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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주 — 배우
직업은 배우, 하는 일은 연기. 태주는 자신의 공간에 스스로를 촘촘히 기록하는 사람이다.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면 그녀가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네모난 방 안에 켜켜이 쌓인 책, 오래된 펜과 두껍고 수더분한 노트까지. 태주의 작업실은 그와 같이 꾸밈 없이 아름다웠다.
요즘 어떻게 지냈나요?
최근에 후반 작업 진행 중인 작품의 녹음을 마쳤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오디션도 보고, 겨울잠도 많이 잤네요. 요즘 언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여행엔 흥미가 없는 편인데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된 이후로 타국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거든요. 언어 공부를 하며 그 아쉬움을 기대로 채우고 있어요.
작업실이 멋져요. 이 공간이 태주 씨를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기서는 어떤 일을 해요?
주로 평소에 적어 두었던 글을 다시 랩톱에 옮기는 작업을 해요. 실질적으로 이 공간에서 뭔가 생산하는 일은 외려 적어요. 그래도 요즘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나리오에 풀고 있는데 혹시라도 나중에 아무도 저를 배우로 불러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저라도 저 자신을 배우로 기용하자는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어떤 시나리오인지 궁금해요.
떠오르는 대로 소재나 시놉시스를 먼저 적어두고, 생각날 때 다시 이어 쓰는 정도예요. SF 장르 이야기를 만들 때 제일 흥이 나요. 더 이상 공상과학이 먼 미래로 느껴지지 않잖아요. 그러나 여전히 거북함이나 당혹스러움이 잔존하고요. 그런 면에서 평범하고 지루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좋은 소재죠. 그런데 정말 각본 쓰는 건 너무 어렵네요(웃음). 감독님, 작가님들 존경해요.
시를 써서 책에 태주 씨의 글이 실린 적이 있어요. 어떤 글을 써요?
제가 쓰는 글의 장르는 신변잡기에 가까워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해소의 개념을 쓰고 있는데 이럴 때 나오는 글은 그 안에 담긴 생각이 저를 오히려 가두는 것 같아 두려울 때가 있어요. 그런데 반대로 그 두려움이 긍정적인 자극으로 느껴질 때가 있기도 해요.
책이 굉장히 많은데 어떤 책들을 읽고 있어요?
도서관 분류 번호 100-300, 600-800번대 책들이 제 취향이에요. 대체로 하드보일드나 블랙 코미디의 문체나 장르를 좋아해요. 더불어 좋아하는 건 비평 쪽이에요. 가끔은 어떤 문학보다도 훨씬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느껴요. 원작을 처음 봤을 땐 그저 그랬다가도 비평문을 읽고 나면 제가 놓친 게 많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훨씬 감상이 풍부해지죠.
도서관을 좋아하는군요. 작업실에 책이 쌓인 풍경도 인상적이네요.
많은 책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모습이 제가 제일 편하게 느끼는 풍경이에요. 어릴 때 정리가 덜 된 도서관이나 서점 구석에서 책 읽는 걸 좋아했는데 집에서도 책장 아래쪽에서 웅크리고 책을 쌓아 둔 채 읽고 있어요. 사실 저는 이 작업실을 마련하기 전까지 저만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생활하는 공간과 작업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으면 경제적 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늘 아쉬운 부분이었는데 운 좋게 LH에 당첨되어 집 안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하게 되었어요. 작업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 안정감이 되어요. 이 안정감이 불안정한 제 직업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고요.
프리랜서에게 작업 공간은 매우 소중하죠. 배우로서는 주로 어떤 작품에 참여하고 있나요?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들의 장르가 다양했어요. 블랙 코미디, 퀴어, 공상과학, 판타지, 휴머니즘까지요. 로맨틱 코미디 빼고는 얼추 다 해본 것 같네요(웃음).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면서 알게 됐는데 최근에 찍은 작품들의 어떤 경향성을 발견했어요. 대부분 시류에 맞는 작품을 하고 있더라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일까요?
우연인지 실험 장르 영화에 많이 참여하게 됐어요. 퀴어 장르 영화도요. 모두 순전히 제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이끌림, 사회 화두에 따라 누군가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라서 선택할 때도 있어요. 정체성과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와 이야기가 지금보다도 더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작품을 대할 때도 그런 관점이 적용되는 것 같아요. 쟁점으로 이슈화되긴 하지만 여전히 비주류인 상태잖아요. 그저 이슈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공적으로 보호받을 때까지 저도 배우로서 운동하고 싶어요.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도 궁금해요. 연기하는 캐릭터들에게서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있나요?
꼭 비틀어진 무언가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캐릭터를 넘어 내러티브에서든, 미술이든, 연기 톤이든, 촬영 기법에서도요. 무난하고 평화로운 영화도 좋지만 그곳에도 어떤 괴상함이 있어야 저는 더 끌리는 것 같아요.
어떤 괴상함일까요?
묘한 뒤틀림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재치예요. 예쁘고 매끄럽다고 할 순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매력적인 것들이요. 내러티브만 생각했을 땐 변두리에 있는 사람, 혹은 어떤 ‘것’을 대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좀 거창하게 들리긴 하지만(웃음). 그 캐릭터들이 그냥 저 같아서 끌리나 봐요.
언제 처음 연기를 시작했는지 궁금해요.
확실하게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을 잡은 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예요.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생 때였고요. 계기가 분명하진 않아요. 어릴 때부터 그냥 연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지역 학생회관에서 열리는 연극에서 팥죽할머니 배역을 어렵게 따낸 것이 제 첫 오디션의 기억이에요. 할머니 발성을 내느라 목이 다 쉬었어요(웃음). 공연 당일 연출 선생님께서 배우들은 분장을 해야 하니 얼굴에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르고 오라고 하셔서 엄마 화장대에서 몰래 화장품을 훔쳐 바르고 나간 기억이 있어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제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감추면서 혼자 급급했죠. 캐스팅 디렉터들에게 증명사진을 제출하면서 ‘학생 배우 찾으시면 연락주세요.’라고 열심히 어필하고 다니기도 했어요.
