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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세랑
기꺼이
함께 읽고 싶어요
소설가 정세랑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은 온 감각이 활자가 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자기만의 고요한 세계를 타인에게 전달하기까지 숱하게 많은 단어를 고르고 비교하고 무게를 쟀을 것이다. 여러 질문 끝에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기꺼이 함께 있고 싶고, 기꺼이 함께 읽고 싶은 그녀는 정세랑이다.
Interview
소설가 정세랑
“모두가 예민하게, 타인을 해치지 않고 섬세한 언어를 배워가면서 확대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나쁜 말들이 탈락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얻는 기쁨이 있고, 그런 데에 일조를 하고 싶기도 해요.”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보건교사 안은영》의 영상화 대본을 쓰고 있어요. 평소에는 혼자 작업했는데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과 공동 작업을 하는 거잖아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죠.
이번에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으셨어요. 예상하셨나요?
전혀 예상 못 했어요. 기사를 통해서 후보로 올랐다는 걸 알고 굉장히 기뻤는데, 운도 있던 것 같아요. 전혀 안 믿겼어요. 무척 감사하죠. 상을 받으면 자유로워지는 부분이 있어요. 제가 어떤 선택을 해도 상이 뒤에서 버텨주는 거죠. 한 예로 상을 받으면 한동안 악플이 사라져요(웃음). 오락을 위한 소설도 썼고, 주제 의식을 가진 소설도 썼죠. 저의 이런 갈 지之자 걸음을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네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너를 중요한 작가라고 생각한다.’라고 포용해주는 것이니까요.
작가님은 장르 소설로 데뷔했다고 하셨죠?
장르 소설을 무척 좋아해요. 판타지를 선호하죠. 특히 여자 괴물 판타지요. 이상한 능력이 있는 여자 주인공 이야기를 단편으로 쓰곤 했어요.
역사를 전공하셨는데, 장르 소설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생각해보면 고전문학은 전부 판타지예요. 제게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죠. 고전 소설이 굉장히 흥미로웠거든요. 무덤가에서 귀신이 나오고, 두꺼비가 인간이 되고요.
상상하는 일이 즐거웠나 봐요.
엉뚱한 애였죠. 저와 비슷한 1980년대 중반 이후 사람들은 다양한 장르물을 접하면서 컸어요. 촬영기술이 발전하면서 저희 때에 딱 <터미네이터>,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가 나왔거든요. TV 만화 전성기였고요. CG 기술의 발전을 경험하면서 자라는 세대였죠.
수상작 《피프티 피플》은 처음부터 기획된 연재였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연재에 맞춰 웹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분량으로 맞춰 썼어요. 애초에 웹에서 사람들이 글을 읽을 가독성을 생각한 거죠. 웹 소설 쓰는 분들은 휴대폰 화면에 맞춰서 쓰거든요. 이런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요즘 책을 읽는 사람이 별로 없고, 읽더라도 전자책을 선택하니까요. 그렇다 보니 화면을 꽉 채워서 긴 호흡으로 쓸 수는 없더라고요. 한번은 어떤 직장인 독자가 점심시간에 혼자 도시락을 먹으면서 한 편의 글을 읽으면, 점심시간을 충실하게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을 남겼는데 무척 좋았어요. 돌이켜보니 그게 제가 가장 원하던 것이더라고요. 점심시간에 샌드위치와 함께 글이 읽히는 거요. 이렇게 말하는 게 조심스러운 건 어떤 소설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되거든요. 소설에 따라 긴 시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책도 있으니까요. 저는 ‘저의 문학’을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일반적인 문학론으로 받아들이면 부담스럽더라고요. 전적으로 제 소설에 한정해서 말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한 시대에 하나의 경향만 받아들이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걸 벗어나서 각자에게 맞는 작가를 찾고, 자기에게 적합한 독서 방식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노래와 춤처럼 유행을 타는 게 있더라도요.
