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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휴가처럼 보내는 법
긴 바르셀로나
휴가를 통해 배운 것
오늘을 휴가처럼 보내는 법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나기 위해 점심시간에 맞춰 오랜만에 회사 앞으로 갔다.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화 중간에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린다. 처음 듣는 말인데 신조어인가 싶다. “워라밸이 뭐야?”,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를 줄인 말이야.”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 화두라고 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일. 저녁이 있는 삶.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런데 그 후로 한동안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문득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가 살던 바르셀로나가 떠올랐다. 워라밸의 다른 이름은 바르셀로나가 아닐까. 그곳에서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2년 간의
긴 휴가
바르셀로나에서 2년을 살았다. 외국에서 사는 건 조금 긴 여행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유럽식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낯선 시장에서 장을 보고, 새로운 재료로 요리를 하게 되겠지, 기대했다. 낯선 골목이 점점 익숙해지고, 돌아와 그 골목을 그리워하는 일이겠구나, 예상했다. 한국의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오래 붙들려있던 고민들에서 홀가분해지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드디어 긴 휴가를 얻었구나 여겼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12년을 개근했다. 비교적 성실하게 대학을 다녔으며, 졸업 후 늦지 않게 취업을 했고, 남들과 비슷한 나이에 결혼했다. 꼬박꼬박 출근했더니 어느새 과장이라는 직책도 갖게 되었다. ‘과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던 어느 날 퇴사를 했다. 누군가는 용감한 결정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거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용감하게 가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었을 뿐이었다. 가던 길에서 멈춰 쉬었을 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별일은 없을 거라고 낙관했다. 사실은 굶어 죽기야 하겠어 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긴 휴가를 보낸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은 금방 지나갔다. 2년이 지나고 바르셀로나에서 돌아와 다시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기대하던 시간을 보냈느냐고 묻는다면, 기대하지 않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대답하겠다. 외국에서 산다는 건, 그들의 시간대로 하루, 한 달, 일 년을 보내는 것이고, 살아야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잃은 것은 승진과 연봉이었지만, 얻은 것은 생활 방식이었다. 휴가를 내야만 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상에서도 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배웠다.
하루에
두 시간
스페인에는 ‘시에스타Siesta’ 문화가 있다. 하루 24시간 바쁘게 돌아가는 지금도, 스페인 사람들은 낮 동안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 하던 일을 멈추고 쉰다. 시에스타는 ‘낮잠 자는 시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람에 따라 낮잠을 자기도 하고, 점심을 오래 먹기도 한다. 물론 점심을 먹고 이어 낮잠을 자기도 한다. 그 긴 시에스타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썰렁한 골목을 벗어나 가까운 공원으로 가보면 된다. 식당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천천히 점심을 먹는 사람도 있지만, 바게트 샌드위치 같은 도시락을 들고 근처 공원 벤치로 가는 사람도 많다. 가끔은 접이식 의자를 들고 해변으로 가기도 하고, 집에 들러 개와 산책하기도 한다. 아무튼 일은 하지 않는다. 쉰다.
그래서 여행 와서 한창 돌아다닐 시간인 2시에서 4시 사이에 바르셀로나 거리를 걷다 보면 절반 이상의 가게가 아예 셔터를 내린 채 문을 닫아놓은 걸 볼 수 있다. 약국도 슈퍼마켓도 시장도 모두 닫기 때문에, 느지막이 일어나 뭐라도 살까 싶으면 언제나 ‘아, 맞다 시에스타.’ 하며 다시 주저앉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내 하루도 덩달아 금방 가버린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은 “이 사람들은 대체 언제 일하는 거냐.”고 묻곤 했다. 그 질문에는 주로 부러움이 담겨있지만, 게으르고 한심하다 여기는 시선이 들어있는 경우도 많았다. 11시 정도에 천천히 문을 열고, 2시부터 4시까지 쉬고, 잠깐 다시 문을 열었다가 6시쯤 닫는 상점들이 나도 처음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2년의 시간 동안 천천히 익숙해졌다. 스페인 사람들은 남들 일하는 낮에 몇 시간 더 쉬면서도 다들 잘 지낸다.
일 년에 한 달,
일주일에 하루
다른 많은 유럽 사람들처럼 바르셀로나 사람들도 여름이면 한 달 이상 휴가를 떠난다. 그렇다고 여름이 못 견디게 무더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한국과 비슷한 온도인데 습도는 낮아 쾌적한 편이다. 아무튼 30도를 조금 웃도는 한여름, 8월에 영업을 하는 로컬 상점은 아주 드물다. 관광객들이 모이는 카페나 레스토랑도 예외가 아니고, 하다못해 아이스크림 가게도 여름마다 문을 닫는다. 매일매일 아침을 먹으러 가던 집 앞 빵집이 8월 한 달 동안 여름휴가를 가도 불평하지 못했다. 당연한 것을 아쉬워하는 순간 이방인이 되는 것 같았으니까.
또한 계절과 상관없이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다 같이 쉰다. 우리나라처럼 은행과 관공서만 쉬는 게 아니라 백화점도 문을 닫고, 브랜드 매장도 셔터를 내리고, 마트와 시장도 닫는다. 서점 같은 공간도 영업을 하지 않는다. 카페라테를 맛있게 만드는 작은 카페도 모조리 문을 닫는다. 그래서 친구와 일요일에 약속을 잡으면 갈 곳이 없어 한참 헤매야 한다. 그러니 일요일이면 공원에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그래서인가, 바르셀로나에는 공원이 정말 많았다. 주말이면 공원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저마다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개와 공놀이를 하기도 하고, 요가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고, 책을 읽고, 낮잠을 잔다. 나는 공원을 가로질러 걸을 때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겠구나, 쇼핑을 하거나 카페를 가고 영화를 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구나, 생각하곤 했다.
다시 돌아와
길을 걸으며
가던 길을 멈추고 잠깐 딴짓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 사실은 우리도 우리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마침 간 곳이 바르셀로나였고, 그곳에는 몸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르셀로나에서 출퇴근을 하는 생활인이고, 나는 하는 일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는데도 그들이 나보다 더 잘 쉬며 살았다.
세계에서 가장 잘 쉬지 못하는 나라에서, 잘 쉬는 걸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나라로 와서 사는 동안, 성격 급했던 나는 일이 몰아치는 순간에 한숨 돌리는 법을 배웠고, 무리하게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는 한 나도 꽤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 글을 쓰다가 졸음이 밀려와 잠깐 쓰는 걸 멈추고 이불을 펴고 낮잠을 잤다. 시에스타!
요즘 나는 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지만 차장이고 팀장인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꼭 그래야 한다면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과 비교하는 편이 낫다. 걷다 멈추지 않아도 쉬는 법, 걸으면서 동시에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친구들. 목적지는 길 끝에 있는 게 아니고, 휴가처럼 보내는 오늘에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