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포즈

제인 버킨

그 여자의 포즈
제인 버킨 Jane Birkin

우아한 목소리를 가진 중년의 여인을 안다. 그녀는 자신이 잘 보이고 싶은 상대가 화장을 지우고 봐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꾸미는 일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고 고백했다. 여기서 ‘꾸민다’는 표현은 단순히 외모를 가꾸는 행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얼마나 드러낼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여자를 떠올렸다, 어디서든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포즈Pose’는 사진이나 그림을 위해 취하는 자세를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멋진 포즈는 한 사람의 안팎으로 드러나는 일관된 자연스러움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인 버킨은 프랑스 대중문화의 오랜 뮤즈로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 살짝 벌어진 앞니에 헝클어진 금발, 청바지를 입고 버드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든 이미지는 무수한 매체를 통해 소비되었고, ‘갱스부르Serge Gainsbourg의 연인’, ‘명품 가방 버킨백의 주인공’이라는 수식이 늘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 장막을 걷어낸 순간, 그녀의 포즈는 더 선명해진다.

영화에서

그녀의 말간 얼굴을 자세히 본 건 영화를 통해서다. 버킨의 영화라 하면, 전라의 미녀로 등장해 주목을 받은 데뷔작 <욕망Blow-up>이나 그녀에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더스트Dust>, 갱스부르와 작업한 작품들이 꼽히겠지만, 이 영화를 접한 건 정말이지 우연한 기회였다. 누벨바그의 유일한 여성 감독으로 알려진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의 회고전이 열렸을 때다. 바르다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창조하고, 그만큼 다양한 여성의 삶을 조명해왔다. 버킨과는 총 세 편의 영화를 작업했는데, 그중에서 버킨의 전기영화로 제작된 <바르다가 본 제인Jane B. par Agnès V.>은 국내에서도 첫선을 보이는 필름이었다. 마흔 살이 된 버킨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여느 전기영화에서 볼 법한 경력의 기술이나 예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한 여인의 기묘한 자화상을 모아둔 화첩처럼 보였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즉흥적으로 장면을 이끌어낸다.

버킨은 각종 신화와 영화의 주인공으로 둔갑하는데, 무성영화의 코미디언이 되었다가 서부극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회화 이미지를 자주 활용하는 감독의 특기를 살려 티치아노, 달리, 마그리트의 그림도 차용된다. 연출하는 감독도, 연기하는 배우도, 감상하는 관객도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도입부다. 바르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길 두려워하는 버킨에게 카메라를 거울로 여기라고 조언한다. 거울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포즈를 취하는 버킨은 진짜이기도, 가짜이기도 하다.  

“나는 제인 B고 영국 출생이에요. 키는 174센티예요. 별 특징이 없고 뛰어난 재능도 없는데 여기 있어요. 유명한 무명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줬고 거기 끌려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됐을 거예요.”

– 영화 <바르다가 본 제인> 중에서

무대에서

여느 때처럼 흰 셔츠를 입은 버킨이 마이크 앞에 섰다. 주름 팬 얼굴은 조명 때문인지 미소 덕분인지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시종 에너지가 넘쳤다. 일본의 재난 사고를 위로하는 자선 공연을 필두로 월드 투어를 나선 버킨이 한국 무대에 섰을 때 일이다. 당시 그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가 하면, 다양한 매체의 부름에 성실히 응했다. 기억에 남는 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나와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던 장면이다. 오랫동안 찬 시계를 그 자리에서 풀어 선뜻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버킨이 배우이기 전에 가수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건 무대에서 보여주는 열정적인 포즈다.

그녀는 사람들이 위기라고 생각할 때마다 무대에 섰다. 자연재해가 일어난 직후에 현지 무대를 찾았고, 인생의 기둥이던 두 남자, 그녀의 아버지와 갱스부르의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갱스부르와 작업한 전설적인 앨범 <멜로디 넬슨의 이야기Histoire de Melody Nelson> 기념 공연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당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공기처럼 가벼우면서도 더 깊어진 듯 하다.”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를 하고 처음으로 홀로 무대에 올랐던 파리 바타클랑 공연 때, 그녀는 예상이나 했을까?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 위에 있으리란 걸 말이다. 

“Je vais y passer (나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 바타클랑 공연(1987) 포스터 문구

사진에서

버킨의 사진을 통해 두 사람을 알게 됐다. 포토그래퍼 가브리엘 코르포드Gabrielle Crawford와 작가 올리비에 롤랭Olivier Rolin, 갱스부르 부녀처럼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사진 뒤에 있는 이들이다. 코르포드가 버킨의 일상을 함께했다면, 롤랭은 그녀의 내면을 통찰했다. 그들의 시선으로 포착한 버킨은 한층 더 자유롭고 유연하다. 아버지가 다른 세 딸에게 보여준 사랑과 헌신, 매만지지 않은 머리에 토플리스 차림이어도 당당한 모습,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던 순간들. 꾸미는 일엔 도통 관심이 없지만 어디서든 기품을 잃지 않았다. 롤랭은 그녀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그마 산 비포장도로를 장갑차가 흔들거리며 통과하는 동안, 제인은 장갑차 지붕에 달린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당시 포위당한 사라예보로 향하는 길이었다. 크로포드와 롤랭, 두 사람은 늘 버킨을 지지하고 응원해왔다.

그녀가 미얀마의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가택 연금되어 있는 아웅 산 수지Aung San Suu Kyi 여사의 석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호소할 때, 열악한 텐트 생활을 마다치 않고 구호 활동을 펼칠 때, 장애인과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종횡무진할 때도 곁에 있었다. 자신을 지켜보고 지켜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그건 한 사람의 포즈를 완성시켜주는 진실한 그 무엇이다. 

“제인을 사진에 담는 것은 아이의 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녀가 어디에서나 어떤 순간에서나 완벽한 포즈를 취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걸 그녀가 잊어버리는 순간이 가장 좋다.”

– 포토그래퍼, 가브리엘 코르포드

제인 버킨 – 우정과 매혹의 순간들
제인 버킨 · 가브리엘 크로포드|뮤진트리

제인 버킨의 삶의 단편을 담은 이 책은 50여 년간 찍은 사진과 그녀를 둘러싼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녀의 첫째 딸 케이트 베리에게 바쳐졌다. 케이트는 201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본 책이 인쇄에 들어간 날이었다. 버킨의 권유로 전문 사진작가가 된 크로포드는 평생 동안 카메라 뒤에서 친구를 따라가며 씩씩하고 짓궂은 모습뿐만 아니라 어둡고 슬픈 이면까지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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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혜진

사진 제공 뮤진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