《피프티 피플》은 51명의 짧은 에피소드가 옴니버스Omnibus식 구성으로 펼쳐지죠. 각 에피소드가 2~3장 정도의 짧은 분량이에요. 그래서 인지 책을 읽는 내내 왠지 라디오 사연을 듣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작가님이 이 모든 인물에 공감한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조물주로서의 냉소일까요?
아무래도 더 애정이 있어서 쉽게 쓰이는 인물들이 있죠. 하지만 아닌 인물도 많으니까요. 그런 경우에는 조금 더 공을 들이죠. 싸매고 누워서 더 힘들게 쓰곤 하는데, 그렇게 어느새 친해지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어요. 친해지기 힘들었던 인물들이요.
51명의 인물 중, 애착이 갔던 인물과 친해지기 힘들었던 인물은 누구예요?
‘하계범’ 같은 경우는, 시신을 처리하는 노인인데 제가 해보지 않은 일이고 나이대도 제가 살아보지 않은 나이고 남성이어서 쓰는 데 조금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잘 쓰고 싶은 인물이었죠.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 쓸 때, 이 사람은 2주를 썼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이 굉장히 외출을 하고 싶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 뒤로는 아주 잘 풀렸죠. 저는 쓰기 힘들었지만 독자들이 인상 깊어하는 인물이기도 해요. 그에 반해 조금 빨리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경우는 ‘배윤나’예요. 제 주변에 시인 언니들이 많은데, 제가 시인들을 무척 좋아해요. 그중 배윤나의 모델은 장승리 시인이었죠. 이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지만(웃음)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그분의 맑은 이미지, 긴 머리, 그런 것들이 좋아요. 시인들은 너무 맑아서,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좋아요. 보호해주고 싶어지거든요. 그런 사랑을 담아 만든 인물인 거죠.
“결혼 전에 혼자 살 때요, 생일날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요. 뭐가 되었든 팥으로 된 음식을 먹으라고요. 그래야 잡귀가 안 붙는다고 신신당부를 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날 일이 늦게 끝나서 사 먹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뭘 먹었는지 아세요?”
“뭘 먹었니?”
“비비빅요.” 이번엔 애선이 웃었다.
“사다 줄까, 비비빅?”
“네, 먹고 싶어요.”
– 정세랑, 《피프티 피플》 ‘최애선’ 편 중에서
‘배윤나’의 비비빅 에피소드가 무척 좋았어요.
어머니는 제가 생일이 되면 꼭 팥을 먹으라고 하세요. 그때 파주의 출판사로 출퇴근하고 있을 때였어요. 퇴근하고 집에 오니 밤이 늦었는데 어디서 팥을 구하겠어요. 떡집도 죽집도 문을 다 닫고요. 그런데 엄마가 비비빅을 먹으라는 거예요(웃음). 그 안에 통팥이 들어 있거든요. 팥을 먹지 않으면 귀신이 붙는다고 신신당부했어요. 그런 게 정말 소설적인 것 같아요.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를 잘 기록하시나 봐요.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포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친구가 정말 웃긴 농담을 할 때,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웃을 것 다 웃고 꼭 적어놔야 해요.
《피프티 피플》이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많아서 그런지, 전문 용어나 그 분야의 은어 같은 게 세세하게 잘 나와요. 혼자의 힘으로 만든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아요.
그렇죠. 그런 소재를 쓰고 나면 실제 그 분야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요. 그 단어를 실제로 쓰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럼 첨삭을 해주는 거죠. 《보건교사 안은영》도 실제로 사립학교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직접 최종 교정지를 보여주면서 이상한 게 없는지 물어보기도 했어요. 사립학교 전체적인 분위기가 잘 들어갔는지 보려고요.
소설을 읽으면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연대감을 갖게 돼요. 현실과 소설의 ‘경계 없음’이 작용하는 것 같거든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소설에도 있고, 소설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에도 일어나니까요.
