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아름다운 것

보설 — 화가

마음이 묘해지는 순간이 있다. 신비로운 색상이 경계없이 얽혀들 때 그렇다. 누군가 내게 꿈을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말없이 ‘피에르’를 내밀 것이다. 피에르를 바라보는 건 마치 꿈결을 거니는 것과 같다.

무심코 지나치거나 밟고, 또는 던지는 돌의 기능적 변화를 통해 

우리가 쉽게 보지는 못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표현하고자 합니다.

잠시 멈추어 돌의 단면을 깊게 들여다보며 

돌의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성질을 느껴보기를 바랍니다.

“장르와 소재의 경계가 없는 다양한 작업 방식을 실현합니다. 주로 그림을 그리고 책과 같이 아름다운 것을 만듭니다. 무용한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눈앞에서 그 글을 읽어주니 머쓱하네요(웃음). 만나서 반가워요. 간간이 책을 만들고, 피에르Pierre라는 이름으로 돌에 그림을 그리는 김보설이에요. 소개 글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1-2년 전에 쓴 글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요. 그걸 쓸 당시엔 제 작업이 제 눈에도 아름다워 보이던 시기였어요. 작업하다 말고 “아름답다….” 그러던, 자신감이 넘치던 시기였죠. 지금도 물론 저는 그런 마음으로 작업하는데, 누군가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하고 생각할까 봐 조금 조심스러워지기도 해요(웃음). 

 

아니요, 아름다워서 계속 작업대를 바라보게 돼요(웃음). 보설 씨는 특히 어떤 걸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맑고 깨끗한 거요. 이를테면 유리, 도자기 같은. 자연적인 깨끗함도 좋아하고요. 아! 요즘은 조카를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갓 일곱 살이 되었는데, 쿼터 혼혈이라 아랍어랑 영어를 먼저 배우고 이제 한글을 떼기 시작했거든요. 요즘 겨우 더듬더듬 대화가 되는데, 조카랑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내요. 

 

곳곳에 있는 어린아이 흔적이 조카의 자취였군요. 보설, 이름이 특이해요. 활동명 같기도 하고, 본명 같기도 하고. 

본명이에요, 김보설. 정확히는 제 두 번째 이름이죠. 원래 이름은 김민지였는데, 어딜 가나 꼭 한 명씩은 있는 이름이잖아요. 심지어는 중학생 때 전교 1등 이름도 김민지였어요. 저는 거의 뒤쪽에 있던 학생이어서 종종 비교당하곤 했죠(웃음). 너무 평범한 이름이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름이라는 게 은근히 콤플렉스여서 스무 살이 되면 이름부터 바꾸겠다고 벼르는데, 언니도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었는지 먼저 개명을 하더라고요. 언니 이름이 ‘보빈’이 되어서 ‘보’ 자는 돌림자로 쓰기로 하고 작명소에 갔어요. “특이한 이름을 갖고 싶다.”고 했죠. 이름 여러 개를 주셨는데 보자마자 ‘내 이름이다!’ 싶던 게 보설이었어요. 클 보 자에 셀 설 자를 써요. 뭔가를 크게 불러들인다는 뜻인데, 이름대로 살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웃음). 

 

발음했을 때 참 부드럽고 안정적인 이름이에요. 보설 씨는 무용한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의 무용함이에요? 

‘관심사가 아닌 것’이라고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돌로 작업을 하니까, 제 관심사는 돌이거든요. 그래서 어딜 가든 땅만 보면서 다녀요. 근데 제가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허리 휜다고, 목 늘어난다고 한마디씩 하거든요. 타인에겐 돌이 관심사가 아니니까 제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아, ‘다른 사람 시선에서’ 무용한 것에 관심을 둔다는 의미군요. 피에르도 그 작업의 일환이고요. 

