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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간직하는 법
그 시절, 그 분위기, 그 영화
그리움을 간직하는 법
어떤 시절은 특유의 냄새를 갖고 있다. 오래된 목욕탕의 습한 냄새, 여름날 비 오기 직전의 냄새, 운동회가 끝난 운동장 먼지 냄새, 새해 첫날의 묘한 냄새 같은. 그리고 그 시절의 냄새가 꾹꾹 담긴 영화를 찾았다. 누가 그러자고 정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2000년대 초반의 영화에는 그 날들의 공기, 냄새, 그림자, 분위기가 담겨있다. 그리움을 간직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나 그 사람의 향기를 알아요.
언제 어디서든 눈을 감으면 맡을 수 있어요.
우리는 분명 같은 감정으로 살아요.”
동감
김정권ㅣ로맨스ㅣ 2000년ㅣ110분
소은은 1979년의 시간을 살고 있다. 적당한 짝사랑과 기분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우연히 고물 무선기 하나가 주어지고, 그 낡은 무선기를 통해 익숙하지 않은 교신음을 듣게 된다. 그렇게 소은은 저쪽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아득하고 그리운 목소리를 마주한다. 지인은 2000년의 시간을 살고 있다.
바쁘고 복잡한 서울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무선통신에 열광하며 지낸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친구 현지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언제나 미지의 공간, 이름 모를 이들과의 교감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낯선 여자의 교신을 받는다. 두 사람은 같은 학교, 다른 학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지인은 지인의 마음으로, 소은은 소은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기다리지만, 결국 공허함만 느낄 뿐이다. 21년을 훌쩍 뛰어넘어 가깝고도 먼 공간에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 마음 한쪽에 남아있는 타인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고, 서로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말한다. 낡은 무선기를 사이에 두고 그리움의 조각을 나누어 갖는다. 그들은 21년이라는 ‘거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눈을 마주하고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고통스러운 건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라 사랑이 계속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랑이 끝난 후에도.”
시월애
이현승ㅣ로맨스ㅣ2000년ㅣ94분
‘일마레’에 이사 온 성현은 어떤 편지를 발견한다. “1998년 1월에는 눈이 많이 왔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2년 후인 1999년에 누군가가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에 담긴 내용은 예언처럼 현실로 나타난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은주. 자신이 쓴 편지가 1998년 12월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된 은주는 자주 그곳에 편지를 남긴다. 이따금 바라는 것도 적었다. 자기가 잃어버린 녹음기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남기기도 하면서. 2000년대 초반의 영화는 시간을 통한 환상적인 기제를 자주 활용한다. 21세기를 반기면서 새로운 시대와 구시대의 경계를 시간으로 나눈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힘으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대상을 마음껏 운용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풀어나가면서 말이다.
성현에게 하는 은주의 부탁은 대부분 아쉬웠거나 후회되는 일을 바로잡는 것이다. 자기보다 2년을 더디게 살고 있는 성현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것은 후회와 아쉬움 그 이상이다. 후회라는 말 이면에 자신이 바라던 모습과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없던 이유를 전하면서 성현과 은주는 복잡하고도 단순한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은주와 성현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성현이 은주를 발견해도 그녀는 정작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은주가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고 해도 그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길이 없다. 둘은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전할까. 우편함은 둘의 마음도 전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을래? 넌 커피 마셔.”
엽기적인 그녀
곽재용ㅣ코미디ㅣ2001년ㅣ122분
<엽기적인 그녀>는 2000년대 영화의 재기발랄하고 조금은 엉뚱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당시 포털 사이트 ‘야후’에 누리꾼이 즐겨 검색하던 단어 중 ‘똥’이나 ‘엽기’가 많았다는 뉴스를 떠올리면, 인터넷 보편화를 앞둔 사람들이 엉뚱하고 기괴한 것을 좋아했다는 점을 가늠할 수 있다. 극중 ‘그녀’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영화 제목만큼 기괴하고 엽기적인 모습으로 아주 강하게 각인된다. 우리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식초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신’ 그녀는 지하철에서 견우를 처음 만난다.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부대끼는 속까지 시원하게 쏟아내면서.
그녀와 견우는 엽기적이고 이상한 인연을 이어나가며 가장 가깝고 솔직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지하철 안에서 뺨 때리기 내기를 하고, 수업을 빠지기 위해 교수에게 임신 중절 수술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며, 긴긴 잠수 끝에 갑자기 나타나는 게 어쩐지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정반합을 이루면서 둘은 하나의 콤비가 되어간다. 견우는 매번 그녀에게 당하지만, 늘 그녀를 감싸주는 사람도 견우다. 그녀의 맞선 자리에 나온 남자에게 그녀에 관한 조언을 하는 견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녀를 항상 이해할 수 없어하던 견우는, 이제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 촌스럽고, 조금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 빈틈으로 유쾌함이 가득 메우고 있다. 아주 엽기적이고 소란스러운 방식으로 말이다.
“잘 지내나요?
난 괜찮아요.”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ㅣ멜로ㅣ1999년ㅣ117분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우리의 인사말인 ‘안녕’을 보아도 정서적, 육체적 ‘안녕安寧’을 묻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위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일. 그리고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일은 결국 그(그녀)를 사랑하는 일과 다름 없다. <러브레터>는 나도 모르게 잊어버린 기억의 편린을 조금씩 주워간다. 그 조각을 모두 모아 맞춰보면 순수하게 행복을 빌던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진실된 염원으로 행복을 빌던.