장강명 소설가가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 소설가는 패턴을 보는 사람들이래요.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목격하는 거죠. 저의 경우는 드라이비트 화재 사건을 따라 읽고 있었어요. 몇 년 전부터 외벽 외장재에 불이 너무 크게 붙는 거예요. 또 일어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죠. 반복된 일이고 큰 사상자가 없었지만 나름대로 경고를 울리는 마음으로 썼는데 결국 또 비슷한 일이 벌어졌잖아요. 그런데 정말 무섭게도, 제가 어떤 내용을 쓰면 그런 일이 실제로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경주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제가 실제로 지진에 대한 내용을 썼거든요.
예언가처럼요?
예언가는 아니고, 개구리나 새처럼 감각이 예민한 게 아닌가….
에이 거짓말! 아무리 그래도 재난까지….
무의식적인 예민한 감각이지 않은가 싶어서요(웃음).
《피프티 피플》은 사람들이 결국 저마다의 사정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그렇잖아요.
한국 사회는 두 다리면 정말 다 닿아 있어요. 여섯 다리 안 가요. 생각보다 개연성이 있을 지도 몰라요. 서로가 다 아는 작은 공동체인 것 같거든요. 인터넷의 발달로 점점 더 좁아지고 있죠. 모두가 이웃처럼 느끼잖아요. 가깝고 먼 거리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저의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무게 중심이 점점 친구들 이야기, 그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로 확장이 되어가는 게 좋아요. 유체이탈같이요.
소설 안에 작가님의 얼굴이 희미해져 가는 듯해요.
제 안에 제가 많아지는 느낌도 들어요. 쉰한 명이 결국 저로 연결되는 건데, 할머니 같다가 아줌마 같다가 아저씨, 어린아이가 되니까요. 너무 많아지니까 제 안의 인물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걸 느껴요. 복잡해지는 것 자체가 작가로서 나이 들어가는 일이겠죠.
옴니버스 형식의 매력은 퍼즐 맞추기처럼 앞에 나왔던 인물이 뒤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연장시키는 거라고 봐요. 아까는 이해가 잘 안 갔던 행동이 그제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요.
불행을 맞닥뜨렸을 때 반응이 다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반응, 저런 반응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 두려움이 만들어낸 부분이기도 해요. 저는 광역고속버스가 늘 무서웠어요. 늦은 밤까지 탑승객을 문까지 채워서 달리니까요. 실제로 아는 분이 일산에서 서울로 서서 가던 중에 광역버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거든요. 그런 것에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기사님들이 오랫동안 운전하면서 피로 누적으로 졸음운전을 하게 되기도 하고요. 화물이나 운반의 노동 환경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잖아요. 또 일어날 걸 뻔히 아는데 이게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 무서워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에요.
이 많은 인물을 그리는 데 어려움도 따랐을 것 같아요. 모두 경험해본 게 아니잖아요.
공동체를 재현하고 싶은데 특정 계층, 특정 연령, 특정 성별만 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균일하게 분배해서 쓰려고 노력했죠. 저와 비슷한 나이가 대부분이더라도 최대한 균일하게 쓰려고 말이에요.
좀 전에 이야기를 나눈 ‘윤나’의 에피소드 중, 그녀가 강연을 다니는 대학교의 문창과 통폐합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아주 큰 문제예요. 예술가를 도려내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사실 인문대, 예술대, 순수 과학, 또 제가 모르는 많은 분야들이 취업률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어요. 정원도 안 차고, 없애고, 실용적인 무언가로만 만들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소설가가 건드렸다는 게 의미가 있어 보였어요.
소설가는 정말 필요해요.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활발하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의미가 있죠. 이야기가 현실을 닮아가는 만큼 경고가 될 수 있으니까요. 작가는 수돗물 안의 소독약 같은 존재예요. 미술가나 음악가, 사진가 다른 영역의 모든 예술가가 방부제인 거죠. 김 속의 실리카겔처럼요. 없으면 사회는 부패해요. 먹는 것도 아니고 필요해 보이지도 않지만 사실 가장 필요한 부분이고, 부패를 막는 존재이죠. 그런데도 ‘그거 하지 마라.’, ‘돈을 벌어라.’, ‘돈이 바로 되는 걸 하라.’고 하면 이 사람들이 줄어들 때 그 사회는 더 이상 건강할 수 없어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요.
