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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 — 양지바른
김지혜 — 지혜 스튜디오
“저게 뭐지? 근사하다.” 방금 본 멋진 소품을 설명하려는데 이름도 모르겠고 묘사도 쉽지 않다. “멋진 그림이 새겨진 카펫 같은 건데, 카펫보다 부드러워서 모포처럼 쓸 수도 있고 벽에 작품처럼 걸 수도 있어.” 모호한 설명 끝에 이름을 알게 되었다. ‘태피스트리’. 양지바른의 태피스트리는 삽시간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고, 양지의 말갛고 밝은 아트워크가 자꾸 궁금해졌다. 뭐지? 어디다 그리는 거지? 어떻게 만드는 거지? 물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안 되겠다 싶어 양지바른을 찾아 나섰다. 양지가 머무는 곳은 광주광역시 양림동. 얌전하고 조용한 동네에 초대받은 날, 궁금한 마음으로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른다. 이내 현관을 열고 마당으로 뛰어나온 두 사람. 서로의 발소리만으로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는, 이 곰살맞은 한 쌍과의 첫 만남이다.
광주는 더러 와봤지만 양림동은 처음이에요. 느낌이 참 좋은 동네예요. 얌전하고 다소곳하면서도 귀여운 인상을 받았어요.
양지 제가 칭찬을 받는 것처럼 즐거워요. 양림동은 제가 참 좋아하는 동네예요. 서울이랑 거리가 있어서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그래도 이곳으로 초대하게 돼서 기뻐요.
여행하는 기분이라 좋았는걸요. 어느 인터뷰에서 양림동을 “나무가 많은 동네”라고 소개하시더라고요. 동네에 애정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지 뉴욕에서 7년 정도 지내다가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는데, 고즈넉한 곳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이젠 제 공간을 갖고 싶기도 했고요. 상업 시설이 발달하거나 유동 인구가 많은 곳보다는 조용한 데 자리 잡고 싶었어요. 양림동을 눈여겨보던 중에 여기가 서양 근대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선교사들이 자리 잡은 터였던 거죠. 100년 전 유산을 그대로 지닌 채 마구잡이로 개발되지 않은 점이 좋았어요. 자연과 가까운 동네라 더 마음이 갔고요.
이 건물도 참 예뻐요. ‘공간 양지바른’이라고 부르고 있죠. 건물보다는 하나의 존재… 같달까요.
양지 오래된 주택인데 구조도 특이하고, 제 뜻대로 여기저기 개조해서 더욱 마음에 드는 곳이 되었어요. 저는 ‘양지바른’이라는 이름으로 그림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데요. 이름처럼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싶어서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다니다 이 주택을 만났어요. 따듯한 느낌이 좋아서 여기가 제 공간이구나 싶었죠.
공간이 꽤 넓어요. 슬쩍 둘러봐도 되나요?
양지 그럼요. 공간 양지바른은 지하, 1층, 중간층, 2층으로 구성돼 있어요. 중간층이 있는 게 좀 독특하죠? 오래된 주택이라 이런 구조로 지어진 것 같아요. 중간층이 매력적이어서 여기를 택한 것도 있어요. 1층에는 제 아트워크와 태피스트리를 살펴볼 수 있는 쇼룸 겸 로비가 있고요, 구석엔 자그마한 숍 공간이 있어요. 제 아트워크를 엽서나 작은 굿즈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죠. 카페도 겸하고 있어서 마실 거리나 스콘, 케이크를 1층에서 구매하고 어디든 원하는 공간에서 즐길 수 있어요. 중간층은 제가 소중히 모아온 작가들의 오리지널 작품과 빈티지 포스터로 장식해 두었어요. 군데군데 제 드로잉 작업도 있고요. 지하는 아트북 위주예요. 뉴욕은 길거리에서 3-4달러면 빈티지 아트북을 구할 수 있는데 오가며 사 모은 게 꽤 많아져서 바리바리 들고 돌아왔거든요(웃음). 가끔 그릴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 지하에 있는 책을 아무거나 뽑아서 살펴보곤 해요. 제 취향으로만 가득 채웠기 때문에 책 한 권만 열어봐도 그리고 싶은 것들이 떠올라요. 지하는 제 영감 꾸러미나 다름없어요.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보니 ‘갤러리 카페’라고 분류돼 있더라고요. 갤러리인 것 같으면서도 쇼룸 같고, 또 어떤 면에선 카페인 것 같기도 해서 하나로 정의하기가 어렵네요.
양지 1차 목적은 양지바른 태피스트리와 아트워크를 보여주기 위한 갤러리이자 브랜드 쇼룸이었어요. 그다음 고려한 게 작업실이었죠. 사실 갤러리 카페는 사람들이 손쉽게 방문하도록 장벽을 낮추려고 만든 역할이에요. 브랜드 쇼룸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찾아오질 않거든요. 공간을 열기 전엔 작업하다가 손님이 오시면 나가서 커피도 내어 드리고 작업도 설명해 드리는 걸 상상했는데요. 그건 제 오만이었어요(웃음). 작업에 집중하려고 하면 사람이 들어오고, 손님을 맞다 보면 집중력이 사라지고, 연달아 손님이 들어오면 정신도 없더라고요. 뉴욕에 있을 때는 제 작업을 꺼내 보일 공간이 SNS뿐이었어요. 그래서 사람들 반응에 갈증이 있었는데, 간간이 아트페어에 나갈 때마다 활력을 얻게 되더라고요. 사람들 반응을 즉각적으로,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랑 소통하는 데서 긍정적인 기운을 받으면서 가만히 사람들 반응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페 역할에도 소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온종일 커피만 마셨는데 지금 마시는 커피가 제일 맛있어요(웃음).