연인 이츠키(남)의 죽음 이후에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 히로코는 그의 졸업 앨범에서 그가 살던 옛날 집 주소를 발견한다. 그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예기치 못한 답장을 받게 된다. 신기한 마음으로 몇 번 편지를 주고받고 나서야 이츠키와 이름이 똑같은, 같은 학교 출신의 여자가 보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히로코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추억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이츠키(여)는 이츠키(남)를 기억하게 되고,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가둬둔 일들을 생생하게 마주한다. 우리가 소녀이고 소년이었을 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어쩐지 쑥스럽던 시절의 이야기. 눈 내리는 어떤 겨울에 보기 좋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담겼다.
“네가 너무 좋아. 봄날의 곰만큼. 난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귀여운 곰같이 사랑스럽답니다. 이것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시작입니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용이ㅣ로맨스ㅣ2003년ㅣ97분
현채는 할인매장에서 일하는 밝고 맑은 20대 여자다. 그녀가 어느 날부턴가 시무룩하다. 만나는 남자마다 현채를 피했고, 자신을 좋아하던 남자들도 막상 데이트를 하면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고민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자신을 힘껏 사랑해줄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리지 않는다. 그런 현채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동하. 사실 동하는 현채를 오랜 시간 짝사랑해왔다. 동하는 현채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 잘 못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현채가 원할 때마다 동하는 조용히 나타나서 바라는 대로 해주었고, 현채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젠가 나타날 거라는 현채의 믿음과 자신의 마음을 언젠가 알아줄 거라는 동하의 믿음. 언젠가를 대하는 두 마음이 충돌한다. 그런 현채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빈센트’라는 사람이 남긴 고백을 발견한다. 이건 마치 하나의 미션 같아서, 메모에 남겨진 것을 하나씩 해결해나갈 때마다 다음 메시지를 계속해서 발견한다. 조금 더 빈센트와 가까워지면서 그녀는 자신이 바라는 사랑의 형태를 가늠하게 된다.
봄날의 곰은 어떤 곰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중략)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봄날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행복해하지 않는 곰. 현채의 마음속에는 봄날의 곰이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누구의 목소리가 담겨있을까. 질문이 그녀의 곁으로 자꾸만 맴돈다.
“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인가요?”
클래식
곽재용ㅣ멜로ㅣ2003년ㅣ132분
같은 대학에 다니는 지혜와 수경은 가까운 친구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비극 같은 비밀이 있었는데, 바로 둘 다 선배 상민을 좋아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여기저기에 알리는 수경과 달리 지혜는 자신의 감정을 꽁꽁 감춘다. 무엇보다 수경은 계속해서 지혜에게 자신의 편지를 대필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하지만 자신의 진심을 수경의 마음으로 감춰 전달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혜는 엄마인 주희의 첫사랑이 고이 간직된 비밀 상자를 발견한다. 그 안에 담긴 엄마의 일기장과 숱한 편지들. 그 안엔 지혜가 외면하려 애쓰던 사랑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1968년 여름, 주희는 방학을 맞아 시골 삼촌댁으로 내려온 준하를 만난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한 폐가에 함께 가기로 한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나 과수원에서 비를 피하고, 정체 모를 감정과 마주한다. 뜨겁던 여름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준하는 친구 태수한테 편지 대필을 부탁받는다. 상대방은 바로 주희. 태수 모르게 주희와 준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사랑을 표한다. “보고 싶었어요.” 아무도 모르는 표정으로 입모양을 짓는다. “저도요.” 같은 마음의 또 다른 입모양. 대필한 편지를 통해 사랑이 깊어진 엄마와 자신이 묘하게 닮은 것만 같아 지혜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되새긴다. ‘고전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곳곳에 널브러진 흔한 것.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것을 보고 촌스럽다고 표현한다. 촌스러워서 어떡하냐고? 지혜의 ‘고전적인’ 편지글을 보고 수경이 한 말이 떠오른다. “어우! 촌스러워. 좋아. 촌스러워서 좋아.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좋아, 얼굴 팔릴 준비가 됐어!
주대회야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브링 잇 온
페이튼 리드ㅣ코미디ㅣ2000년ㅣ112분
2000년대 초반, 한국과 일본에서 서정적이고 잔잔한 분위기의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면, 할리우드는 10대가 점령했다. 일명 ‘하이틴 영화’ 춘추시대랄까. 그러니까 <그 놈은 멋있었다>의 지은성과 <늑대의 유혹>의 반해원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할리우드에서는 고등학생들이 할리우드의 서사를 풀어 내려갔다.
<브링 잇 온>은 고등학교 치어리더 팀의 깜찍하고 유쾌한 대결을 다룬다.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미국 특유의 동아리 활동과 치어리더를 맡은 학생들에게 환상을 품은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오 미키 유쏘 파인’으로 시작하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치어리딩 음악으로 대변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 랜쵸카르네 고등학교의 치어리더 팀인 ‘샌디에고 토로스’는 미국 치어리더 경연대회에서 5년 연속 우승한 최강 팀이다. 팀의 새 주장이 된 토랜스에게 6년 연속 우승이라는 큰 과제가 주어진다. 어느 날, 토랜스는 자기 팀의 안무가 다른 팀 안무를 도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전 팀장이 가난한 동네에 있는 이스트 캠튼 고등학교의 치어리더 팀 안무를 도용한 것이다. 토랜스는 대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새로운 안무를 만들어내야 한다.
<브링 잇 온>에는 하이틴 영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클리셰’가 있다. 어떤 결핍이 있는 주인공, 그 결핍을 극복하는 데 무관심한 친구들, 그러다가 한마음으로 뭉쳐 결국 정정당당하고 정의로운 목표를 지향하게 되는 것. 조금 뻔하디 뻔한 이야기처럼 보이더라도 하이틴 영화의 유쾌하고 발랄한 세계는 결코 놓칠 수 없다. 제법 시끄러워야 제맛인 영화가 있으니까!
에디터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