상업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나 단체, 상품을 보면 항상 스토리텔링이 따라와요. 가장 효율적으로 써 온 도구는 스토리텔링이면서 이것을 업으로 삼는 것을 멸시하는 건 모순적인 것 같아요.
예술가는 취업률로 따져서는 안 돼요. 성공한 예술가는 회사에 속해 있지 않으니까요. 일괄적인 기준으로 예술가를 판단하고, 순위 매기기에 급급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예대뿐만 아니라 모든 학과에 취업률을 성공의 기준으로 두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대학생활 때 취업과 가장 거리가 멀었던 수업이 가장 재미있었어요.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사’나 ‘라틴어 강독’ 수업 같은 것이거든요. 취업과 전혀 상관없잖아요. 쓸데없어요. ‘사마천司馬遷’의 글이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다운지 깨닫게 된 시간들이 저를 이룬 거죠. 그런데 이렇게 무용해 보이는 것으로 처음에 출판사에 합격했어요. 민음사에 시험을 보러 갔을 때 ‘시일야방성대곡’이 한문 그대로 나온 거죠. 음훈을 쓰고 해석하는 거였는데 무척 어려운 시험이었어요. 대학에서 제일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것 덕분에 취업을 하게 된 거예요.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풍부한 경험은 대학 때가 아니면 하기 쉽지 않고, 인문과학적, 사회과학적, 자연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중·고등학교에서 체득하기 어려운데, 지금 상황에서 대학이 대학 본연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거죠.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크레인 사고가 등장한 것도 패턴이 있는 일이었어요. 소설가가 그걸 경고하면 사람들이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는 거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더라도,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훈련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오락 소설을 쓰다가 이제 어깨가 무거워졌어요. 제가 하는 일이 생각보다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깨달음이 있었죠.
남학생은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린 이미 졌어요.” 그제야 사람들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되겠지만 그렇게 말하지 말자.”
– 정세랑, 《피프티 피플》 ‘배윤나’ 편 중에서
우리 모두 사실은 이 지점을 알고 있고 마음속으로 동의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썼을 때가 2015년이었어요. 그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죠. 세월호 문제는 해결 안 될 것 같고, 탄핵도 되지 않았고요. 하지만 조금씩 회복되고 개선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속도가 우리나라는 빠른 편이니까, 근본에 대한 관심이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신자유주의도 영원할 거라고 믿었지만 이제 사람들이 회의감을 갖고 있잖아요. 경제학 석·박사들이 이 방식으로는 분배가 어렵고 빈부격차가 더 난다고 하고요. 전체적인 만족도도 떨어지고 있죠. 어떤 고민이 영원히 갈 것처럼 보여도 10년주기로 바뀌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통폐합되고 외면하던 학과들은 결국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강연을 하러 가면 제가 다음 세대를 만날 자리가 마련되는 거거든요. 그곳에서 만난 젊은 독자들을 보면 무척 똑똑해요. 자기 표현 능력도 훌륭하고요. 그래서 그들을 보면 희망을 느껴요. ‘내가 저 나이대에 저런 깊은 생각을 했던가?’ 자문도 해보고요. 세계관과 자기 사고가 발달해 있는 것이 보이거든요.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어요.
그러고 보니 51명의 인물이 모두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어요.
‘그는’, ‘그녀는’이라는 표현이 별로 좋은 화법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어요. ‘그는’, ‘그녀는’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름을 쓰는 게 건강할 것 같더라고요. 조금 더 성실하게 인물들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노력했죠. 있을 법한 이름이지만 너무 흔한 것은 아닌 이름을 찾으려고 했어요.