양지 본격적인 카페라 말하기엔 조금 민망해요. 양지바른만의 시그니처 메뉴도 없고, 에스프레소 기계도 없거든요. 모든 커피를 다 핸드 드립으로 내려요.
지혜 드립 커피라 더 맛있는 거 아닐까요(웃음)? 무엇보다 여기 케이크가 정말 맛있어요. 꼭대기층에서 고모님이 일주일에 서너 번 베이킹을 하시는데요. 스콘과 케이크에 진심이세요.
마침 지혜 씨 소개를 들어보려 했는데 빵 소개로 말문이 열렸네요(웃음). 만나서 반가워요. 양지바른의 태피스트리를 디자인, 제작하고 계신다고요.
양지 지혜는 제 그림을 상품으로 실현해 주는 역할을 해요. 태피스트리로 시작했지만 점차 영역을 넓혀가 보려고 요즘은 계속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어요. “이거 어때?”, “이것도 해보고 싶다!” 그러면서요. 지혜는 3주 정도 호주에 있었는데 마침 오늘 새벽에 귀국하게 돼서 가까스로 합류할 수 있었어요.
지혜 돌아오자마자 잠만 자고 부랴부랴 광주로 왔어요(웃음). 아, 그런데 혹시 KTX 타고 오셨어요?
네, 아침 10시 기차요.
지혜 우리 같은 열차 타고 온 것 같아요(웃음). 서울역 대합실에서 어떤 남성분 옷차림이 예뻐서 눈여겨봤거든요. 검은 목폴라에 검은 셔츠를 입으셨는데 단정하고 잘 어울렸어요. 근데 그분이 포토그래퍼분이신 것 같아요(웃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지금 막 떠올랐어요. 저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일해온 김지혜라고 해요. 꾸준히 해오던 일인데 문득 빠른 속도와 그보다 앞서 달려야 하는 상업 의류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다들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같이 달려야만 했는데, 영문도 모른 채 뛰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숨 가쁘게 달리는 나날이 이어지던 때, 양지 작업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양지의 그림을 보면… 그리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고 마음이 따듯해져요. 팍팍한 일상 속에 이런 느낌이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지의 아트워크로 일상용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아트워크로 만들 수 있는 건 많지만 제가 섬유를 다루는 디자이너니까 이쪽 분야부터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 시작이 태피스트리였던 거군요. 두 분의 인연이 궁금해지는데요.
지혜 2014년에 뉴욕에서 만났으니까… 와, 올해 10년 됐네?
양지 정말이잖아! 둘 다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지인 소개로 만나게 됐어요. 아직 이 도시에 적응하기 전이고, 친구도 많지 않을 때라 금방 친해졌어요. 성격도 잘 맞았고요.
지혜 양지를 보자마자 “엄청 예쁘다!” 그랬어요(웃음). 첫 만남부터 지갑을 잃어버리질 않나… 그런 상태로 같이 뮤지엄에 갔는데 굉장히 정신없던 기억이 나요.
주고받는 눈빛이 꾸밈없어서 묻지 않고도 친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자기소개는 재미없으니까, 이참에 서로 소개해 보면 어때요?
양지 성격 검사나 심리 테스트를 하면 저희 결과는 항상 다른데요. 그 궁합은 매번 100퍼센트더라고요. 어떤 검사든 다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게 신기해요.
지혜 성격은 다르지만 취향은 같고, 서로 없는 걸 갖고 있어서 잘 맞는 것 같아요. 예컨대 양지는 머리로 생각하는 사고형인 반면, 저는 완전히 감정형이거든요. 그래서 양지가 너무 뇌로만 생각하면 제가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제가 너무 감정적으로 굴면 양지가 사고를 잡아주는 편이에요.
양지 제가 놓치는 것들은 지혜가 챙겨주고요. 저는 직진 스타일이라 뭐든 “진행하자!” 하는데요, 지혜는 제 이야기에 공감해 주면서도 “언니, 근데 이건 이렇게 바꿔보면 좋을 것 같아.” 하고 디테일하게 짚어줘요. 지혜 덕분에 큰 틀 안에서 작은 것들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죠. 저희는 취향이 놀랍도록 비슷해서 레퍼런스가 100개 있으면 그중 괜찮다고 고르는 게 똑같아요.
지혜 약간 아바타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양지 안 보이는 촉수로 연결된 느낌(웃음).
쿵짝이 엄청 잘 맞는데요(웃음). 지혜 씨는 아직 뉴욕에 살고 있는 건가요?
