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음식 애호가가 발리에서 사는 법

발리의 맛

발리의 맛

길거리 음식 애호가가 발리에서 사는 법

발리는 전 세계에서 건강 음식 트렌드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로컬 푸드 애호가들에게는 조금 곤란한 도시다. 당신이 트립어드바이저에 안 나오는 발리의 길거리 식당에 들르기로 결심했다면, 행운을 빈다.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행운이 필요한 순간이다.

슈퍼푸드 트렌드의
전시장

발리는 서구식 건강 음식의 천국이다. 우붓, 짱구 등 번화가에 가보면 오트밀과 베리가 듬뿍 든 스무디, 글루텐 프리 피자, 아보카도 샌드위치, 지중해 샐러드, 팔라펠을 응용한 비건 버거 등 트렌디한 건강식을 파는 카페가 줄지어 서있다. 유럽의 은퇴 이민자들이 몰려드는 사누르에는 신사동과 한남동에서 월세 보증금 담보 잡히고 먹어야 되는 수준의 스테이크, 파스타, 젤라또를 저렴하게 파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고, 발리의 청담동이라 불리는 스미냑에서는 싱싱한 굴 요리와 샴페인을 파전에 막걸리 한 잔 걸치듯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다 서울에 돌아가서 알량한 브런치 나부랭이를 먹고 2만 원을 낼라 치면 ‘한국 물가 이대로 좋은가?’라는 심각한 회의가 든다. 단기 여행자라면 그것만으로도 발리를 찾는 보람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나처럼 편도 티켓을 끊어서 이곳에 온 장기체류자고, 밀보다 쌀을 좋아하고, 요거트와 마요네즈 없인 살아도 고춧가루 없인 못 사는 아시아 입맛 보유자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발리식 미각 마비
레시피

나는 여행 다닐 때 정보서에 나온 힙한 맛집보다 이름 없는 동네 식당을 선호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인도네시아 서민 음식은 태국이나 베트남처럼 다채롭지 않다. 현지식을 파는 작은 식당을 여기선 ‘와룽’이라 부른다. 벽에 파리똥이 덕지덕지 묻고 낡은 선풍기가 골초처럼 쿨럭거리며 돌아가는 테이블 두어 개짜리 와룽이 골목마다 있다. 메뉴는 한 접시에 밥과 반찬이 함께 나오는 나시짬뿌르, 볶음밥에 달걀 프라이를 얹은 나시고랭, 볶음국수인 미고랭이 기본이다. 조리는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식당 창고나 부엌 바닥에 쌓인 것들 중 씹을 수 있는 걸 골라 삶거나 찌거나 굽거나 볶거나 튀긴다. 그것이 위생을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인 양, 혹은 재료 고유의 특성을 지워버리는 게 애초 요리의 목표인 양 푹 익힌다. 

고기의 질감은 마분지에 가깝다. 여기에 고추, 마늘, 코코넛, 각종 허브를 잔뜩 집어넣는다. 바싹 타서 새카매진 양념은 파리 시체와 분간이 어려워서 자꾸 움찔거리게 된다. 여기에 소금과 MSG, 삼발 소스를 듬뿍 뿌린다. 짜잔, 발리식 미각 마비 레시피가 완성된다. 현지어 한마디 못 해도 살아가는 데 지장 없는 세계적 관광지라고 해도, 이곳은 여전히 시골이다. 한국 시골에도 벽지엔 땟국물이 졸졸 흐르고 미원과 소금을 삽으로 퍼서 넣었나 싶은 엉터리 식당이 쌔고 쌨지 않나. 물론 여기에도 미식이란 것이, 있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요?

“발리는 해산물 천국이잖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여행사 패키지로 발리를 다녀간 것이다. 중국과 한국 단체 관광객이 아니면 누가 밥 한 끼 먹자고 차를 잡아타고 리조트 단지 짐바란까지 간단 말인가. 나도 한국인 열두 명과 출장 와서 광활한 테이블에 새우를 산처럼 쌓아놓고 맥주를 들이킬 때는 ‘역시 섬이라 해산물이 싸고 맛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부유한 화교들이 여행사와 연계해 단체 관광객 대상으로 운영하는 식당이 아니고서야, 수시로 싱싱한 해산물을 공수받아 조리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곳은 여기에 없다. 대신 집집마다 마당이 있고 마당에는 닭이 돌아다닌다. 마을마다 돼지와 소가 똥파리를 먹인다.