작가님이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만큼 여성으로서의 언어를 풀어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소설 안에서 혐오를 마주하는 방식은 일대일의 성비를 맞추어서, 부드러운 세계 안에서 혐오를 거부하는 방식인데 더 직접적인 방식들도 있었어요. 조남주 작가가 우리 사회에서 해낸 일을 생각해보세요. 통계를 기반한 멋진 소설이 불러낸 결과들이요. 덕분에 다른 작가들이 더 용기를 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요. 그만큼 타격도 많이 받고 있으니, 옆과 뒤에 내가 함께 서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타격이요?
이야기에 대해 심각한 악플이 달려요. 읽어볼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악플을 달거나, 이벤트 장에 나타나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죠. 작가들이 혐오에 노출되어 있어요. 사실 저는 개인주택에 살고 싶었어요. 마당에서 동물도 키우고 정원도 가꾸면서요. 그런데 남편이 반대하는 거예요. 이름 걸고 일하는 여자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데 아파트가 낫지 않겠냐고요. 이상한 사람이 저에게 해코지 할 가능성이 있는 거죠. 경비원이 있고, 앞에 문이 몇 개라도 더 있는 게 낫지 않겠냐는 남편의 설득으로 결국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예전에 ‘30대 여성 롤모델이 없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결혼하지 않은 30대 여성의 행복한 모습을 미디어에서 조명하지 않고, ‘미혼’에서 결함을 계속 찾으면서 결혼을 하도록 부추긴다는 요지였죠.
불안도 몫을 했죠. 제가 어렸을 적에 불안정한 집에서 살았어요. 모르는 사람이 현관까지 따라오고, 위험이 많이 따르는 거예요. 대학생 때부터 모르는 사람들이 현관을 두드리는 게 노이로제였죠. 옆집에서 기침하는데 놀라고, 집에 사람이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후추 스프레이를 들고 다닐 정도였어요. 남자친구가 있으니 좀 덜 무섭더라고요. 이건 나의 안전에 대한 거잖아요. 혼자 10년 사니까, 떠돌아다니는 일에 두려움이 커졌어요. 혼자 벌어서는 안전한 곳에 가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지만, 둘이라면 더 많은 빚을 쉽게 질 수 있으니까요(웃음). 저도 타협을 한 거죠. 아마 안전을 느끼고 돈을 많이 버는 여성들은 굳이 결혼을 하지 않을 거예요. 잡지 《W코리아》의 황선우 에디터와 김하나 작가가 같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새로운 동거 형태를 발견하기도 했어요. 한 사람은 청소를 좋아하고, 한 사람은 요리를 좋아하는데 네 마리의 고양이들과 함께 생활을 꾸려 나간대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더 많이 생겨나고, 하나의 공동체가 만들어졌어요. 일괄적인 4인 가족에 대한 이미지 고착이 와해되는 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보건교사 안은영》의 ‘은영’도 굉장히 주체적인 여성이죠.
독립적이고 사명의식이 뚜렷한 여자예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요. 은영은 무척 건강한 인물이에요. 항상 피곤해하지만 자신의 세계에 친절하고 다정하죠.
‘안은영’이라는 이름은 또 다른 분에게서 차용하신 거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제가 다니던 출판사의 마케팅 인턴 분의 이름이었어요. 아직도 못 만났어요(웃음).
《보건교사 안은영》은 사립학교 내에서 보건 교사로 일하는 은영의 이야기예요. 아주 특별하고 엄청난 힘을 가져서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을 퇴치하죠. 예측할 수 없는 판타지 이야기가 새로웠어요. 작가님도 ‘너무 행복해서 영원히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죠?
너무 재미있잖아요! 특수효과도 생각할 것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고요. 소설은 저비용으로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어요.
소설가는 보통 혼자 글을 쓰는 사람인데, 이번 《보건교사 안은영》을 각색하면서 다른 작가들과 함께 글을 쓰게 되었다고 했죠. 타인이 자신의 언어를 빌려 다시 쓰는 건 어때요?