맞아요. 요즘은 ‘사람들 관심 밖에 있는 돌을 어떻게 구매하고 싶게 만들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피에르 작업은 어떤 의미에선 사람들을 풍자하는 작업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자연을 너무 당연하게 여겨서 함부로 대할 때가 있잖아요. 훼손하는 사람도 많고요. 얼마 전에는 길을 걷는데, 앞서 가던 아저씨가 담뱃불을 나무에 짓이겨서 끄는 걸 봤어요. 충격적이었죠.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더라고요. 사실 돌도 그런 대상인 것 같아요. 필요로 하는 사람보다도 걸어 다니면서 발로 차거나 던지고, 길에 나와 있으면 안 보이게 치워두는 존재죠. 그래서 여기에 역으로 아름다움을 담아 사람들이 사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만, 너무 과하게 의미를 부여해서 주객전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요. 

 

피에르 작업은 어떻게 시작된 거예요? 

저는 한 손에 쉽게 잡히는 필름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모아 책을 만들고 있는데요. 스캔한 사진을 보면 유난히 나무랑 돌이 많더라고요. 한창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준비하던 시기여서 돌 사진을 모아 책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에르 작업을 하기 전에도 묵직한 돌을 주워다가 문진으로 쓰곤 했는데, 돌 책을 만들어서 문진이랑 같이 팔아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돌에 그림을 그린 게 시작이었어요. 그땐 일차원적으로 이 돌이 놓여 있던 장소를 그렸죠. 계곡에서 주운 돌이면 돌 안에 계곡을 담는 식으로요. 그러다 색을 칠하는 작업으로 발전한 건데, 처음엔 크레용을 썼어요. 근데 돌 위에선 크레용이 제대로 굳질 않더라고요. 며칠을 말려도 만지면 묻어나서 물감으로 재료를 바꿨어요. 지금은 아크릴 물감으로 작업하고 있고요. 

 

피에르를 “돌의 영원성을 다루는 프로젝트”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문득 영원한 게 뭘까 싶더라고요.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영원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죠. 특히 인간을 이루는 많은 게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인터뷰하는 게 항상 조심스러워요. 제가 뱉은 말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걸 아니까요. 당장 몇 분 뒤에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저는 그런 순간이 정말 많아서 친구들을 만나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아요.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은 영원하지 않잖아요. 매번 말로 꺼내다 보면 바뀌는 일도 있을 텐데, 그럼 제가 가벼워 보일 것 같아요. 번복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최대한 말하지 않으려 하는데, 침묵 때문에 오히려 오해가 생기기도 해요. 친구랑 대화하다 다툴 기미가 보이면 그때부터 말을 안 하거든요. 그럼 친구는 답답해하죠. 이제부터 대화가 필요한 시점인데 왜 대화를 안 하려고 하냐 묻고, 저는 이제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고 하고.

말이라는 게 새삼 어렵게 느껴지네요. 다시 작업 이야기를 해볼게요. 피에르는 몇 개 에디션으로 작업되고 있어요. Mont(산), Jardin(정원), Melting Mont(녹아내리는 산), été pourri(춥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 Forêt(숲), Flot(파도)…. 전부 자연에 기반한 이름이에요. 

그중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자연의 모습을 담고자 했어요. 가장 먼저 선보인 시리즈가 ‘정원’인데요. 집에 있던 꽃을 보고 칠한 게 시작이었어요. 그다음이 ‘산’인데, 찍어둔 사진을 보면서 그때그때 색감을 정해서 입혔죠. 

 

‘녹아내리는 산’, ‘춥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은 좀 다르게 느껴져요. 설명적인 이름이기도 하고요. 

어, 맞아요. 산, 정원, 숲, 파도 에디션은 무얼 어떻게 칠할지 정하고 작업한 거라면, ‘녹아내리는 산’과 ‘춥고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은 칠하면서 정해진 거였어요. 산 에디션 작업을 하고 있다가 눈이 녹는 형상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하얀색 물감을 올려 녹아내리는 산을 완성하는 식이었죠. 