지혜 얼마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지내고 있어요. 제주에 작업실을 꾸렸거든요. ‘지혜 스튜디오’라 이름 붙이고, 아티스트와 협업하면서 프로젝트성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는 뉴욕에 있을 때 토리버치Tory Burch라는 브랜드에서 오래 일했는데요. 앞서 말했다시피 빠른 흐름에 조금씩 지쳐갔어요. 빠르게 달려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거든요. 느린 호흡으로 작업을 음미하고 싶어서 지금은 그림 그리는 아티스트, 퍼포밍 아티스트와 협업하면서 이유 있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어요. 섬유나 자수 등을 활용하여 의류와 관련된 것들을 작업하고, 그중에서도 쓰임 있는 물건 만들기에 집중하죠. 그런 의미에서 양지랑 하는 작업이 좋은 자양분이 돼요. 평면으로 만들어지는 양지의 아트워크를 보면서 양지의 손맛을 어떻게 물성에 표현할 수 있을지, 어떤 섬유로 표현하고 어떤 방식으로 내보내면 가장 잘 전달될지 고민하는 게 굉장히 즐거운 과정이자 모험이거든요.
두 분이 함께하는 태피스트리는 세계 곳곳 장인들의 아틀리에와 협업하며 소량으로 제작한다고 들었어요. 퀄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판매 금액을 생각하면 타협도 필요할 것 같아요.
양지 처음 작업할 땐 합리적인 가격대는 머릿속에 없었어요. ‘퀄리티로 승부를 보자!’뿐이었죠. 가장 좋은 퀄리티를 위해 샘플링 작업을 정말 많이 했어요. 가격을 고민하게 된 건 공간을 운영하면서부터였죠. 직접 구매자들과 만나게 되니까 가격 때문에 구매를 망설이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온라인으로 판매할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는 손님들 반응이 와닿더라고요. “조금 더 저렴한 것도 있나요?”라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았어요. 금액을 낮추기 위해 퀄리티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크기나 제작이 비교적 간편한 발매트로 장벽을 낮춰보면 어떨까 싶었지요.
지혜 저희는 무엇을 만들든 퀄리티를 최우선에 두어요. 생활에서 쓰이는 걸 만드는 거니까 불편함을 최소화해야 하거든요. 또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윤리적인 부분이에요. 쓰임이 좋으면서도 무해한 걸 만들자는 마음이죠. 최대한 자연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재활용 코튼을 사용하는 식으로 작업하고 있거든요.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제품이더라도 자부심을 느끼고 싶어서 윤리성을 특히 신경 쓰고 있어요. 판매할 때 부끄러움이 없기를, 우리가 구매자여도 선뜻 사고 싶은 물건이기를 바라며 만드는 거죠.
양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손실을 최소화하고 친환경적인 마음으로 만들면 금액대가 점점 높아지더라고요. 퀄리티를 지키면서 친환경적이고, 대중에겐 좀더 다가가기 위해 어떤 방법이 좋을까 고민하면서 지금은 한정 수량을 뽑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공장이나 아틀리에도 최대한 많이 조사하고 합리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곳을 택하기도 하고요.
지혜 큰 브랜드가 아니어서 대량 생산은 어려운데, 대부분 소량으로는 제작을 잘 안 해주거든요. 그래도 다행히 이번에 제주에 작업실을 만들면서 산업용 자수 기계라든지 섬유 관련한 기계들을 들여와서 앞으로는 직접 제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은 제품은 샘플링 작업도 해보고 조금 더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고요. 이전까지는 양지 그림이 상품화되는 걸 돕는 중개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재미있는 걸 많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분의 뿌리는 태피스트리일 텐데요. 태피스트리라고 하면 그려지는 이미지는 있지만,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어렵더라고요. 직접 소개해 주신다면요?
양지 처음엔 저도 어려워서 정의를 찾아봤는데 ‘일종의 직물 공예’라고 하더라고요. 색실이 겹겹이 가로세로로 짜여서 아트워크를 완성하는 형식인데요. 사실 프린트가 아니기 때문에 선명함은 조금 떨어지지만 섬유가 주는 고급스러움이 있어서 평면의 아트워크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줘요.
지혜 태피스트리만의 밀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생각하지 못한 텍스처가 나올 때 굉장히 즐겁거든요. 시중에 나와 있는 태피스트리 무늬는 보통 단색으로 플랫한 느낌이 많아요. 주로 도형미를 보여주는 식이죠. 근데 저는 양지의 그림 중에서도 자유로운 선의 느낌을 좋아하거든요. 거기서 언니의 성격이 묻어 나온다고 생각하고, 그건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거예요. 양지의 자유로운 선이 과연 태피스트리로 표현될까 긴가민가하면서 ‘라벤더 허그’라는 작품을 시험 삼아 만들어 봤는데요. 상상하지 못한 밀도와 질감이 나오는 거예요. 색실의 섞임이 굉장히 오묘했어요. 샘플을 뽑자마자 둘이 동시에 그랬어요. “이거 진짜 특별하다! 하자.” 이미 시장이 형성돼 있는 태피스트리 안에서 어떤 차별성을 둘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양지의 자유로운 선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거죠.
그럼 첫 작업이 ‘라벤더 허그’였나요?
