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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바그다드 카페’에 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사막 한가운데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머물 곳을 찾아 헤매던 야스민은 도로 옆 허름한 바그다드 카페를 발견한다. 시간이 흘러 바그다드 카페는 훗날 그녀에게 삶의 안식처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공간이 되어준다. “당신에게는 영화 속 바그다드 카페 같은 공간이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고민 끝에 적어도 한 공간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당신이 퇴근 후 자주 찾는 동네의 작은 서점이 될 수도, 혹은 당신과 취향이 맞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 아니면 이제는 제법 희미해진 어릴 적 기억 속에 존재하는 놀이터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 시절 라오스 방비엥Vang Vieng의 게스트하우스라고 대답할 것이다. 몇 번의 시험 실패 후, 나는 무작정 태국 방콕으로 떠났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역시 도돌이표처럼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 나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내 마음속 방황이, 좌절이, 뜨거운 눈물이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았다. 무언가 결단이 필요했다. 방콕에서 여행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나라들을 살피던 중, 여행사의 낡은 안내판에 써진 라오스의 방비엥이 눈에 띄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어디든 괜찮았다. 난 고민하지 않고 라오스 방비엥 버스 티켓을 끊었다.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길 위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머물 곳을 찾던 내 모습은 흡사 영화 속 야스민과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작을 간절히 바라던 그녀의 마음까지도.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호탕한 웃음을 지으시며 식당으로 안내해주셨다. “한번 들어오면 빠져 나갈 수 없는 마력의 공간이야, 여긴” 왠지 나른하고 따뜻한 공기. 내일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지금 괜찮으면 괜찮은 거라고 왠지 그때 그곳의 공기는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2층으로 배정받은 방 테라스에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니 방비엥의 아름다운 자연이 한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산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능선과 야자수 뒤로 펼쳐진 붉은 노을은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마치게 해주었다는 고마움을 그리고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을 함께할 누군가가 곁에 없다는 쓸쓸함과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다음 날 아침, 방비엥의 하늘은 잔뜩 구름이 껴 있었고 곧 세찬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1층 식당에서 한 친구가 사장님께 몽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방법을 묻고 있었다. 몽족은 과거 베트남전에서 미국을 도왔다는 이유로 현재 라오스, 베트남, 태국 등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지내거나 난민이 되어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염소’라는 별명을 얻은 그 친구는 우리들에게 여정에 함께할지 의사를 물었다. 국내 NGO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한 명과, 목에 나비 문신이 돋보이는 여성 한 분, 그리고 때마침 아이들에게 나눠줄 학용품을 가지고 있던 나까지 얼떨결에 4명이 여정을 함께하기로 했다. “일반 자전거로는 웬만해선 가기 힘든 곳이야. 족히 왕복 8시간은 걸릴 텐데”, “가다가 너무 힘들면 다시 돌아오면 되죠.” 산악 자전거가 아닌 일반 자전거로 흙길을 따라 산 중턱을 올라간다는 것은 역시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모두 방비엥의 커다란 산을 곁에 두고 말없이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그렇게 그 길 위에서 우리를 따라 달려와주는 아이들을 만났고, 함박웃음 지으며 음식을 권하는 선량한 라오스 사람들을 만났다. 작은 것에도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하는 사람들. 그렇게 길 위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라오스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 나와 우리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반짝반짝 바다에 비친 햇살처럼 예쁜 아이들. 부끄러워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우리는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이는 안도의 미소를 살짝 짓는다. 국적도, 언어도, 나이도 무력해지는 신기루 같던 시간들. 아이들과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아쉽지만 해가 저물기 전 다시 자전거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들은 각자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차마 하지 못하던 짙고 깊은 대화였다. 여행자들은 길 위에서 만나고 다시 길 위에서 헤어지기 마련이다.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으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게스트 하우스를 떠날 준비를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당신들도 곧 괜찮아질 겁니다. 여기는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는 마법 같은 공간이니까요.’ 버스 타는 곳까지 배낭을 들어주시고 손 흔들어주시던 사장님과 여행 친구들. 왠지 헤어질 때 라오스 몽족 아이들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코끝이 시려온다.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서 여행 중일 그 시절 그 공간 속 그대들에게 이 말을 전합니다. 지구를 돌고 돌아 다시 길 위에서 그대들을 만나기를. “캅차이(고마워)!, 쏙디(행운을 빌어)!”
라오스 방비엥 패밀리 게스트하우스
Laos Vang Vieng Family Guesthouse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였지만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글 사진 나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