제가 참여해서 그런지 그리 다르게 각색되지는 않았지만, 보통 다른 작가가 각색하면 아예 다른 이야기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은영의 본질, 사명감, 다정함, 친절함 등을 잃지 않고 이어갈 수 있어 기뻐요. 만약 얄팍한 여성 히어로물이 되었으면 너무 슬펐을 것 같아요. 은영은 그런 인물이 아니니까요. 항상 지쳐 있지만 좋은 일을 하려는 인물이잖아요.
한편으로 작가님이 장르 소설을 썼기 때문에 가려진 부분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제가 주류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어요(웃음). 우리 세대는 어느 시점부터 장르 소설과 거리가 가까운 편이라고 생각해요. 평론가들이 이걸 배척하려고 하기보다는 낯설어하는 거죠. 보통 이런 경우를 ‘장르 뼈가 있다.’라고 표현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장르 뼈가 없는 사람은 읽지도, 쓰지도 못해요. 청소년기부터 특정 장르를 보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쓸 때도 어색하지 않죠. 그런데 이 유아청소년기에 이 문화를 접하지 못하고 후천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게 잘 안 돼요. 누적된 코드를 가지고 변용하는 게 장르잖아요. 기타 코드와 같아서 익숙하지 않으면 잘 안 읽히는 거죠. 그렇지만 젊은 평론가들이 등장하면서 다들 이 코드를 알고 있는 거죠. 어렵지 않게 읽는 시대가 곧 올 거예요. 이전 세대 평론가들이 일부러 박하게 평가했다기보다는 장르 뼈가 없어서 그런 것일 뿐이에요. 제가 후에 나이가 들면 영상과 미디어, 코딩에 강한 친구들은 또 그런 부분의 장점을 부각시킬 테고 저는 또 낯설어하겠죠. 세대 교체와 같은 변화가 생기는 게 흥미로워요. 유연한 할머니가 되는 게 제 꿈인데, 제겐 그런 뼈가 없겠죠.
사회적으로 말과 글의 중요성이 큰 만큼 언어를 부리는 사람들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해요. 이 간극은 어떻게 줄어들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정교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그랬던 적이 한번도 없고요. 하지만 모두가 예민하게, 타인을 해치지 않고 배워가면서 확대해가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떤 단어는 탈락되잖아요. 나쁜 말들이 탈락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얻는 기쁨이 있고, 그런 데에 일조를 하고 싶기도 해요. 예를 들어서 제가 중국 음식을 무척 좋아하는데, 아무리 좋은 사람이더라도 “짱깨 시켜 먹자.”라고 하면 너무 불편하죠. 일일이 지적하기는 힘들고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안 보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 단어가 도태되고 사라질 때를 기다리는 거죠.
작가님 소설에는 다양한 재앙과 무수한 사고가 등장해요. 작가님께서 “어떻게든 혐오를 마주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이 나요. 시선의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선의 문제가 나아질 거라고 믿어요. ‘조지 R. R. 마틴’ 작가의 《왕좌의 게임》에서 ‘트리온’을 통해 “책을 읽는 사람은 한 번을 살아도 천 번을 사는 것과 같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 살아보게 되는 거죠. 이 말이 너무 좋아서 ‘타투를 할까?’ 생각도 했죠(웃음). 작업을 하면 결과물이 빨리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소설 한 편 쓰는 데 3년이 걸리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 말을 떠올리니, ‘잘 살고 있구나.’ 싶은 거예요.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여러 겹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죠.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어도 작가님만의 따뜻하고 경쾌한 목소리가 있어요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달콤하고 소화되기 쉽게 전달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물론 이건 저의 문학에 관한 거고요. 어렵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어렵게 해야겠죠. 주변에서 제 소설을 보고 사회적인 지점을 이야기에 숨겨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역할의 작가도 필요하니까요. 어렵지 않고 난해하지 않게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요. 이런 작가, 저런 작가가 있겠지만 저는 그런 작가인 것 같아요.
관심이 우선되어야 하니까요.