양지 아뇨, 첫 작업은 ‘골든 선셋’이었어요. 사실 ‘골든 선셋’은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작정하고 그린 그림이었어요. 근데 만들고 보니까 이건 우리 방식이라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지혜 태피스트리를 만들고 싶어서 양지와 함께한 게 아니라, 양지 그림을 쓰임 있는 물성으로 만들고 싶어서 태피스트리를 택한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태피스트리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건 선후가 바뀐 것 같았어요. 그래서 태피스트리는 염두에 두지 말고 일단 그림 작업을 하라고 했어요. ‘골든 선셋’ 이후로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그린 그림은 없어요.
양지 지혜가 자유롭게 그리라고 말해준 덕분에 조금씩 더 특별한 태피스트리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벽에 장식된 태피스트리를 가리키며) 이게 방금 이야기한 ‘라벤더 허그’ 태피스트리인데요. 색실이 얽혀 있는 형태가 두드러지죠. 호응도 좋았어요. 좀더 나다운 그림을 그려도 되겠다,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작업이었어요.
국내에서 생산 라인을 찾기도 쉽지 않을 듯한데, 세계의 아틀리에를 물색하는 건 훨씬 광범위한 일 같아요.
지혜 그동안 뉴욕에서 일하면서 해외로 출장을 많이 다녔어요. 나라마다 특출하게 잘하는 분야가 있어서 제작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죠. 그때 특이한 소재나 퀄리티가 뛰어난 것들을 만나면 항상 양지한테 연락했어요. 여기 이런 게 있다고, 한번 해보자고. 대표적인 게 인도였죠. 인도는 면제품도 굉장히 뛰어나고, 러그가 유명하거든요. 마침 그때 양지도 러그에 관심을 가질 때라 양지의 아트워크를 양모로 제작해 보기로 했어요.
양지 전 세계에서 처음 울마크를 획득한 아틀리에와 협업한 작업이었죠. 딱 다섯 개 만들었는데, 지금 두 개 남아 있어요. 남는 거 없이 금액을 책정해도 재료가 고가다 보니까 수십만 원에 판매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금액이 너무 사악해서 숍에는 올리지도 않았어요(웃음). 그래서 제품이 아니라 작품이 되었죠.
지혜 판매되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면으로 도전해 보는 게 큰 공부가 돼요. 일단 시도해 보면 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기 때문에 진가를 알기에도 좋거든요. 양지바른 제작은 현재는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있어요. 태피스트리만 전문으로 하는 오래된 아틀리에와 협업 중인데, 연달아 시행착오를 겪다가 이제야 호흡이 맞춰졌죠.
어떤 문제들이 있었어요?
양지 아무래도 외국에서 제작을 요청하는 거다 보니 소통도 쉽지 않고, 시차도 있어서 소통이 더뎠어요. 제작할 때마다 배송비가 달라지는 것도 답답했어요. 같은 수량, 같은 무게의 물건을 받아도 매번 배송비가 다르더라고요.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제안하고,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소통을 이어갔고, 결국 이렇게 맞춰져서 꾸준히 협업해 오고 있네요.
쓰임이 있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쓰임이 좋다고 해서 모두 손이 가는 건 아닐 거예요. 두 분이 특히 좋아하는 물건은 어떤 거예요? ‘쓰임이 좋고, ○○한 것.’의 ○○을 채워본다면요?
양지 쓰임 있는 물건이 귀엽기까지 하면 최고죠. 저희가 항상 말하는 건 “귀여운 건 통한다, 귀여운 건 최고다!”예요. 귀엽기 위해서는 색감을 빼놓을 순 없어요. 둘 다 색을 참 좋아해서 색에서 영감을 받으면서 작업해 나가고 있거든요.
지혜 양지가 색을 어떻게 쓸까를 고민한다면, 저는 양지의 색을 어떻게 물성에서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해요.
색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 영감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요?
양지 음… 저를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요. 근데 마음이 윤택해지는지, 뇌가 윤택해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요. 영감이 없으면 삭막할 것 같아요. 원동력이라는 단어하고도 맞닿아 있는 것 같고요.
어느 인터뷰에서 “자연물에서 영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셨지요.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음악과 향기도 언급해 주셨어요.
양지 저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데, 뉴욕에 있을 때 최불암 아저씨가 나오는 <한국인의 밥상>을 챙겨 보곤 했어요. 보통 사람들이 연출 없이 자연스럽게 지내며 밥 지어먹는 모습이 좋아 보였거든요.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눈에 띄던 순간이 있었는데요, 주로 자연물이더라고요. ‘저 식물 형태가 재미있는데?’ 싶은 마음에 일시정지를 누르고 캡처하고, 마당에 있는 강아지의 자세가 우스워서 캡처하고. 생각 없이 보면 그냥 지나칠 장면이 제 눈에 쏙 들어오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아, 최근에는 설거지하다가 철수세미에서도 영감을 받았어요. 오래돼서 모양이 잔뜩 헝클어진 게 귀여워 보이더라고요.
양지 씨의 영감은 <한국인의 밥상>과 철수세미(웃음). 지혜 씨는 어때요?
