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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곽명주
2년 전 내가 에디터 일을 막 시작할 때 친한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대학생이 한 명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학생이 그린 그림들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두꺼운 심을 가진 연필로 단숨에 그린 듯한, 여백이 많은 그림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나는 어떤 그림이 좋은지 분별할 능력이 없었는데, 그 그림은 왠지 가지고 싶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음이 굳어진 나는 친구에게 그 그림을 살 수 있는지 물어봐 주길 부탁했다. 그런데 며칠 뒤 내가 살던 집으로 우편이 도착했다. 봉투에는 가지고 싶어하던 그림과 함께 몇 장의 그림이 더 들어 있었다. 고맙다는 내용의 쪽지도 있었다. 아직 얼마를 줘야 하는지 묻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명주와 나는 그렇게 알게 됐다. 그때부터 우리는 1년이 넘도록 직접 만나는 일 없이 서로 응원했다. 이제는 많은 곳에서 명주의 그림을 볼 수가 있지만,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언제 힘들고 기뻤는지 제대로 얘기를 들어준 적이 없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지금 나처럼, 그림 안쪽의 이야기들을 궁금해 하지 않을까.
INTERVIEW
예전 이야기
곽명주 (26)
화학전공으로 대학을 입학했다가 디자인과로 전과했는데, 그때부터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꿨던 거야?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궁금하네.
무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요. ‘대학에 왔으니 졸업장은 따야겠다’ 생각했는데 이왕이면 재미있는 걸 하길 바랐어요. 그때 제 취미가 그림 그리는 거였고요.
그때도 지금처럼 그림을 잘 그렸어?
아니에요. 그때 전과 시험을 9일 남겨두고 동네 미술학원에 등록해서 석고상을 계속 그렸어요. 그런데 제가 너무 못하니까 매일 줄긋기만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4일 나가고 5일째는 안 나갔어요. 막 놀고 있는데 미술학원 앞을 지날 때 선생님을 만났어요. 왜 안 나오느냐는, 꾸중을 듣고 다음날부터 다시 나갔죠.
그럼 남은 4일 동안 실력이 늘어서 합격하게 된 건가?
어떻게 4일 만에 잘 그리게 돼요. 계속 이상하게 그렸죠(웃음). 그래도 일단 선생님이랑 작전을 짰어요. 전과시험이 석고상 세 개 중에 무작위로 하나를 골라주고 그걸 누가 잘 그리는 지 보는 건데, 시간상 세 개를 다 연습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한 거죠. 그래서 두 개만 연습해서 갔어요. 그런데 시험을 치러 갔더니 모르는 석고상이 있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어떡해요 무조건 그려야지. 엄마한테는 전과하는 거 숨기고 컴퓨터 학원 간다고 돈 받아서 미술 학원에 다녔어요. 종이도 친구들이 다 사줬던 거고요. 그냥 나올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 제가 어떻게 그렸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근데 통과가 됐어요. 아홉 명 중에 네 명을 뽑는데 제가 된 거예요. 내가 뽑혔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게 되잖아요. 저는 아마 그림을 잘 그려서 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격한거야?
전과시험 볼 때 종이 한 장을 주거든요. 전과를 왜 하려고 하는지 쓰라고 주는 거예요. 저는 그걸 두 장이나 더 받아서 썼어요(웃음). 아마 불쌍해서 뽑아주지 않았나 싶어요.
재미있는 일이네(웃음).
그때 북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였는데, 전과시험 때문에 학원가는 저 대신 사장님이 가게를 봐주기도 했어요. 엄마한테도 비밀로 해주고(웃음). 정말 고마운 일이었어요.
전과가 된 다음에는 어땠어?
무시를 많이 당했어요.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더니 비교가 되는 거예요. 그때 그림이 아직 제 블로그에 있어요. 2007년 그림들. 이상하거든요(웃음). 근데 그때 저도 학과에 좀 실망을 했어요. 이 친구들은 처음부터 어떻게 이 길을 택했을까, 무얼 하고 싶어할까,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을 것 같았는데 많은 친구들이 그저 해오던 일을 하는 정도에 그쳐 있더라고요. 그대로 따라 그리는 식의 수업 과정도 많았고요. 그런 와중에 저는 또 학점이 잘 나오질 않았어요. 회의감이 좀 들더라고요. 그래서 휴학을 하고 다시 북카페로 돌아갔어요. 1년 동안 학교 밖에서 일하고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 서울에 와서 공책(o-check)이라는 회사에 10개월 정도 다니다가 부산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쳤어요.
