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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팜
여기 토마토 한 알이 있다. 평범한 열매인 듯싶지만, 이 값진 결실을 만나기 위해 아버지 원건희 대표는 숱하게 “그래도”를 외쳤다. 누군가 좀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 있대도, 꼭 그 길이 아니어도 괜찮대도. 아들 원승현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 배웠다. 누가 뭐래도 지켜야만 하는 것에서 물러섬이 없는 두 사람은 똑 닮았다. 아버지의 농업 철학을 이어받아 아들이 2대째 토마토를 키우는 농장. 이곳의 이름은 ‘그래도팜’이다.
1983년 강원도 영월. 원건희 고문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보기로 했다. 화학 비료와 농약으로 작물을 빠르게 키우는 것이 당연하던 시기였지만, 아내를 생각하면 더 이상 그리 할 수는 없었다. 함께 일하며 밭에서 농약을 조금만 써도 몸이 무척 약한 아내는 며칠을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의 유기농 농사가 시작됐다. 지금이야 유기농은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어리석은 방법이라며 손가락질 받기 쉬웠단다.
아내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멀찌감치 떨어져서 본 기존의 농법은 두렵고 낯설게만 다가왔다. 사람을 위한 결실을 키워내는 데 사람에게 해로운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에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하든 원건희 고문은 고집스럽고도 묵묵히 유기농만을 추구했다. 화학 비료 대신 천연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렸고,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크기가 조금 작은 농산물도 시장에 내놓았다. 그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였다.
원건희 고문이 자신의 길을 개척할 무렵, 조그만 아이도 품에 안았다. 아버지의 농장을 곁에 두고, 작은 시골에서 자라난 아이는 텔레비전 속 자동차 디자이너를 보고 디자인을 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림을 배우기 위해 화실을 오가고, 원하는 미술 대학까지 들어가려 애썼다고. 그렇게 디자이너가 되어 서울에서 바삐 살아가던 어느 날, 아들 원승현 대표는 자신의 감각을 살려 아버지의 농장을 브랜딩해 보기로 했다. 큰 결심보다는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가벼운 마음에서였다.
본격적인 브랜딩 전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그동안 아들이 몰랐던 부모님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한때는 아집이라고도 생각하던 아버지의 유기농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원승현 대표는 부모님의 농장에서 월급을 받고 새벽 5시에 일어나 밭으로 향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휴일도 없는 일상에 몸은 고단했지만 원건희 고문이 심은 땅의 가치는 아들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원승현 대표는 이제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보기로 한다. 아버지가 세운 농장의 철학, ‘삼생三生’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삼생은 땅이 식물을 살리고, 식물이 사람을 살리며, 사람은 다시 땅을 살려야 한다는 의미다. 건강한 토양에서 더 건강한 농산물이 자란다는 일념 아래, 아들은 디자인 감각을 살려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은 브랜드의 이름은 ‘그래도팜’. 실패를 겪으면 ‘그래도 해봐야지.’, 생산성이 우선 아니냐 물으면 ‘그래도 그럼 되겠느냐.’ 말하는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원농장 풍경.
원승현 대표는 2015년 첫 발을 뗀 그래도팜의 두 기둥을 ‘땅’ 그리고 ‘종’이라고 말한다. 땅은 아버지가 중요하게 여긴 가치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비료와 약을 쏟아붓는 것이 아닌, 토양과 사람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아들도 지키려 했다.
원 대표만의 농사 철학도 생겼다. 그래도팜의 두 번째 기둥, ‘종’이다. 그는 해외 출장에서 만난 에어룸 토마토를 한국에서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에어룸 토마토란 수확한 작물에서 직접 씨앗을 받아 다시 심어 얻은 토마토를 말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농부들이 씨앗을 심는 방식과는 다르다. 보통 농가들은 ‘F1 종자’를 사서 심는데, 우수한 형질을 갖춘 작물을 교잡해 만든다. F1 종자는 자가 채종이 불가능하고 우수한 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에어룸 토마토는 ‘가보’ 종자라고도 불린다. 원승현 대표는 세계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품종을 계속해서 보존하면서도 독보적이고 다채로운 토마토를 한국에도 소개하길 원했다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 그래도팜을 운영하듯, 에어룸 토마토가 끊이지 않고 열매 맺는 모습을 그는 즐거이 바라본다.