지혜 저는 영감 안에서 자유로워져요. 영감은 하나의 상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무언가에서 영감을 얻으면 상상으로 물꼬를 트고, 저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무엇이든 해요. 영감은 디자인이 되기도 하고, 물건이 되기도 하고, 드로잉이 되기도 하죠. 그래서 더 찾아다니게 되는 것 같고요. 일상에서는 아무리 자유롭게 지내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밥도 먹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잠도 자야 하고, 시간에 쫓기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영감을 만나면 해방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저도 양지처럼 자연을 좋아해서 주로 그런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요. 복슬복슬하고, 따듯하고, 보고 있으면 편안해지고, 유쾌해지는 것들.
양지 라마, 알파카….
양지 씨의 영감은 <한국인의 밥상>과 철수세미와 라마, 알파카(웃음)…?
양지 어, 이거 뭔가 이상해지는데요(웃음). 둘 다 라마랑 알파카 같은 털이 북슬북슬한 것들을 좋아해요. 그래서인지 양지바른 태피스트리도 그런 느낌이고요.
지혜 저희 태피스트리는 원사를 순면으로 써서 안고 자면 폭 안겨 있는 느낌이에요. 땀이 날 정도로 따듯한데, 그게 불편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에서 온다는 게 좋아요. 저희는 천연 섬유로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는데요. 원사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 따듯함, 무게감이 특유의 포근함을 만들어 내요. 그래서 양지바른 태피스트리는 벽에 걸어도 아름답지만 직접 사용할 때 특히 기분이 좋아져요. 저는 캠핑 갈 때 항상 들고 다니는데 덮고 있기에도 좋고, 침낭 안에 깔기에도 좋고, 두르고 있기에도 좋아요. 쓰임이 참 좋은데 쓰일수록 점점 더 내 것이 되는 게 천연 섬유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빨수록 부드러워지고, 공기층이 두꺼워지면서 점점 내 것처럼 되거든요.
지혜 씨가 방금 “영감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일부러 영감을 찾아 나서기도 하나요?
지혜 그럼요. 여행을 다니는 게 특히 그래요. 저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하기도 했고, 남편이 외국인이어서 여러 나라를 많이 다니게 되는데요. 늘 생활하던 데서 벗어났을 때 영감이 오기도 하니까 일부러 찾기도 해요. 특히 나라마다 다른 식물의 형태를 보는 게 좋더라고요. 이번 호주 여행에서도, 계절이 반대여서 더 그렇겠지만 식물이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생경한 형태에서 오는 영감이 크더라고요.
제주에 작업 공간을 마련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어요.
지혜 맞아요, 자연은 맨날 봐도 안 질려요. 맨날 바뀌고.
양지 자연은 최고의 영감이에요. <한국인의 밥상>에서 좀 신기한 꽃만 보여도 캡처해서 따라 그리곤 했는데(웃음). 이게 그 그림이에요. (휴대폰에서 그림을 찾아 보여준다.) 제목은 ‘나비 공주의 산책 시간.’
꽃술에 뭔가 능청스러운 얼굴이 있네요(웃음). 귀여우면서도 유쾌해요.
지혜 양지는 뭐든 자기가 본 대로 그리는데 그게 너무 귀엽고 웃겨요. 저 언니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저게 저렇게 보이지 싶을 때도 많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양지 그림엔 유쾌함이 있어요. 뭐라고 딱 정의할 수 없는 엉뚱함.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림도 많지만 아기자기한 드로잉을 보면 그 안에 있는 요소가 전부 행복해 보여요. 양지가 그리는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들어요. 행복한 상상.
1층 벽에 붙어 있는 그림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평화로운 동산처럼 보이는데, 밭과 물에 행성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더라고요. 사람들은 발가벗고 행성을 줍거나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고요. 절로 행복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양지 아, 1층에 걸어둔 ‘Paradise’ 이야기군요. 태피스트리로도 제작한 그림인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과 푸른 자연이 함께하는 곳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낙원을 상상하면서 그린 그림이죠. 태피스트리로 만들 때 샘플링 작업을 여러 번 해서 색감이 만족스럽게 나왔어요.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이 가는 작업이에요.
보이는 그대로 마음에 와닿는 투명한 느낌이 좋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양지 씨도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양지 언제부터 쉬운 그림을 선호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제가 쉬운 걸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이해하기 쉬운 작업이 무조건 좋다는 얘긴 아니고요. 그보다 작가와 작품이 닮았을 때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저쪽 벽에 이배 작가님 작품이 걸려 있는데, 쉬운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배 작가님과 작품이 닮았어요. 그래서 좋은 작품이라고 여기게 되죠.
양지 씨의 ‘쉬운 그림’은 어떨 때 나와요?
양지 저한테 솔직해졌을 때요. 저한테 솔직하다는 것은 제가 원하는 감정으로, 원하는 마음가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 비슷해요. 어떤 예술가는 슬플 때, 화날 때, 고난에 처했을 때 작품이 잘 나온다고 하는데요. 저는 마음이 평온한 상태일 때 작업이 잘되는 사람이에요. 제가 평온한 그림을 원하기 때문에 마음도 그래야만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 같아요. 장욱진 선생님이 어딘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걸 보았어요. 장욱진 선생님 그림에는 사람들의 일상이 있잖아요. 암탉, 초가집, 가족…. 소박하고 따듯한 느낌이지요. 아마 선생님이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양지 씨 작업은 밝은 색감이 많아서일까요, 긍정적인 느낌을 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작업할 때의 마음가짐도 건강해야 할 것 같아요. 스트레스받거나 지칠 땐 어떻게 해소해요?