언젠가 발리에 놀러 온 친구가 ‘렌당’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렌당이 CNN 선정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1위’로 꼽혔다고. 발리에 몇 달을 살고도 들어본 적 없는 음식이었다. CNN은 별걸 다 선정하네, 싶으면서도 궁금해서, 관광객이 바글거리는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그것을 시켜봤다. 코코넛 밀크와 다양한 향신료로 만든 커리 소스에 쇠고기를 넣고 부드럽게 조린 것이다. 그런데 그건 동네 와룽에서 나시짬뿌르로 매일 먹던 음식이었다. 불고기도 아니고 반찬으로 먹던 쇠고기 장조림이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꼽혀 레스토랑 메인 디시로 독립한 느낌이랄까.

발리 사람들이 그보다 특별한 요리로 치는 것은 바비굴링이다. 돼지 배 속에 양념을 가득 넣고 꼬치에 꿰어서 천천히 돌려가며 불에 구운 요리다.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하고 동남아 특유의 향신료가 깊이 배어 있다. 혹자는 그것을 ‘인도네시아 요리의 극치’라 부른단다. 하지만 역시 주식으로는 버겁다.

그래도
와룽

길거리 음식 애호가인 내가 처음 몇 달 동안 발리에서 저녁으로 즐겨 먹은 음식은 사테 아얌이다. 사테는 꼬치구이, 아얌은 닭고기다. 나는 인도네시아식 사테 요리를 안 좋아한다. 대개 고기를 갈아서 만들기 때문에 식감이 부들부들해서 덜 익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 사는 동안 딱 한 곳, 고기를 한 입 크기로 썰어 쫄깃하게 구운 집을 발견했는데, 그곳을 일주일에 서너 번씩 갔다. 우붓 번화가에서 100미터 거리지만 구글맵에도 안 나오고 간판도 없는지라 관광객은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다. 밤에만 문을 열고 엄마, 아빠, 딸 둘이 함께 일했다.

단골 중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동네 청년들이 있었다. 밤이 깊으면 청년들은 맥주를 사다 마시면서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불렀다. 발리의 뮤직바에서 지겹게 흘러나오는 양수리 느낌 레게나 팝 커버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모던 포크였다. 사테를 굽는 데는 20분이 넘게 걸린다. 주문을 하고 길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흐릿한 가게 조명과 담배 연기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아무런 격식도 갖추지 않은 청년들이 거친 목소리로 부르는 내용 모를 이국의 유행가를 듣곤 했다.

언젠가 이 집에서 사테와 함께 먹으려고 아락을 찾은 적이 있다. 한국의 전통 소주와 비슷한 술이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아락?”, “아락이라고?”, “쟤가 아락을 찾아?”, “그럼 사다줘야지.” 그 수군거림에는 ‘기특하다’, ‘대견하다’라는 뉘앙스가 배어 있었다. 한국말 한마디 못 하는 서양인이 정읍 재래시장 순대국밥 집에 나타나서 송명섭 막걸리를 찾는 상황이랄까. 주인은 잠시 기다리라더니 빈 생수통을 들고 스쿠터를 타고 나가 어디선가 아락을 구해왔다. 주인 가족과 나는 어설픈 영어로만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들은 내가 나타나면 ‘늘 먹던 그거’를 만들어주었고, 음식 가격을 올린 뒤에도 종전 가격을 그대로 받았고, 내가 우붓을 떠난다고 할 땐 모두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종종 잡지에 발리 가이드를 쓰고, 여행 오는 친구들에게 맛집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 사테 집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벽에는 파리똥이 덕지덕지 끼고 낡은 팬이 털털털 돌아가고 구글맵에도 안 나오는 이름 없는 와룽이니까. 사실은 이것이 내가 구글맵과 트립어드바이저와 잡지 따위의 정보를 믿지 않는 이유다. 요즘 관광객들은 발리를 오토바이 소음과 매연, 호객꾼으로 가득한 시끄러운 도시, 요가도 레스토랑도 공예숍도 모두 상업화되어 로컬의 정취라곤 없는 도시로 기억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우붓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비즈니스 마인드 대신 우정을 담아 손님을 대하는 이름 없는 와룽들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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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