책을 읽으며 세상에 대한 이해나 안정감,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기쁨의 감각을 배웠어요. 지금도 책을 좋아하는데 뭐랄까, 심장을 뛰게 한달까요? 내가 모르던 세상과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려요. 도서관에 가면 몸이 막 반응해요. 이렇게 많은 책을 하나씩 들춰보기만 해도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흥분되고 초조해져서 배도 아프고요.
(웃음) 어떤 느낌인지 단번에 공감해요. 그럼 최근에 읽은 책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얼마 전 남해에 가서 책을 샀는데, 남해의 유명한 특산물을 담은 시리즈였어요.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중 하나가 시금치에 관한 건데, 시금치에는 ‘암시금치’와 ‘숫시금치’가 있대요. 암시금치가 더 크다는데 아니 세상에, 이게 말이 되나요? 책을 안 읽었다면 하마터면 모르고 죽을 뻔했잖아요! 인류의 엄청난 비밀을 안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웃음).
오늘부로 저도 세상의 비밀을 하나 더 깨우쳤네요. 읽고 쓰는 일을 오랫동안 사랑해 온 작가님이 스스로 ‘작가’를 정의한 문장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의미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잠시 생각한다.) 때로는 저도 위안받고 싶거든요. 글쓰기를 통해서, 글을 매개로 나를 개방해서, 그 개방을 통해서 위안받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근데 엄밀히 말해 소설은 작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런가요?
왜냐하면 일기가 아니잖아요. 작가가 쓰고 있지만 소설이라는 도구와 인물이라는 대리자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중인 거죠. 글쓴이를 내세우기보단 도구와 대리자가 떳떳하고 오롯하게 서 있는 게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거리감을 유지해야 작품의 성공이 나만의 것이라며 나르시시즘에 빠지지도 않을 테고요. 물론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나를 완전히 빼고 쓰는 게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제 진심으로는 하기 어려워요. 제가 항상 고민하는 자리의 문제, 노동의 문제, 살아감의 문제에 대해 연관 없이 쓴다면 분명 거짓말이고 인물에게 영양분을 덜 내어준 거죠. 나를 어느 정도 투사할지, 진전에 필요한 것들을 화자에게 얼마나 선택하게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수없이 되뇌는 게 작가라고 생각해요.
쓰는 이와 완전히 똑 닮을 순 없겠지만, 자신의 조각을 넣을수록 글에선 생동감이 느껴질 것 같아요.
그럼요. 《첫 여름, 완주》를 쓸 때도 그랬어요. 쓰기 전엔 제 글에 이타적이라는 목적이 뚜렷하게 보일 거로 생각했는데 쓰고 나니까 무엇보다 저 자신이 솔직하게 들어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성우로 일하는 열매가 목소리가 안 나오니까 온갖 병원에 다니다 결국 정신과로 향하거든요. 종합 심리 검사인 ‘풀 배터리 검사’를 받고 나서 의사가 이렇게 말해요. “단기 기억력을 보세요. 백 명 중에 구십팔 등입니다. 이런 말 요즘 쓰면 안 된다지만 옛날이라면 바보라고 놀림 받았을 정도예요.” 그게 실은 제가 의사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에요(웃음). 스트레스나 우울증과 관련된 신체화 문제를 다룰 때 ‘그런 검사가 있었지, 결과를 듣는 도중에 의사가 그런 말을 했었지.’ 하며 제가 직접 경험한 걸 솔직하게 다 써넣을 줄 몰랐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이야기가 구체화하면서 더욱 두터워지고 재미있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실된 것”이라는 작가님의 문장이 다시 한번 떠오르네요. 한 편을 완성하기란 고되고 지난하고, 치열하기까지 한 과정이겠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건 끈기예요. 오래 하면서 숙련되었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라 늘 막막하거든요. 그래도 저는 일단 시작한 원고는 어떻게든 끝을 봐요. 지금 쓰던 게 막혀서 다른 소설로 도망가고 싶잖아요? 그럼 그 소설에서도 결국 막히는 지점이 분명히 오거든요. 완성하는 데까지 늘 허들이 있고 어려움이 있으니까, 사람을 막 쥐어짜는 듯한 과정이 지나야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죠. 아마 소설뿐 아니라 모든 글이 그럴 거예요.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니까 완성 지을 수 있는 끈기와 그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그 고독감을 감당할 수 있는 끈기가 필요하죠.
지금까지 이야기를 짓는 일에서 어떤 슬픔과 기쁨을 발견하셨나요?
소설은 늘 즐겁고 인생이 만족스러운 인물들이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삶의 연장선 위에 조금은 힘들고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니까 우리는 소설을 읽어요. 그래서 그 아픈 주인공을 빚어내야 할 때 똑같이 아픈 감정을 느껴요. 제가 요 며칠 작업하고 있는 장면은 모처럼 알바 자리를 찾은 10대 청소년이 어떻게든 잘해보고 싶어서 노력하는 부분이에요. 애쓰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 냉랭한 그 분위기와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을 저는 알고 있잖아요. 개인적으로 보면 제 일상에는 변화가 없는데 글이 만든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저는 어른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작은 청소년이 되어 있죠. 너무 마음 아프지만 그려내야 해요. 왜냐하면 그리는 데 목적이 있으니까요. 소설 하나로 엄청난 변화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바꿔보자는 목적이요. 소설을 완성한 후에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마음이 통했다는 걸 알게 되면 과분하게도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돼요.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감정이 오르내리는 게 일상이에요.
(잠시 고민한다.) 행복한 사람들만 나오는 소설은 아무도 안 읽을까요?
조금 빈정 상하지 않을까요? 그건 가짜니까요. 우리 삶이 그렇지 않은걸요.
책과 쓰는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어 기뻤어요. 한동안 뜨거운 볕이 이어질 텐데 남은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세요?
제가 떠나보낸 《첫 여름, 완주》가 여름을 만끽하는 책으로 소개되기도 하더라고요. 책 안팎으로 벌어진 새로운 만남을 떠올리며 시끌벅적하고 재미난 에피소드가 기록된 책으로 기억하려 해요. 독자분들도 저와 같다면 좋겠네요. 그리고 남은 여름에는 지금 쓰고 있는 단편을 부지런히 완성해 볼게요. 다이어리에 써놨듯 ‘차분한 여름 엔딩’을 맞이할 수 있도록요.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