그림이 많이 나아진 시기가 따로 있었을 것 같은데, 혹시 기억나?
‘공책’에 다닐 때 그림을 정말 많이 그렸어요. 실력 있는 실장님이 제 그림을 봐주셨거든요. 입사 전에 보낸 제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지금보다 나중에 큰 나무가 될 것 같다’고 말해주셨대요. 그 얘길 입사하고 나중에 알게 됐어요. 기분이 좋아서 새로 그리는 그림을 계속 보여드렸어요. 그랬더니 여기가 학교냐고, 왜 자꾸 검사 받으러 오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전공자가 아니었는데,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
더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고, 요즘엔 그저 생각을 좀 하면서 그려야 할 것 같아요(웃음).
INTERVIEW
잠 못 자던 날
정신이 없구나. 많이 바빠 보이긴 해. 요즘에는 어떤 생각하면서 지내?
돌아보면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어떤 그림을 한창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게 당시에 필요한 그림이었던 거예요. 여기저기서 연락을 많이 줬어요. 많이 노출되다 보니 요즘 어떤 그림들은 내가 그렸다고 해도 될 정도로 비슷해요. 그걸 무작정 피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제 흐름이 바뀌는 게 느껴져요. 제가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해봐야 할 것 같고.
전과를 마음먹었을 때,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하자고 마음먹었을 때 너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돈을 버는 수단으로 그리는 그림이 많아요. 하지만 저는 그림들이 전단지처럼 아무 데나 막 뿌려지는 게 싫어요. 공장에서 만드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리는 것도 싫고요.
묻다 보니 궁금한데, 혹시 스스로 그림을 시작했다고 여기는 ‘순간’이 있어?
제가 서울에 올라온 작년 11월이에요. 그때 저한테 들어온 일이 없었는데 일을 하겠다며 무작정 올라왔어요. 정말 최근의 일이에요.
그때가 힘든 시기였다고 말한 것 같은데.
11월부터 1월까지 정말 힘들었어요. 친구와 함께 살아서 월세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게 밀리면서 좀 충격을 받았어요. 저 때문에 동생이 적금을 깨고 일을 의뢰한 회사에서 아직 지급되지 않은 그림값을 개인 돈으로 미리 주기도 했어요. 어쨌든 방세를 낼 수 있긴 했는데, 그날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예요. 안 그래도 성격이 무지 급한데,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때부터 미친 듯 일을 했어요. 매일 그림을 그려서 SNS에 올리고 일도 없는데 밤을 새웠어요. 홍보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거예요. 그렇게 하니 다음 달부터는 월세를 낼 정도로, 그 다음 달에는 생활비까지 쓸 정도로 돈이 생기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쉽게 풀렸다.
맞아요. 이것도 저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INTERVIEW
그림처럼 보이는 것들
많은 일이 있었네. 요즘 좋은 일은 없어?
얘기해 보니 굴곡이 많았네요. 지금은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웃음). 정말로 너무 좋아요.
(웃음)요즘에 산 물건이나 아끼는 물건 같은 게 있어?
이번에 노트북 샀어요. 휴대용 스캐너랑. 여행하면서 그림 그리려고요.
이번 여행이 쉬려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네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리러 가는 거구나?
맞아요. 저 정말 개인작업 하고 싶어요. 저 원래 그림 그리면서 쉬잖아요.
처음엔 그 말 믿지 않았는데.
저는 정말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취미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매일 그림을 그리는 건지도 몰라요. 노래도 잘 안 듣거든요(웃음). 들어도 한 곡만 반복해서 들어요. 요즘에는 곽진언이라는 가수의 ‘그대가 들어 줬으면’이라는 곡만 들어요. 보통 좋은 노래를 발견하면 저는 백 번 연속으로 들어요(웃음).
하루 일과는 어떻게 돼?
아홉 시 반쯤 일어나서 카페에 있는 제 작업실에 천천히 와요. 점심 때 도착해서 카페 언니들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한 시 반쯤 점심을 먹어요. 세 시쯤 책상에 앉아 이제 웹서핑을 해야죠(웃음). 그러다 보면 마감 독촉 전화가 오거든요. 원래는 알아서 시작해야 하는데 저는 시작을 잘 못하는 편이에요.
대신 시작을 하면 정말 집중해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림만 그려요. 그리고 저는 밤을 새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거든요. 특히 좋은 작업을 할 땐 밤을 새운다는 일이 기쁘기도 해요. 저녁 일곱 시에 밥을 먹고 더 일하다가 열 시까지 안 끝나면 카페 문을 제가 닫고 일을 계속해요. 소파에서 자고 새벽에 경복궁 쪽에 있는 동네 목욕탕에서 씻고 와요. 5일 동안 집에 못 가서 목욕탕 간 적도 있어요(웃음).