 

처음 돌에 그림을 그릴 때 이렇게 본격적인 작업이 될 거란 예감이 들었나요? 

아뇨, 전혀요. 처음 돌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땐 회사 생활을 하던 때라 쉬는 날에만 작업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작업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회사 생활로 지친 마음이 돌에 그림을 그리면서 풀리니까 종일 작업만 하기도 했어요. 작업들을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SNS에 업로드를 시작했는데요. 점점 양이 쌓이고 업로드 횟수도 많아지니 판매 문의가 들어오더라고요. 마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많아진 상태라 한번 판매해 볼까 싶었죠. 처음에는 입점처 없이 홈페이지에서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예쁘게 만들어질 때마다 친구한테 하나씩 선물하던 건데, 누군가 구매를 원한다는 게 신기하고 좋더라고요. 

 

저는 누군가 힘을 쏟아서 만들어낸 작업물이 정당한 금액을 받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는 구조가 참 좋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순수하고 고귀하다는 이유로 상업과 연결 짓는 것에 유난히 예민한 시각도 있잖아요. 

작가가 작품을 판매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활동하는 데 엄청나게 필요한 일이에요. “예술가는 가난해야 해.”라는 말이 저는 정말 이해가 안 되거든요. 가난한데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지, 싶어서요. 그래서 브랜드와 작가의 협업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도 좋은 현상 같아요. 꼭 협업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작가와 브랜드가 만나는 지점에선 시너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지금 판매하는 피에르는 두 종류지요. 드롭 피에르Drop Pierre와 프티 피에르Petit Pierre. 드롭 피에르가 문진 용도라면 프티 피에르는 향꽂이로 만들어졌어요. 용도를 부여했지만, “그냥 가만히 봐도 아름답다.”라고 소개하는 걸 보면 굳이 용도나 목적을 제한하는 건 아닌 듯해요. 

맞아요. 결국 사람들을 위하기보다는 제가 구분하기 쉽게 지칭하는 건데요. 드롭 피에르는 제가 돌을 문진으로 사용하곤 해서 드롭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프티 피에르는 향꽂이로 좋을 것 같아 개인적으로 사용했는데 판매 문의가 와서 본격적으로 작업하게 된 피에르예요. 똑같은 이름을 쓰기에는 용도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사이즈도 작기 때문에 프티라는 이름을 붙였죠. 사실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어서 입점처에서 잘못 기재해 놓아도 굳이 정정하지 않아요. 어떤 판매처에선 피에르 드롭이라 순서를 바꾸어 써두기도 하고, 그냥 오브제라고 써놓은 곳도 있어요. 어떤 피에르든 사용하는 사람이 스스로 쓸모를 부여하면 좋겠어요.

기억에 남는 피에르의 쓸모가 있나요? 

누름돌이 된 피에르요(웃음). 밥솥 위에 두고 뚜껑을 누르는 용도로 피에르를 사용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냄비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왜 하필 밥할 때 사용하시는지 여쭤봤더니, 우연히 올려 봤는데 딱 알맞았대요. 무게감이 있어서 안정적이기도 했다고(웃음). 

 

엄청 아름다운 풍경인걸요? 무쇠 뚜껑 위에 신비로운 피에르라니(웃음). 책 작업도 꾸준히 해왔는데, 피에르 작업을 담은 《Pierre》라는 책도 만들었죠. “사진집이면서 화집이 될 수 있다.”는 소개 글이 적확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장르의 작업이 만나는 경험은 어땠어요? 

재미있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그 당시에는 제 피에르 작업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다 생각했고, 직접 찍은 사진들을 확대하거나 크롭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한 건데요. 편집 디자인을 배워본 적이 없어서 이전 책들은 교재를 보면서 공부하듯 만들어 왔거든요. 근데 《Pierre》는 이전 작업과 달리 욕심이 나더라고요. 기교도 부려보고 싶고, 남들이 안 하는 것도 해보고 싶었죠. 이것저것 해보려다 결국에는 다 덜어내고 깔끔하게 완성했는데, 오히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해보자는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것저것 해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요(웃음). 