저를 통해서 더 난해하고 어려운 글들로 뻗어나가면 최선이겠죠? 더 노골적인 글도 좋고요. 강렬한 어떤 것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은영은 신체검사 날, 여학생들의 가슴 둘레를 재면서 진짜 유정을 딱 한 번 가까이서 보았다.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인표에게서 얻은 그날 치 좋은 기운을 고스란히 전했다. 어떤 나이에는 정말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데 모두가 그걸 얻지는 못한다.
–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중에서
작가님은 소설을 통해 어떻게 사랑과 보호를 전달하나요?
저는 친밀감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이니까, 독자가 가상의 인물과도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게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소설 속 인물을 사랑하면 뇌에서 실제와 똑같은 반응이 나온대요. 신기하죠? 모두가 현실에서 필요한 만큼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면서 지내지는 못하거든요. 작고 어린 아이들이 자꾸 죽잖아요. 학대받고, 집에서 탈출하고. 뉴스를 볼 때마다 속상해요. 너무 끔찍하면 뉴스를 보고 싶지 않잖아요. 하지만 끝까지 눈을 돌려서는 안 돼요. 소설 중에 “아무리 가족이어도 사랑하지 않아도 돼.”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 대사를 보고 학대의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 곱씹던 경우가 있었어요. 명확한 언어잖아요. 가족이어도 무조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요. 그 말을 듣는 게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소설을 쓰길 잘했다, 그 대사를 쓰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다른 방식으로 친밀감을 경험한다면, 현실에서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책을 통해서 이런 게 가능하다고 믿고요. 《인형의 집》에서 ‘노라’와 남편의 관계를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해방되었나요? 안 좋은 관계에서 빠져나올 때, 책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판타지 소설에 대한 맥이 이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은영’ 같은 다양한 인물이 더 필요해요.
제 뒤에 재미있는 작가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한 명이 뚫어놓으면 더 나아가기 좋으니까요. 《보건교사 안은영》이 있으니 더 이상한 주인공이 나와도 ‘이 정도야, 뭐!’ 하고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저도 제 앞에 길을 뚫어놓은, 현대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작가들이 있었으니까요.
작가님의 책 추천이 궁금해요.
조세핀 테이Josephine Tey의 전집이 나왔어요.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뒷세대 작가예요.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무덤에서 깨워서 더 써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예요.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되는 촘촘한 추리 소설이에요. 풍경 묘사 하나하나가 섬세하고요. 2~3년 전에 이 작가를 발견한 게 가장 큰 기쁨이었어요. 남성 작가 중에서는 마이클 코리타Michael Koryta요. 넥스트 스티븐 킹Steven King이라고 생각해요. 호러물을 정말 잘 써요.
같은 세대에 있는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큰 행운 같아요.
한동안 사람들이 한국 문학에 염증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죠. 그런데 다행히 젊은 작가를 발굴했어요. 저는 이게 일어날지 확신을 못 했거든요. 동세대가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니까요. 나와 같은 시대를 거친 작가를 좋아한다는 게 근사해요. 나와 같은 공동체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거잖아요.
저도 이제 생겼어요.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은 작가요. 작가님 우리 같이 건강해요.
우리 건강해야 해요(웃음). 건강검진 잘 받아야 돼요. 다 같이 건강하게 할머니가 될 때까지 잘 삽시다.
피프티 피플
창비ㅣ396쪽
50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 속에서 병원 안팎의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사고와 고민이 펼쳐진다. 각자의 개별적인 사정을 안고, 모두가 동일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 우리와 꼭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ㅣ280쪽
보건교사 안은영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마계의 기운을 느끼면 그것들을 자기만의 방식(비비탄 총과 무지개 칼)으로 퇴치한다. 적당히 무신경하지만 충분히 다정한 그녀를 보면 맑고 밝은 기운이 그대로 느껴진다.
에디터 이자연
촬영 에디터 김혜원 포토그래퍼 Hae Ran 장소 협조 앤트러사이트 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