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이 열리는 숲

보림출판사

그림책이 열리는 숲

보림출판사

한 편의 그림이 백 마디의 말을 대체할 때가 있다. 그림 너머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면서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든다. 몇십 페이지 되지 않는 분량의 쪽수, 길지 않은 글, 개성 넘치는 그림. 이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는 걸까.

나 어릴 적에

우리 엄마는 동화책을 선물하면 맨 앞장에 편지를 써주었다. 항상 내용도 똑같았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엄마한테 꼭 이야기해줘.’ 내용을 읽어보지 않고 책을 샀을 리도 없을 텐데 당신은 내게 그림책 이야기를 설명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유치원에 가기 전, 엄마가 머리를 묶어주는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동화책에서 본 이야기를 설명해주었다. 매일 있는 일이었고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나는 그 시간을 무척 사랑했다. 엄마와 나만이 공유하는 시간이었고 이야기였으므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동화책과 가까운 편이었고 나이를 먹어서도 유난히 그림책을 좋아했다. 덕분에 여행을 떠나면 그 나라의 언어로 쓰인 그림책을 사는, 겉으로 굉장히 고상해 보이는 취미도 생겼다.

어렸을 적에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세상에 ‘이런 시선을 가진 누군가’와 동시대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 좋아했다. 같은 사건을 보고 비슷한 결론을 내려도 그것을 표현하고 발화하는 과정이 이토록 다르다는 게 변태처럼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보림출판사’의 그림책은 엉뚱하고 우울하고 재기발랄하고 몹시 단정하거나 몹시 수선스럽지만 그 안에는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가 있다. 마냥 순수하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이 날 것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이제 내가 머리 굵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토끼와 구름 위에서 뒹굴고 노는 것만 잔뜩 상상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제 줄거리의 지향점을 궁리하고 그 끝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지 탐하게 된 것이다. 0세부터 100세까지 함께 즐겨 볼 수 있다는 그림책. 보림출판사의 그림책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이야기로 만든 울창한 숲

보림출판사의 ‘보림’은 ‘보배로운 숲’을 뜻한다.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란 마치 하나의 숲, 하나의 놀이터를 구축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최근 아이들에게 좋은 책으로 ‘학습하기 좋은 책’, ‘생활습관을 개선해 주는 책’, ‘특정한 대상의 개념을 인지시켜주는 책’ 등이 떠오르지만 보림출판사는 아이들이 예술적인 감성을 기를 수 있는 책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림책은 아이들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인문 교양서라는 믿음을 굳건히 지켜온 것이다. 책을 통해서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고 새로운 영역의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그림책의 궁극적인 기능이나 역할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림출판사를 우직하게 이끌어온 권종택 대표는 오랜 시간 옆에서 두고두고 볼 수 있으면서 꾸준하게 그들의 성장을 독려하는 것,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감성과 발견을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꼽았다. 물론 그저 몇 권의 책으로 아이들이 커다란 변화를 겪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만큼 다양한 책을 접해야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한다. 하나의 숲이 울창해질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평생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좋은 일도 있고 행복한 일도 있지만 슬픈 일도 힘든 일도 함께 겪게 되잖아요. 때마다 자신만의 올곧은 판단과 선택이 뒤따르는데, 집안의 가풍, 평소 습관, 교육 수준 등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어렸을 적 그림책을 보고 받았던 내재된 감동과 감성들이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사람들 마음 안에는 저마다 아주 작고 조용한 창고가 있어요. 좋은 그림책을 읽고 감동받고 성장해 과는 모든 과정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인데, 평생 거기서 필요한 것을 꺼내 쓰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책에서 말하는 예술성이 ‘그림’을 가리킨다고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한 권의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텍스트라고 그는 덧붙였다. 여기서 텍스트란 글자의 형태로 이루어진 내용만을 말하지 않는다. 글이 없는 그림책을 보아도 독자들은 그것이 어떤 맥락의 이야기인지, 어떤 장면을 구상하고 싶었는지, 말미에는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까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 무언의 ‘전달’이야말로 텍스트이다. 하나의 텍스트가 한 권의 책을 끌고 나갈 수 있는지가 발간 가능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 예술성을 얻어낸 텍스트는 하나의 그림책이 되고 사람들의 손으로 전달된다.

당신의 암묵적인 언어

대중적으로 그림책이 아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시선들이 많지만 최근에는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이 보기 좋은, 어른이 봐야만 하는 그림책들도 다수 발간되고 있다. 아이들용 서적만 있던 과거와 달리 그림책의 새로운 갈래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 긴 문장 없이 몇몇 단어를 던지는 방식을 띠고 있거나 혹은 글자가 전혀 없는 책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림책의 대중적인 폭이 넓어졌고 시각 위주의 영향력이 더 커진 덕이다.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 속에 눈빛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인간이 사용하는 말 중에 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많아 봐야 10~20퍼센트밖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그림은 암묵적이다’라고 하죠. 그림책에서는 글로 하지 못한 언어들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어요. 저는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그림책을 많이 본 사람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잘 간파하고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책 속에서 작가는 어떤 인물을 통해서 독자와 대화를 하잖아요. 그림을 통해서 특정한 언어보다 먼저 배울 수 있는 ‘담화’가 그 안에 있는 거죠.”

