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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카페 뤼미에르’에 있다
“곤니치와!”
소리가 너무 컸다. 내 목소리는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덤프트럭이라도 던진 양 실내에 파장을 일으킨다. 마스터는 우렁찬 인사 소리에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나지막이 “응.”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는 ‘에리카’. 도쿄, 진보초에 위치한 카페다. 2월의 추위를 견디며 복잡한 시부야 역에서 헤매는 동안 머릿속엔 온통 에리카 생각뿐이었다. 그 아늑한 공간, 단정한 잔에 나오는 맛있는 커피. 공항으로 향하기 전, 잠시 들러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에리카 문을 열며 반가운 마음이 좀 과했던 거다. 하지만 괜찮다. 여기에는 ‘에리카 관성의 법칙’이 있어서 이깟 과한 곤니치와쯤, 아무렇지 않게 끌어안고 다시 고요로 돌아갈 수 있다.
에리카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에서 주인공이 즐겨 찾는 카페다. 내가 진보초에 온 이유다. 영화 속에 나온 카페의 실제 이름이 에리카라는 것도, 어디쯤 위치한다는 것도 영화 잡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정작 가르쳐준 길로 찾아가 보니 문이 닫혀있다. 잔뜩 실망해서 터벅터벅 헌책방 골목을 걷는데 똑같은 폰트로 쓰인, 같은 이름의 간판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라, 이게 무슨 일이지? 카페가 날 따라온 건가? 차라리 운명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나의 에리카를 딱, 만났다.
홀린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매콤한 담배 냄새가 먼저 반긴다. 세련된 차림의 노신사가 담배를 태우며 신문을 읽고 있다. 마른 담배 냄새와 커피 향기가 무척 어울린다.
작지만 아늑한 공간 한가운데 난로가 있다. 그 옆에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비치한 그 날의 신문이 쌓여있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테이블마다 노란 프리지어와 안개꽃이 놓여있다. 에리카의 창은 모두 간유리다. 빛은 통과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은 통과하지 못한다. 그 덕에 카페 내부는 보호를 받는다. 저기 바스락바스락 신문을 읽는 노신사,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면서 문고본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년 남성, 서툰 일본어로 이제 막 카페오레를 주문한 금발의 여성 그리고 빨간 모자를 쓰고 잔뜩 옷을 껴입은, 한국에서 온 나까지. 모두 이 안에 있다. 흔들림 없어 보이는 든든한 테이블과 의자를 보고 있자니 욕심이 났다. 매일 와야지. 이쪽저쪽 다 앉아봐야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보게 될 이곳의 모습이 궁금했다.
메뉴에 간단하게 ‘커피’라고 쓰인 것을 주문하고, 마스터에게 문 닫힌 다른 에리카 사진을 보이며 이곳과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봤다. “이 영화 보고, 한국에서 왔어요.” 나는 조금 들떠서 영화 <카페 뤼미에르> 사진도 꺼냈다. 마스터는 사진을 보더니 “아, 여기?” 하며 빠른 말로 호로록 설명한다.
사진 속 문 닫힌 에리카는 본관으로 육십여 년이 된 곳이고, 여기 에리카는 2호점이며, 사십여 년 된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본관은 이제 문을 닫았다고 했다. 카페가 지나온 시간을 말하며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아, 활짝 웃으니 빼죽빼죽한 치아가 드러나는데 그 모습이 또 정답다.
사실 그는 감정이 크게 드러나는 얼굴은 아니다. 작은 키, 대강 남아있지만 단정히 이발한 백발의 마스터는 늘 따뜻한 베이지색 니트 조끼 안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는다. 커피를 가져다줄 때는 허리나 다리가 불편한지 끄응,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커피 잔이 달그락거린다. 깨끗하고 말간 유리컵에 담긴 물을 다 마신 후엔 또다시 찰캉찰캉 소리가 다가온다. 얼음이 들어있는 스테인리스 주전자를 들고 물을 채우러 오는 소리다.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에리카에는 음악이 없다. 여느 카페에서 은은히 깔릴 법한 BGM이 없는 것이다. 서울의 BGM에 익숙한 나는, 고요한 카페가 잠시 어색하다가 곧 들려오는 고유의 음악을 깨닫는다.
창문 너머로 골목을 지나는 스쿠터 소리가 들리고, 장난치는 아이들 소리, 또각또각 행인이 카페를 지나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찹찹찹.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는 소리, 마스터가 나지막이 끄응, 으쌰, 하는 소리도 들린다. 유리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리고, 사각사각 글 쓰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내 앞에 놓인 까만 커피 안으로 반짝반짝 오후의 햇빛이 들어온다. 말간 물 잔에도 노르스름한 조명이 비친다. BGM이 있었다면 이 빛이 보였을까? 커피 안에 들어와 앉은 이 빛이.
빛이, 이미 내 자리에 스몄다. 여기가 나의 ‘카페 뤼미에르’구나. 빛이 축복이고, 지금 이 빛이 나에게 충분하구나. 영화 제목이 왜 카페 뤼미에르인지, 지금까지도 궁금했다. ‘뤼미에르’가 ‘빛’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라는 정보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무엇을 찾아 헤맸는지. 영화에서 빛이 왜 그렇게 아름답게 쓰였는지. 그리고 그 빛이 얼마나 구석구석, 어디에나 있는지.
“커피 잘 마셨습니다! 도쿄에 있는 동안, 매일 올 거예요.”
에리카에서의 첫날, 나는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며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다짐한 대로 매일 에리카에서 넉넉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도쿄를 떠난다. 더이상 에리카에서 커피를 마실 수도, 마스터의 추임새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도쿄 여행 중 이곳에서의 시간이 가장 따뜻하고 편안했다. 에리카에서 마지막 커피를 마시며 뭐라도 하고 싶었다. 나만의 작별 인사로, 나의 카페 뤼미에르, 에리카를 그려보았다. 마스터에게 이제 한국으로 간다고, 작별 인사를 하며 그림을 건넸다. 그는 역시나 쑥스러운 얼굴로 나지막이 “응.” 대답하더니, 웬일로 한마디 덧붙인다. “오늘은 빨간 모자 안 쓰고 파란 모자를 썼구나.” 이번엔 내 얼굴이 쑥스러워진다. 모자 대신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낀다. 하지만 오늘 파란 모자 쓰길 잘했네, 하고 속으로는 엄청나게 신이 났다.
카페 에리카
Café Erika
카페 에리카가 있는 진보초에서는 가능하면 천천히 골목을 구경할 것을 권한다. 잘 찾아보면 저렴하고 정성이 가득한 음식점이 많다. 유명한 카레 가게 역시 이곳에 모여있다. 그중 에리카의 아침 메뉴, 버터 바른 토스트와 삶은 달걀, 커피 세트를 추천한다.
글 사진 이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