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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누벨바그 유일의 여성 영화감독이자 사진가, 투쟁하는 존재 곁에서 응원과 유머를 더하던 예술가, ‘AGNES V.’라 쓰인 접이식 의자에 앉아”컷!”을 외치다가도 벌떡 일어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던 개척차…. 그럴싸한 수식을 하나씩 붙여보지만 그 사람은, 그의 기록에는 바르다라는 이름뿐이면 충분하다.
3층까지 관객이 들어찬 대극장. 수백수천 개의 시선은 무대 중앙으로 쏠린다. 그 가운데 놓인 건 ‘AGNES V.’라 적힌 접이식 의자 하나뿐. 웅성거리던 공간은 나이가 지긋한 한 여성이 들어서니 고요해진다. 가로로 반을 나눠 은색과 붉은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를 분명히 바라보는 진회색 눈동자, 그는 아녜스 바르다이다. 아녜스가 그날 그 무시무시한(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무대 위에 올라선 건 바르다를 말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기록으로 자신을 말하기 위해, 객석을 채운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던 그가 이윽고 말문을 연다. 숱한 해를 거듭하며,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것이 있다며.
이어서 바르다는 〈얀코 삼촌〉,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방랑자〉 등 자신이 만든 필름 몇 가지를 꼽아 호명하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돌아본다. 바르다와 함께 일컬어지던 ‘누벨바그Nouvelle Vague’ 영화 사조는 관습적인 제작 시스템에서 벗어나 생동감을 가진, 나아가 낯설고도 날것의 느낌인 창작물을 추구했다. 정형적인 프레임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대임에도 영화를 만드는 ‘여성’으로서 존재가 불리지 않는 날도 많았지만 연대와 존중, 유머를 벗 삼아 꾸준히 카메라를 들었다. 바르다는 같은 장면을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는 컷을 즐겨 썼고, 관객 곁에 있고 싶다는 바람으로 불쑥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밝던 장면이 점차 어두워지는 ‘페이드 아웃Fade-out’ 기법에서는 검정이 아닌 파랑, 빨강, 보라 같은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표현으로는) ‘당황스러운’ 색을 사용해 시선을 환기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정도正道가 없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바르다는 영화 인생 65년간 영감과 창작, 공유에 거침없었다. 나를 잃는 것은 상상보다 쉽다. 생각을 기록하지 않고 마음의 말과 다르게 행동하며, 기다림을 영원한 미덕이라 여기며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다움은 요원해진다. 바르다는 이념이 충돌하는 세상의 와중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무던히 찍어냈다. 다큐멘터리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속 그의 말을 빌려 두 편의 영화를 회상한다.
오후 5시. 운명을 점치고 싶은 클레오는 타로 카드 한 장을 뽑아 점술사에게 내민다. 뒤집는 순간 보이는 건 커다란 낫을 든 해골. 바닥에는 사람의 머리와 손발이 나뒹군다. 점술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카드의 의미가 ‘죽음’이 아닌 ‘큰 변화’라 말하지만, 방금 의사에게 검진을 받고 최종 진단을 기다리던 클레오는 사색이 된다. 죽음에 겁을 먹은 탓인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를테면 번호판이나 새로 산 모자, ‘건강’이라는 간판까지)이 전부 죽음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한순간에 공허해진 몸을 간신히 부축하며 비참함과 두려움에 잠겨 영겁을 보내지만, 실은 채 30분도 흐르지 않았다. 거기다 중요한 건 아직 불치병이라는 진단도 나오기 전. 그 사실과 더불어 클레오는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게 인간의 삶이라는 걸 잊은 듯하다.
영화가 만들어진 1960년대는 수많은 공포가 도사렸다. 특히 병과 죽음을 향한 두려움이 컸다는데, 뜯어보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아닐까 싶다. 때때로 인간은 모르기에 통제할 수 없는 사실과 감정이 한데 뒤섞이며 중심을 잡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다. 시각과 분, 초 단위로 계산할 수 있는 객관적 시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마구 흔들리는 와중에는 나와 다른 이들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낀다. 바르다는 클레오의 객관적, 주관적 시간을 한데 아울러 표현하기 위해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는, 안뜰을 걷는, 거리를 가로질러 공원으로 향하는 내내 편집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열 걸음을 걸었다면 그 모든 걸음을 필름에 담았다. 바르다에게 멀리 보는 것은 자신다운 ‘영화 쓰기’가 아니었다. 등장인물과 관객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기로 결정했기에, 쉽게 좌절하고 또 쉽게 행복을 말하는 클레오가 어느 날의 자화상처럼 닿는다.
부드러운 햇살이 풍성하게 내리쬐는 곳에서 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 남자와 여자. 남편 프랑수아는 아내 테레즈,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산다. 주말에는 근교로 나가 숲속에서 낮잠을 청하고 아내와는 변함없는 사랑을 나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라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비극이다. 프랑수아는 우체국 직원인 에밀리와 사랑에 빠져 두 배의 행복을 얻지만, 테레즈는 다르다. 테레즈가 죽음을 선택한 후, 행복한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는 에밀리가 채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프레임에서 빠져야만 하는, 그 빈자리를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모습은 새로운 종류의 공포 영화처럼 느껴진다. 모든 장면이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괴하다.
이제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오래된 행복을 떠올려 본다. 남녀의 사랑, 자연을 즐기고 귀엽게만 쑥쑥 크는 아이들, 햇살과 초록이 풍부한 땅에서 보내는 여가까지. 〈행복〉에서 바르다는 고전적인 행복의 전형을 드러내기 위해 인상파 화가들이 세상을 그려내는 시선을 빌렸다. 그리곤 현실에서 보기 드문 갈등과 인내와 고통이 없는 영화 속 아름다운 가정을 ‘창조’했다. 그 아름다움에 깜빡 속아 불평을 늘어둔 관객이 많았는지, 바르다는 〈행복〉을 말할 때 자신의 모든 영화가 잘된 건 아니라며 소개하곤 했다. “예쁜 여름 복숭아지만 안엔 벌레가 있다.”는 말도 함께. 시각적인 즐거움에만 몰두하는 관객들의 기대를 기꺼이 배신한 바르다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충실한 행복은 무엇인지, 행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지, 그렇다면 행복이라 판단하고 기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자신의 기록을 통해 현실과 문제의식을 교묘하게 휘저어 두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일에 절대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 바로 바르다니까. 아름다움을 한 꺼풀 벗겨낼 용기를 그에게, 벗겨낸 그 자리를 응시할 수 있는 힘을 그의 기록에서 얻는다.
에디터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