 

《Pierre》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들여다보면 질감이 살아 있어서인지 여러 생각이 들어요. 아이스크림 같기도 하고, 콘크리트 바닥 같기도 하고요. 

맞아요. 돌에 작업하면 입체감이 생겨요. 종이랑은 다르게 이야기를 더 많이 담을 수 있죠. 돌 안에는 굴곡도 있고, 그림자 진 부분도 생겨서 깊이감을 담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제일 좋은 건 실수해도 덮을 수 있다는 거(웃음). 종이는 조금만 실수해도 종이가 울어서 새 종이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요. 돌은 그 위를 물감으로 덮으면 되니까 색이 별로다, 싶으면 다른 색으로 덧칠하는 일도 많아요. 단점은 딱 한 가지인데, 너무 무거워요. 전시 한 번 하면… 어휴. 이거 들어 보실래요? 

 

(돌이 담긴 박스를 든다.) …너무 무거워요. 

작년에 연희동 그로브에서 전시할 때가 정말 힘들었어요.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공간이거든요. 돌을 하나씩 포장해서 캐리어에 넣고 옮기는데, 하필 그때가 또 한여름이었어요. 땀에 흠뻑 젖어서 힘들게 옮긴 기억이 나요. 무겁다는 것만 빼면 돌에 작업하는 건 항상 재미있어요. 약간, 종이를 구겨서 작업하는 거랑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까 돌에 작업하면 “종이랑은 다르게 이야기를 더 많이 담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 이야기라는 게 어떤 거예요? 

이 돌의 이야기, 돌의 사연을 생각해요. 데굴데굴 구르다가 어딘가 깎였을 수도 있고, 엄청 커다란 돌인데 잘려 나온 걸 수도 있고…. 그런 이야기를 좀더 입체감 있게 전달하고 싶어요. 특히 이야기가 보이는 돌들이 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돌이 해구석인데요. (박스에서 돌을 꺼내며) 이렇게 구멍이 많은 돌이에요. 보통 어항에 넣는 용도죠. 물고기들이 구멍 사이로 지나다니면서 놀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저는 돌을 직접 수집도 하지만 구입도 하는데, 해구석을 주문하면 보통 큰 돌이 와요. 어쩌다 작은 아이가 딸려 올 때면 ‘넌 어디서 잘려 왔니.’ 그런 생각도 하고요. 

 

저는 해구석이라는 단어도 처음 들어보는데, 돌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의외로 생각보다 사람들이 돌을 많이 산다는 거요. 그래서 찾아보면 돌을 파는 곳도 많아요. 물고기나 조경을 위해 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돌 구입 후기를 보면 “우리 아이들이 좋아해요.”라는 이야기가 자주 보이는데 그 ‘아이들’이 물고기더라고요(웃음). 수석이 아니더라도 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알게 되는 게 좋아요. 

 

돌은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구입하더라도 어떤 돌이 나한테 올지 정확히 알 수 없지 않나요? 

맞아요. 그래서 망할 때도 있어요. 아름다운 돌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샀는데 제가 생각한 모양과 엄청 다른 경우도 있고, 제가 보기에 예쁘지 않은 돌들이 올 때도 있죠. 무엇보다 제대로 서지 않는 돌이 가장 아쉬워요. 그건 어떻게 해도 작업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 돌은 보통 실험용으로 쓰는 편이에요. 한번은 잘 바스러지는 돌을 다 깬 다음에 그 돌가루들을 물감이랑 섞어서 위에 올려 보기도 했거든요. 재미있는 시도였죠. 돌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해보려고 해요. 

 

계속해서 재료를 발견해 가는 거네요. 

