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브지가 된다

에디터 K의 아무렇게나 살아보는 여행

 

기록은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오늘 내가 마음으로 헤아리고 싶은 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가장 연민하는 사람이다. 세상이 아버지라 호명하는 존재. 이 글이 세상 모든 아빠, 아버지, 아브지에 대한 기록이 될 수 있을까?

나는 홍길동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아빠라 부르기엔 너무 친해 보이고 아버지라 부르기엔 느끼한 기분이 들어서다. 어쩔 수 없이 호명해야 할 때는 발음을 뭉개서 ‘아브지’ 정도로 빠르게 말한다. 

아버지는 시골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나이 어린 동생들을 업어 키웠다. 대부분의 K 가장이 그렇듯 보수적이고 책임감 많은 어른으로 자랐다. 국민학교 시절 아버지는 밤톨 머리에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어린이였다. 감수성이 풍부해 매일 밤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브라운관 속 신성일을 보며 연기자를 꿈꾸기도 했는데, 조부모는 아버지가 ‘딴따라’가 되기보단 흙을 만지며 정직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야말로 진짜 흙수저였던 아버지는 반발심 때문에 일찍 독립했다. 젊은 시절 서울로 올라와 엄마를 만났고, 스물다섯의 나이로 김건태를 낳았다. 타고난 끼를 주체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젊은 시기에 가장이 된 게 아쉬워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 그는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함께 쌓은 추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사진작가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출장을 핑계로 며칠씩 집을 비웠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건 아버지의 빈 구두뿐이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에야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출장이 잦은 사진작가 일 대신 월급쟁이 회사원이 되었고,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그러면서 주말도 없이 일만 했다. 아버지에게 자식을 돌보는 일이란 도시락을 싸주는 일이었다. 하루도 아침을 거르게 하지 않았다. 반찬이라곤 간장에 절인 깻잎과 흐물흐물한 어묵볶음이 전부였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한솥도시락을 사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사춘기였던 나는 그 흔한 캐치볼 한 번 함께해 준 적 없던 아버지가 영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엄마가 집을 나가게 한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수없이 되뇌곤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왜 자식을 두 명이나 낳아서 평생을 개미처럼 일만 하며 살까? 어쩌면 가정은 그에게 개미지옥이 아니었을까?’ 그의 꽃 같은 젊음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 증오와 연민,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존재가 됐다.

한편 나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직장을 구했다. 셋방을 얻어 솔로 라이프를 즐겼다. 잡지사 에디터라는 직업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뭔진 모르겠지만 멋있어.”라고 반응했다. 방점이 ‘멋있다’에 있는 게 아니라 ‘뭔진 모르겠지만’에 있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세련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는 달리 회사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작은 회사에도 정치라는 게 존재했고, 나는 그런 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정직하게 살아라.”라는 말을 반복했고, 그에게 잔뜩 세뇌된 나는 시끄럽게 일하는 건 거짓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묵묵히 일하면 언젠가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조금 더 많이 말하는 사람, 조금 더 드러내는 사람, 조금 더 앓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대우받았다.

어느 날 엄마의 생일에 엄마와 동생이랑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낄 수 없는 자리였다. 우리는 회와 청하와 처음처럼을 먹었다. 엄마는 자기 인생에서 제일 좋은 날이라며 들썩였다.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엄청 좋아하며 뽀뽀를 계속했다. 겨우 이런 게 제일 좋은 걸까? 우리의 행복이 너무 누추해서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데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가슴이 헐거워졌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동생과 나를 독립시킨 아버지는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에서 딸기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린 시절 도망치듯 떠났던 흙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전화를 받았다. “아브지, 시골 사람이 왜 아직 안 자요?” 아버지는 방금까지 비닐하우스 속 딸기를 돌보느라 이제야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반찬은 어묵볶음과 깻잎.

아버지다운 식사였다. 왜 전화했느냐는 말에 나는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묵묵히 일하면 인정받을 거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잘 안 풀린다고 했다. 정직하지 않은 편이 더 나은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줄 알고 톡톡, 모스부호를 보내자 그제야 말을 이었다. “아들아.”

문득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며, 정직하게, 성실하게만 사는 게 정답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남들처럼 눈치도 보고 약게 살라고 조언했다. “아버지가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창문을 열었는데, 눈물과 콧물이 화생방처럼 터졌다. 기사 아저씨가 건네준 휴지로 코를 푸는데 머릿속으로 김연우의 ‘이별택시’가 흘러나왔다.

나는 진심으로 아버지가 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라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변하는 건 없겠지만 그의 말을 들으며 조금만 더 견뎌보고 싶었던 것 같다. 또 한편으론 살아가며 당신이 평생 옳다고 생각했던 신념이 무너진 것이, 그 사실을 아들에게 고백해야 하는 아버지의 처지가 슬펐다. 나는 어눌한 목소리로 기사 아저씨에게 말했다. “(꺼이꺼이) 아저씨··· (훌쩍) 혹시··· 담배 피워도··· 되나요?”, “안 됩니다.”, “아, 네.” 과연 세상은 냉정하다.

며칠 뒤 집에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택배 기사입니다. 김종원 씨 댁 맞나요?” 김종원은 우리 아버지고 이곳에는 살지 않지만 “네, 제가 김종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김종원을 말하고 나자 진짜 김종원이 된 기분이었다. 오글거렸다. 뭐랄까, 진동 안마기가 꼬리뼈에 닿을 때 느껴지는 찌릿함 같은 거. 송장에 김종원 이름으로 사인을 하고 택배를 받았다. 하얀 스티로폼 박스에 아버지가 보낸 딸기가 들어 있었다. 알이 굵고 단단한 딸기, 아버지를 닮은. 나는 현관에 선 채로 아버지의 딸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새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달달한 품종을 재배하라니까 왜 굳이 새콤한 걸 선택해서 감동을 깨는지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잠든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숨이 멈춘 듯 고요했다. 나는 아버지가 죽은 것은 아닌가 하고 코밑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아버지라는 존재와 어울리지 않는 희미하고 작은 숨이었다. 한참을 보다가 가만히 그의 눈꺼풀을 만져봤다. 볼록한 감촉이 마치 내 것인 것 같아 서둘러 손을 뗐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미래의 내가 그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흠, 아무래도 그건 싫은데···. 얼른 돈 벌어서 성형이나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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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건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