그림책 속에서 언어는 직접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림이라는 수단을 통해 공통의 언어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의미 전달을 위한 언어는 발화자의 문화와 삶 그리고 역사를 알아야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림책에 녹아든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그림책의 사회적·문화적·역사적 코드를 안다면 더욱 제대로 된 의미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어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림책을 한번 읽을 때에는 바다의 표면에 떠 있는 것과 같지만 여러 차례 읽고 다양한 해석으로 나아갈수록 심연으로 깊숙이 나아갈 수 있다고.다만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 그림책은 저마다 다른 속성과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림마다 작가가 다르고 책마다 가지는 고유한 모습들, 당대성, 활용한 매개체 등은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있는 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가깝다. 자기의 모든 것을 유머화 하는 사람, 유독 슬픔을 잘 표현하는 사람, 또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부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림책의 매력이 그 다양성이라고 해도 좋다. 다만 무언가를 규정하려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규정화된 생각이 유입되는 순간에 경계를 넘나들던 자유로운 생각의 분출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그림책은 얼핏 비슷한 내용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보여요. 일관된 것으로 방향성이 규정되었기 때문이죠. 규정은 아주 위험해요.”

시도와 적용, 새로움

보림출판사에도 없는 게 있는데 바로 ‘고전세계명작집’이다. 이미 잘 나와 있는 그림책보다는 사람들 손에 닿지 않은 책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림책의 역사를 돌아보면 서구에서 유입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인 터라 보통 대중들이 친숙해 하고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은 영미권이나 유럽권의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보림출판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아시아권 그림책이 궁금했다. 인도를 비롯하여 태국, 베트남, 중국, 몽골 등을 떠올렸을 때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그림책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그림책을 선별해서 발간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네팔을 마지막으로 열네 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를 완간했다. 

보림출판사는 그림책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색다른 시도를 해왔다.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추가된 레이저컷팅은 작가와 편집자, 디자이너가 최종마감을 하던 이전과 달리 기술이 최종마감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레이저컷팅 기술로 제작된 책으로 《레베카의 작은 극장》, 《파리에서 보낸 하루》가 있다. 실크스크린의 경우 인도의 장인이 한 장 한 장 찍어내는 것이라 모든 책의 색감이 다르게 나타난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권의 책이기 때문에 넘버링을 붙여 소장가치를 더욱 높였다. 《나무들의 밤》, 《물 속 생물들》, 《구둣점의 나라》에서 실크스크린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이전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팝업책의 경우, 한두 번 보면 금세 싫증이 나는 점을 고려해서 조금 더 메시지를 강렬하게 넣었다. 《나무늘보가 사는 숲에》나 《바다이야기》의 경우 사람들이 왜 자연을 보호하고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강조했다. 《밤을 깨우는 동물들》 같은 병풍 그림책은 4미터를 족히 넘는 페이지를 죽 늘어뜨리고 그림의 디테일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다. 점층적으로 커지는 그림들은 가히 압도적이다. 다양한 시도와 새로움을 향한 갈망으로 보림출판사는 그림책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예술놀이 그림책을 표방한 아티비티Artivity 책들이나 옛 시인의 시 구절을 그림으로 묘사한 책들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기도 하다.

손으로 만들고
마음으로 다듬는

“어떤 작가들은 그림책을 통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제기하거나 비판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림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텍스트가 가진 메시지가 예술성을 만나 어떻게 표현될 지가 가장 중요한 지점인 거죠. 물론 보림출판사에서도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문제가 드러나는 그림책들도 있었어요. 그 상황 자체를 함축적으로 보여줄 순 있죠.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를 직접 의도하려고 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그런 바를 요구해서도 안 되고요.”

나는 이따금 사람들이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이 사회에 어떤 ‘이바지’를 하고 싶은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나 일들은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림책을 통해서 특정한 사회의 모습을 의도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았다. 책을 접하고 읽는 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 테두리 안에서 마음껏 느낀 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몇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미담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나쁜 행동을 일삼으며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운 누군가가 따뜻하고 교훈이 가득한 이야기를 듣고 뼈저리게 뉘우쳤다는 줄거리만큼 진부한 클리셰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실생활 영역에서 책 한 권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지만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며 사람은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림책 한 권으로 구원받는 삶이라니,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분명 우리를 인도하는 수많은 요인 중에 그림책은 항상 있었다. 깨끗한 물과 따사로운 햇살. 온화한 바람과 적당한 습도. 축축한 토양과 그에 함께 살아가는 벌레들. 해충을 잡아먹을 새들과 영양분이 되어줄, 생을 다한 생명까지.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세상에 맞물려 돌아가는 모든 게 나무 한 그루의 생명과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림출판사가 품은 작은 나무는 이제 울창하게 가지를 뻗고 있다. 긴 시간을 건너 생활 전반의 것들이 그 숲 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그림책이 되듯이 말이다.

보림출판사의
공간들

01 보림인형극장

보림인형극장은 아이들이 지금의 나이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만든 공간이다. 어른이 보아도 좋은 인형극을 만들고자 전 세계 다양한 인형극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A.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88 1층
T. 031 955 3456

02 보림책방 

보림출판사 1층에는 널따란 책방이 하나 있다. 이름하야 보림책방. 보림출판사에서 그동안 발간해 온 다양한 그림책들이 준비되어 관심 있는 책을 편하게 볼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한 아동용 크기의 책상과 의자도 다수 준비되어 있다. 

A.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88 1층
O. 월요일 휴무 10:00~18:00

03 그림책 카페 노란 우산

상수역 부근에 노란 간판이 눈에 띄는 그림책 카페. 보림출판사의 대표 그림책인 《노란 우산》을 차용하여 카페 이름을 지었다. 카페보다는 갤러리에 가까워 보이는 장식과 조명들이 눈에 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림책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A. 서울 마포구 독막로 64
O. 11:00~22:00

04 홍성찬 갤러리

보림 인형극장 앞 넓은 공간에는 갤러리가 마련되어 있다. 전시마다 다양한 콘셉트를 통해서 아이들이 보고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미술 작품이나 조각품, 가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보림책방이나 인형극을 찾았을 때 함께 들르기 좋다.

A.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88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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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Hae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