앞으로 계속 발견해 나가고 싶어요. 작게 칠하던 돌이 점점 더 커지고, 크레용에서 지금 물감이 재료가 되었듯 범위나 영역은 계속 변할 것 같아요. 이다음엔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저도 궁금해요. 돌이 아닌 다른 데다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 이야기는 좀 아쉬운데요. 

겁이 많아서 당장은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웃음).

얼마 전에 새 작업이라고 하면서 ‘마음에 돌멩이’ 시리즈를 소개했어요. 

한창 마스크를 철저하게 쓰고 다니던 시절인데, 처음엔 다들 마스크 쓰는 걸 불편해했잖아요. 근데 어느 순간 벗는 게 불편해진 상황을 보면서 궁금해졌어요. 마스크를 썼을 때 불편한 게 많은데 왜 다들 벗기 싫어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스크를 벗으면 감정이 다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표정이 확실히 보이니까 다들 가리고 싶어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절엔 시멘트에 박힌 돌들을 볼 때마다 주웠는데요. 그게 꼭 우리 감정 같더라고요. 안에 숨겨진, 마스크 속에 감춰둔 표정이나 감정. 그걸 색깔로 표현해 보자 싶어서 해본 시리즈예요. 

 

피에르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매 순간 느끼는 감정이랑 생각을 작업에 녹인다고 했는데요. 저라면 할 때마다 매우 다른 색깔이 나올 것 같은데 보설 씨 작업엔 비슷한 결이 녹아 있어요. 감정에 기복이 없는 사람일까 싶었죠. 

저, 기복 엄청 심해요. 특히 슬픔에 잠길 때가 많은데, 그럴 땐 작업하지 않아요. 그래서 비슷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 같아요. 슬플 땐, 그냥 슬픔에 잡아먹힌 채로 가만히 있어요. ‘언젠간 날 뱉어내겠지.’ 하면서요. 

 

슬픔에 잡아먹힌 채 작업한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 거 같아요? 

검정색을 가장 먼저 집겠죠. 조용하고 우울한 돌멩이가 될 거예요. 

 

피에르엔 자연스럽게 보설 씨가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제 취향. 근데 요새는 점점 더 취향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옷차림에서 취향이 많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저는 까만 옷을 가장 많이 입지만 빈티지 숍에 가면 눈이 막 돌아가거든요(웃음). 체크 치마 너무 예쁘고, 떡볶이 코트 귀엽고…. 어떻게 보면 ‘세련된 촌스러움.’ 그게 제 취향인 것 같아요. 그게 작업으로도 표현되는 것 같고요. 

 

어? 저한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에요. 

어? 그럼 어떻게 느끼세요? 

 

신비로운 느낌. 해저 탐험이나 우주 같은 게 떠올라요. 

와, 정말요? 너무 재미있네요. 저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고 싶어요. 

 

누군가 이 대화를 보고 보설 씨에게 자기만의 감상을 전해주면 좋겠어요(웃음). 마지막으로 ‘만약에’ 질문을 드릴게요. 여기는 불가능한 게 없는 세상이에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어떤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산의 돌을 칠해보고 싶어요. 산 전체를 칠하는 건 힘들 테니까 그중 가장 큰 바위를 골라서 마음껏 칠해 볼래요.

오늘 만남을 준비하다 피에르의 아름다움에 반해 나의 피에르를 찾아 헤맸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모양, 색깔…. 어떤 아이를 데려올까 고민하며 겨우 골랐는데, 인터뷰 당일까지 받아보지 못했다. 대화가 끝나고 보설 씨에게 물었다. “입점처에서 아직 제 피에르를 보내주지 않았어요.” 그 순간 그의 눈이 흔들리며 “혹시 이거 주문하셨어요?” 묻는다. 작업대에서 한참 만지작댄 그 돌이 작업 중인 내 피에르라니. 이 돌이 아주 오랫동안 곁에 있을 것임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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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