네 그림에 꼭 있었으면 하는 게 있어? 사람들이 발견해줬으면 하는 거.
음. 잘 모르겠어요. 어려운 질문이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상업적인 그림들은 어떻게 그려도 상업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사람들도 그걸 잘 알 거예요. 그런데 개인작업들은 그렇게 보이지도 않고 점점 좋아지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개인작업을 많이 하고 싶어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고, 또 다른 작가들보다 작업량이 많은 것 같아. 일을 받는 기준이나, 일을 진행할 때의 노하우 같은 게 있어?
원하는 방향을 들어봤을 때 구체적이고 뚜렷한 작업들을 받아요. 어떤 사람들은 제 그림이 얹힌 시안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러면 진행이 쉬워지죠.
그림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건?
저는 기본적으로 사진을 많이 참고해요. 사진을 볼 때의 제 감정들에 관해 그려요. 사진뿐 아니라 보이는 걸 그린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림처럼 보이는 것들이요. 그런 게 저를 자꾸 그리게 만들어요.
영향을 주는 사람은?
예전에는 좋아하는 작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안 봐요. 요즘에는 작업을 의뢰해준 사람들을 통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최근에 <지큐GQ>매거진에 의뢰받은 일 때문에 저는 새로운 분야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요. 제가 브랜드, 제품들에 관심이 없었는데 작업을 위해 이것저것 접하다 보니 조금씩 알겠더라고요. 트렌드를 알 것 같고, 왜 좋은 브랜드를 소개하는지 알 것 같고. 이번에는 외국의 유명한 디자이너, 포토그래퍼들을 그렸거든요. 그 작업을 하면서도 ‘내가 더 알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큐>에 실린 네 그림 나도 봤어. 이번 작업은 예전 그림과 아주 다르더라. 네가 따로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내가 그걸 해낼 줄 몰랐어요. 그래도 하니까 되더라고요. 요즘에는 그래픽 작업이 흥미로워요. 재미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 작업이 있어?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작업들이 있는데, 신기하게 다 개인작업들이에요. 완성하고 나서 그림을 보면, 어떻게 그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작업들이 있어요. 그러면 정말 울컥해요. 내가 한 걸 보고 감동 받아요(웃음).
네가 그린 그림을 자주 보는 편이야?
엄청 자주 봐요. 저는 제 그림 좋아해요(웃음).
앞으로는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궁금하다.
요즘에는 대자연에 관심이 많아요. 가끔 사진들을 보는데,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풍경들이 있더라고요. 여기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요. 그리고 오래된 양복 디자인 회사의 룩북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저는 다시 태어나면 양복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웃음).
원래 하려고 했던 질문인데, 얘기하다 보니 좋은 질문인지 잘 모르겠네. 혹시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있어?
저 오늘 아침에도 어떤 문자를 받았어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문자요. 답장은 해줬지만 사실 저도 잘 몰라요. 게다가 저는 일러스트레이터가 꿈이 아니에요. 그림을 통해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요. 장사도 하고 싶고 카페도 운영해 보고 싶고 가구에도 관심이 많거든요(웃음). 그래서 문자에 답장을 줄 때 그런 얘길 했어요. 목표를 너무 한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주 멀리, 할머니가 됐을 땐 어떨까?
저 요즘 많이 듣는 얘기 중 하나가 ‘변했을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 마음은 전과를 준비하던 그때랑 똑같거든요. 그게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변할까봐 겁이 나요.
좋게 변하면 되지.
그러려면 지켜봐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일이 없어 힘들어하는 주변 작가들 얘기를 하던 중에 명주가 말했다. “나는 걱정 안 해요. 지금처럼 그림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림은 평생 내 취미니까요.” 그 얘기 다음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고 옷 장사를 하고 싶다고, 여행 가이드나 영어 선생님도 해보고 싶다 했다. 그리고 정 안 되면 남자친구 식당에서 서빙을 하거나 엄마가 하는 방앗간을 물려받으면 된다고, 계속해서 큰 소리를 냈다. 모든 일에 그림이 쓰일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그만 하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마음이 편해서 참 좋았다. 명주의 그림은 2년 전 내게도 우연히 있었고,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도 있고 또 명주 자신의 주변에도 항상 있을 것이다. 가방이나 수첩에 그려져서 책에 실려서 어쨌든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림이 그렇게 자리를 찾아간다면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에디터·포토그래퍼 전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