양지 ‘명상을 하고, 마음을 단련하고, 차를 마신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웃음). 속으로 되새기며 달래기보다는 내뱉고 말하면서 표현하는 편이에요. 짜증 나면 신경질 내고, 분노하면 화내는 거죠. 물론 선을 넘으면 안 되겠지만 표현하고 사는 게 건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표현한다고 해서 제가 아무 때나 화를 내진 않을 거잖아요. 화가 났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때때로 표현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리일 때도 있는데요. 그럴 땐 그 공간에서 나와요.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나쁜 감정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밖으로 나와서 크게 심호흡하고 다시 돌아가면 많은 감정이 해소돼 있어요.
지혜 미국에서는 묵직하고 찝찝한 감정이 남아 있을 때 “Elephant In The Room(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저도, 양지도 코끼리가 있는 상태를 못 견뎌서 빨리 해결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지나간 일에는 후회나 미련을 두지 않아서 금세 벗어날 수 있고요.
양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도 비슷해요. 혹시라도 불만이 있다면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좋아해요. 저한테도 직설적으로 말해 주는 게 좋고요. 조금이라도 꼬아서 얘기하면 전 아마 못 알아들을 거예요.
지혜 그런 영역에서 양지는 투명해요. 양지 역시 뭔가를 감추거나 속뜻을 숨기지 않으니까요.
그런 점도 그림과 닮았네요.
지혜 이름이랑도요.
양지 와, 이건 엄청난 칭찬이에요. 저는 제 이름을 좋아해요. 그런데 제 이름을 처음 듣는 분들은 양진이, 양지희 등등 다르게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 “양지바른, 할 때 양지예요.” 하면 100퍼센트 알아듣더라고요. 그래서 양지바른이라는 말을 좋아하게 됐어요. 브랜드 이름으로 정하기 전에 어떤 검색 결과가 있는지 살펴보려고 포털사이트에서 찾아봤는데요. 제일 먼저 ‘수목장’이라는 단어가 보였어요. 처음엔 흠칫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예쁘더라고요. 양지바른 곳에 나무를 심어 애도하는 거잖아요. 양지바르다는 말에는 역설적이지만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간 양지바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공간을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서 고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양지 외관은 마음에 들어서 거의 안 바꾸었지만 안쪽은 전부 다 바꾸고 고쳤어요. 인테리어 공사나 리모델링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공사였죠.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할 거예요. 손님이 드나들게 될 공간이니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곳은 채워서 막았고, 개방감을 주고 싶은 공간은 트고, 자재도 직접 고르고 날랐어요. 천장 마감재와 원목 계단만 빼고 모든 걸 바꾸었죠. 아침마다 나와서 공사하는 걸 확인했어요. 하루만 안 나와도 제가 부탁한 것과 다르게 진행돼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공간이 양지 씨를 닮았군요. 방문하는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요?
양지 커피만 마시고 가시는 분들도 있고, 그림만 보고 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우연히 오셨다가 자그마한 굿즈를 구입하고 가시는 분도 계시고, 태피스트리를 직접 보고 싶어서 찾아와 주시는 분도 있어요. 한번은 굉장히 록스타 같은 분위기의, 온몸에 타투를 하신 덴마크 분께서 태피스트리를 추천해 달라던 적이 있어요.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외모뿐이라 너무 아기자기하거나 귀여운 느낌인 것들을 제외하고 추천해 드렸는데, 그중에서 가장 귀엽고 오밀조밀한 걸 고르시더라고요. 그런 아이러니한 매칭도 기억에 남아요(웃음). 한 번 방문해서 태피스트리를 사 가시고는 다음에 다시 오셔서 두 번이나 더 구입해 가신 모녀도 있었고,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와 주신 부부도 있었어요. 오가신 분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네요.
광주, 서울은 물론이고 덴마크에도 양지바른의 태피스트리가 놓여 있겠군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는 것처럼 어떤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달라질 것 같아요.
지혜 그럼요, 태피스트리는 쓰임이 워낙 다양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요. 내부에 있느냐, 야외에 있느냐, 어떤 집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느낌이 달라지죠. 태피스트리를 구입하시면 ‘이렇게 사용하세요.’ 하고 가이드를 드리는데요. 구매하신 분이 직접 쓸모를 찾아낼 때 가장 매력적인 모습이 되되더라고요. 저희가 기대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포스팅해 주시는 사진을 보면서 ‘우와,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구나!’ 싶을 때도 많아요.
양지 (옆 벽을 가리키며) 여기 걸린 게 ‘선데이 브런치’인데요. 의도한 건 아닌데 브런치 카페에서 많이 주문해 주시더라고요. 직접 방문해 보진 못했지만 간간이 올라오는 사진들 보면 신기하기도, 기쁘기도 해요.
지혜 태피스트리로 나만의 사용법을 찾는 걸 볼 때가 가장 좋아요. 예술품, 특히 그림은 속된 말로 ‘모셔둔다’고들 하잖아요. 양지의 아트워크는 그런 역할보다는 같이 살아가는 쪽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태피스트리라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늙어가는 오브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전히 좋은 아트워크가 사용자와 함께 나이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오래오래 곁에서 함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계속 만들어 나가고 싶거든요.