아주 열정적이었네요.
그냥 대중 앞에 서는 게 좋았어요. 그들의 관심과 사랑, 앞으로 나서서 온 힘을 다해 퍼포먼스를 보이곤 느끼는 묘한 뿌듯함이 좋았어요. 처음 연극을 했을 때 처음엔 분명 관객을 의식하면서 시작했는데 끝나갈 때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 캐릭터가 가진 감정에만 몰입하는 경험을 했어요. 제 안에 있는 여러 자아가 분열된 기분이었어요.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 인물인가? 혹은 극장 밖에 있는 사람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진짜 나는 어디 있을까? 하는 물음이 저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준 것 같았어요. 그 고조된 기분이 엄청난 쾌락을 줬고요. 이 기분을 절대 잊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속으로 큰 일 났다고 생각했죠(웃음). 그 뒤로 계속 연기를 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생히 느껴져요. 배우라는 직업은 태주 씨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정말 직업 그 자체로 생각하려 해요. 그게 저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가끔 제 캐릭터가 느끼는 감정이 밉기도 하거든요. 동일시가 제일 위험한 일이니까요. 연기하고 나서는 항상 아쉬워요.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저렇게 했지, 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요. 배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연기에 상품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상품성이라는 단어가 극히 상업적인 의미로 반감이 들 수 있지만 그 상품성이 관객의 몰입도를 달리한다고 생각해요. 관객이 지금을 잊고 스크린 시간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건 배우로서 중요한 의무니까요.
태주 씨는 연기할 때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배우인지 궁금하네요.
영화 작업을 예로 들면,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관객이 봤을 때 어떤 식으로 이 감정을 받아들일지, 다음 컷과 더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위해서 어떤 감정을 보여야 하는지에 고민을 많이 해요. 요즘 관객 분들이 촬영 기법과 영화 문법을 꿰뚫고 계시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첫째 목표는 이 캐릭터의 감정에 솔직해질 것, 그다음 목표는 관객을 납득시킬 것이에요. 납득시킨다는 건 결국 속여야 한다는 거잖아요. ‘있을 법하다’를 넘어서 저 사람은 저기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하도록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관객을 존중하는 마음이네요. 태주 씨는 연기할 때 언제 가장 즐거움을 느끼나요?
분명 연기가 좋아서 하고 있는데 기쁘거나 즐거웠던 순간이 떠오르지는 않네요. 왜 기억이 안 날까요(웃음)? 아마도 고민을 지나치게 해서 그런 거겠죠. 촬영 현장에서 감독님, 스태프들과 함께 으쌰으쌰 하는 순간들은 정말 짜릿하고 행복해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캐릭터 특징이나 서사가 ‘디벨롭’ 되는 것도 재밌고요. 애초에 역할을 맡게 됐을 때 왜 나만이 이 캐릭터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은 비교 불가한 희열 그 자체예요.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다 기록해 뒀어야 했는데, 행복한 순간은 자주 흘려버리고 어려웠던 순간은 잘 기록해 둬서 얄밉도록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어떨 때 그런 기록들을 남겼나요?
너무 많죠(웃음). 제가 맡은 캐릭터의 감정이 현실의 제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벅찰 때, 감독님과 소통이 어려울 때, 온 힘을 다해서 연기한 작품에 아무도 관심이 없을 때,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받고 일할 때, 그런 순간들을 기록했어요. 그래도 다 참을 수 있지만 제일 힘든 건 아무도 날 배우로 쓰고 싶어 하지 않을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에요.
작업의 어려움에 부딪힐 땐 어떻게 풀어가나요?
감독님과 제일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시나리오마다 다르긴 하지만 레퍼런스가 될 만한 자료를 많이 수집하거나, 그걸 아예 의도적으로 피할 때도 있고요.동료 배우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해요. 그런데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요. 진심으로 연기하자고 마음먹는 거죠. 나중에 돌려 봤을 때 연기가 미숙한 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내려놓고 다음에 더 잘하자고 다짐하게 되는데, 충분히 마음의 힘을 쏟지 않은 작업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니까 폐부까지 부끄러워서 다시 보기 힘들더라고요.
모든 작업자에게 후회가 없다면 거짓이죠(웃음). 연기는 육체적, 정신적 소모가 큰 작업이라 쉬는 시간이 더 중요할 것 같아요.
쉴 때는 오히려 연기에 도움이 될 만한 것과 제일 거리가 먼 영상들을 봐요. 조금이라도 저에게 유익할 만한 요소가 없는 것만요. 영화를 보면 연기나 촬영, 연출, 비하인드를 파악하려고 들게 되고 그럼 피곤해지거든요. 저도 절대적으로 몰입할 시간이 필요해요. ‘영화 하는 사람이라면 봐야 하는 영화 혹은 드라마, 책’ 이런 거 절대 보거나 읽지 않아요(웃음).
작업에 몰입하려면 오히려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벌써 마지막 질문이에요. 태주 씨는 어떤 배우, 어떤 사람이고 싶어요?
꾸준한 사람, 주어진 역할 자체로 보이는 사람이요. 무엇으로 지칭이 되어도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표현하는 감정에서 밀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요. 이건 배우로서의 지향점이고요. 개인적으로는 재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30년 뒤에 “그래도 이 일 하길 잘했지, 재밌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에디터 김지수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