작품의 고유성을 위해 예술이 상품화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두 분은 예술이 단독 주체가 되기보다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양지 예술은 일종의 환기예요. 환기는 저한테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죠. 작업실의 필수 요소 중 하나를 꼽으라면 꼭 창문을 이야기하는데, 환기와 채광을 위해서거든요. 햇빛과 바람은 작업할 때도, 살아가는 데도 중요해요. 작업하다 답답할 때 창문만 열어도 마음과 기분이 시원해지는 것처럼 제 작업도 누군가의 일상에서 환기 역할을 해주면 좋겠어요. 그 역할을 태피스트리가 해주길 바라며 만들고 있고요.
지혜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가도 한 번 웃음이 지어지는 순간, 기분이 확 밝아지는 순간을 만들고 싶어요. 양지가 <한국인의 밥상>을 보다 멈춰서 캡처하는 것처럼요(웃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여유보단 빡빡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 사이에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순간을 건네는 것도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에너지와 감정을 줄 수 있는 게 미학이 아닐까요? 저희는 그중에서도 밝은 감정에 포커스를 두고 이어나가는 거고요.
이번 호 주제어가 ‘작업 공간’이에요. 두 분은 작업 공간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양지 내가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요.
그럼 어디든 될 수 있어요?
양지 펜이랑 종이만 있다면요. 물론 색 작업을 하고 싶을 때는 좀 다르겠지만, 드로잉에 한정한다면 펜과 종이만 있으면 어디든 작업 공간이 될 수 있어요.
지혜 그래서 아이패드 프로 처음 나왔을 때 언니한테 바로 추천해 줬어요(웃음). 아이패드 한 대만 있으면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더 실감 나게 작업할 수가 있으니까요.
양지 나 그거 복권 당첨돼서 샀잖아(웃음).
복권이요?
양지 미국에 있을 때 마트에서 산 복권에 당첨돼서 600달러를 받았는데, 그걸로 태블릿부터 샀죠. 아이패드가 생긴 이후로 디지털 작업도 조금씩 해보게 됐어요. 답변을 조금 바꿔야겠네요, 어디든 아이패드만 있으면 작업실이 된다(웃음).
지혜 둘 다 일상과 작업의 경계를 두는 성격은 아니에요.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작업 모드가 되고, 작업실에서 나서면 작업 생각을 딱 끊는 생활을 하진 않아요. 작업과 일상을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언제나 애매하게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고 있죠.
양지 특히 영감이 오는 순간은 매번 달라서 모든 순간을 작업처럼 여기게 돼요. 영감은 언제, 어디서든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쌓여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계에서 지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가 다른데, 협업할 때는 어떻게 만나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어요?
양지 지구촌 시대잖아요, 메시지와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았어요. 작업은 항상 그런 식으로 해왔어요. 오히려 만나면 수다 떨고 맛있는 거 먹느라 바빠서 정작 작업 이야기는 안 해요(웃음).
지혜 컬러 샘플 같은 건 각자 갖고 있기 때문에 온라인으로도 작업이 수월했어요. 같이 샘플을 보면서 “나 12번 색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하고 묻는 식이죠.
양지 그럼 “12번보다 14번이 나을 것 같아.” 하고 의견을 주고요. 같은 주황색이어도 톤이나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디테일한 접근이 필요해요. 태피스트리는 실의 특성상 한 톤 다운된 색으로 나오게 되어서 아트워크랑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고민해야 하거든요.
지혜 또한 아트워크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일상에서 쓰이는 거라서 너무 튀지 않는 게 중요하죠. 기분 전환이 될 색감도 고려해야 하고요. 다행히 둘이 색 보는 눈이 비슷해서 의견이 충돌할 일은 거의 없어요. 제가 양지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언니가 원하지 않는 색상을 고를 일도 없고, 언니도 제가 원하지 않는 디자인을 요구할 일이 없어요. 우리 역할은 정확해요. 양지가 아트워크에 집중한다면 저는 양지가 못 보는 부분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살릴까 고민해요. 언니가 좋다고 하는 부분에 좀더 힘을 주는 것도 고민하고요. 잘하는 부분을 더 잘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태피스트리는 커다란 섬유여서 더욱 따듯한 느낌이 들어요. 크기에서 오는 압도감도 있지만, 그게 부담스럽지 않아요. 어느 인터뷰에서 “큰 그림을 꾸준히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하신 걸 봤어요. 큰 그림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어요?
양지 그리다 보면 자꾸 종이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한 건데, 캔버스에 하다 보니까 진짜 큰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어요. 제약이 없다면 제 몸만한 붓을 가지고도 해보고 싶어요. 아마 주변이 엉망이 될 테니까 물리적으로 쉽진 않겠지만, 조건과 깜냥이 되면 아주 커다란 벽 하나를 전부 다 칠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지혜 신나서 할 거 같은데? 이번에 전시할 때도 캔버스 바깥으로 그림 그렸잖아.
양지 아, 맞아요. 전시장에 그림을 걸었는데 선이 더 뻗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캔버스 바깥으로, 벽까지 그림을 그렸어요. 엄청 신나더라고요. 갤러리가 제 것이 아니다 보니 조심스럽게 해야 했는데, 소심하게 했는데도 기분이 좋았어요.
반면 저희가 있는 중간층에는 자그마한 드로잉도 눈에 띄어요. 작가 소장품 외에 자그마한 그림들은 양지 씨 그림같은데요?
양지 맞아요. 제 컬러풀한 그림들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죠? 어릴 때 자주 사용하던 채점용 색연필 기억나세요? 실로 돌돌돌 깎아 쓰는 색연필이요. 그거 검은색으로 드로잉하는 걸 좋아해요. 부드럽게 확확 그려지기보단 덜컥거리면서 그려져서 제 속도감과 잘 맞거든요. 저희 카페는 차가운 드립 커피를 아침에 미리 내려서 소분해서 병에 담아 판매하기도 하는데요. 유리병에 스티커를 하나씩 붙이고 있는데, 그 스티커도 드로잉으로 만들었어요.
색이 다양한 작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잔잔하고 간결한 작업도 눈에 띄어요. 그러고 보니 문패도 나무에 음각으로 새긴 로고죠.
양지 저도 제가 컬러를 좋아하고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결같지만은 않더라고요. 무조건 밝고 다채로운 색상이 좋다가도 어느 날엔 ‘다 싫어, 어지러워, 검은색 쓸래.’ 하는 날이 오기도 하거든요. 저도 저를 종잡을 수가 없어요(웃음). 문패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제작했어요. 문패만 보고는 어떤 공간인지 알 수 없게끔, 궁금해서 들어오게끔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랬더니 들어가도 되는 공간인지를 몰라서 오히려 아무도 안 오시더라고요(웃음). 입간판도 없을 땐 온종일 혼자 자리를 지킨 적도 있어요. 지금은 입간판도 생기고, 방문해 주신 분들이 하나둘 사진이나 후기 같은 걸 올려주시니까 자연스럽게 손님이 찾아와요. 누구라도 들러주시면 공간에 활기가 돌아서 좋더라고요. 제 작업 공간이 계속 이런 느낌으로 남아주면 좋겠어요.
이제 지혜 씨도 한국으로 돌아왔겠다, 제주에 제작이 가능한 작업 공간도 생겼겠다, 조금 더 다양한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 같아요.
지혜 항상 얘기하는 아이템 중 하나가 가방이에요. 진행 중에 한 번 어그러지기도 했던 아이템인데요. 양지 아트워크로 된 가방을 메고 다니고 싶은데, 좋아하는 재료로 가방을 만들려다 보니 금액대가 너무 높아지더라고요. 이왕이면 탄탄해서 쓰임이 좋은 가방을 만들고 싶거든요. 높은 금액대 때문에 샘플링 작업도 쉽게 할 수 없었는데, 이젠 제 작업실에서 소량이나마 만들어 볼 수 있을 테니까 직접 시도해 보려고 해요. 아트워크로 만드는 가방이 다소 뻔한 아이템일 수도 있지만 뻔하게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무엇보다 쓰임에 집중해서 만들려고 준비 중이고요. 아, 그리고 태피스트리를 만들고 남는 자투리 원단으로도 뭔가를 시도해 보려고 해요. 태피스트리는 직조 기술이 워낙 특출해서 내구성이 좋아요. 윤리적인 디자인을 이어가면서 좀더 자연에 친화적인 디자인을 지속해 보려고요. 지금 생각하는 건 튼튼한 직물이니까 가구를 싸는 덮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지금껏 패션 디자이너로 일해 왔지만 저는 섬유를 포함한 광활한 영역에서 여러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한국에서 이어나갈 작업이 궁금해지네요.
지혜 저도 기대가 돼요. 한국에는 아직 다 펼쳐지지 않은 좋은 자원이 많아요. 외국에는 이미 굉장한 장인이 많다면, 한국은 그에 비해 발전 여지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동대문 종합시장 같은 건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재료가 다 모여 있는 시장을 이렇게 간편히 오갈 수 있다니! 무엇보다 말이 잘 통하는 게 가장 좋아요. 공장 사장님들도 이야기 나누다 보면 우리가 하고 싶은 걸 실현해 주기 위해 함께 고민해 주시는데, 그때 티키타카가 잘되는 것도 좋고요. 발품 팔아 문을 두드리면 좋은 인프라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와, 오늘 오랜만에 한국어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웃음). 이제 슬슬 배고파지는데, 혹시 광주에 오래 있다 가세요?
아니요, 기차 시간이 밭아서 대화 마치면 부랴부랴 이동해야 할 것 같아요.
지혜 아쉽다, 광주에 맛있는 게 진짜 많거든요.
양지 그럼 아쉬운 대로 양림동 산책 어떠세요? 선교사 사택 부근이 정말 예쁘거든요. 종종 저희 태피스트리를 들고 촬영하러 나가기도 하는 곳인데 보여드리고 싶어요. 날씨 추우니까 이거 챙기시고요(핫팩을 건넨다). 태피스트리도 몇 개 들고 나갈까요? 쌀쌀할 때 덮으면 엄청 포근하거든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