승현 대표의 토마토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졌다. 수확량이 적고 재배도 쉽지 않기 때문에 에어룸 토마토를 원하는 이들은 그래도팜부터 찾는다. 수확물이 제맛을 잃지 않도록 직거래도 활성화되어 있으며, 냉장 보관 없이 빠르게 소비자에게 배송된다. 일반적으로 표면이 단단한 토마토와 달리 말랑하다는 말도 있지만, 원래 말랑할 때 먹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시중에서 만나는 열매가 단단한 이유는 이른 수확 때문이라고.
땅과 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기준 높은 요리사들에게도 통했다. 미쉐린에 이름을 올린 곳이나 파인다이닝 등에서 그래도팜의 상품을 즐겨 찾는다. ‘정식당’, ‘두오모’ 등 에어룸 토마토를 소비하는 곳도 300여 곳이 넘는다.
원 대표는 토마토를 더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그래도팜의 소비자 경험 브랜드인 ‘토마로우Tomarrow’도 운영 중이다. 그래도팜이 재배 중심이라면, 토마로우는 농촌 경험 프로그램을 선보이거나 토마토를 활용한 가공식품을 제조하기도 한다. 아들의 브랜딩적 사고로 아버지의 원농원은 그 가치를 유지하며 시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오늘도 나아가고 있다.
원승현 대표의 브랜딩으로 새롭게 태어난 농장.
그래도팜은 브랜드 토마로우를 통해 소비자가 더욱 풍성하게 토마토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전에 본 적 없는 다채로운 농장은 아들 원승현 대표의 디자인적 감각이 담겼다. 이곳에서 그간 익숙했던 붉은 열매의 몰랐던 면면을 살펴본 이들은 토마토와 함께하는 색다른 내일을 그려본다.
토마토의 붉은 빛을 담은 유리 온실. 토마로우만의 미식 프로그램 ‘플레이버 오브 토마로우’가 열리는 장소다. 해설사와 함께 농장 곳곳을 둘러본 뒤, 이곳에서 수확물을 활용한 네 가지 요리를 차례로 맛볼 수 있다. 다양한 에어룸 토마토를 먹어보며 내 취향의 품종을 찾아보는 경험도 가능하다. 처음 보는 독특한 열매를 즐겁게 맛보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라니, 예약된 인원만 프라이빗하게 참여할 수 있어 우리만의 시간을 보내기에도 제격이다.
농장 안에 자리한 도서관은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다. 농업 전반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원승현 대표는 독서 공간을 마련해, 농촌과 식재료 그리고 환경과 토양까지 그래도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도서를 여덟 가지 카테고리로 이곳에 모아두었다. 밭을 거닐고 미식 프로그램을 경험하며 눈과 입을 깨웠다면, 독서 공간에서 잠시 쉬어가며 농업과 미식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내디뎌 봐도 좋을 터. 농장 방문객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좋은 토양은 맛있고 건강한 결실을 보기 위한 필수 요소란다. 원농원 시절부터 땅을 무엇보다 귀중하게 여긴 아버지 원건희 고문의 시선을 이어받아, 원 대표 또한 건강한 흙을 농장의 기둥과도 같이 여겨왔다. 쏘일 갤러리에서는 우리가 밟고 선 흙이 얼마나 농작물에 중요하며, 흙은 어떤 다양한 모습이 있는지 전시물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토록 땅을 아끼는 농부의 손에서 자란 열매라니 부자의 토마토밭을 좀더 든든한 마음으로 살피게 된다.
원승현 대표의 그래도팜은 땅과 토마토를 진심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움텄다. 아버지가 물려준 농업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아들은 농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토마토를 심고 가꾸는 법을 알린다. 앞으로 그래도팜은 어떤 발걸음을 이어갈까. 그에게 그래도팜의 내일을 물었다.
디자이너로 일하다 농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농업 정신을 잇고 싶었어요. 예전에 아버지께서 농업은 장인이 없는 산업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농사는 반년 또는 1년 단위로 진행되니 평생 농사를 100번도 못 지어본다고 하시면서요. 연습을 100번도 못 해봤는데 어떻게 장인이 탄생할 수 있냐며 대물림을 통해 농업의 가치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죠. 일본처럼 세대를 거쳐 오랫동안 가업을 이으면 축적된 노하우도 전수될 텐데, 한국은 길어야 4대예요. 아버지 말씀에 공감했고, 농장의 정신이 이어지길 바랐어요.
대표님은 가족이 아니더라도 토마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농업인으로 육성하신다고요.
네. 얼마 전 한 부부가 저희 농장의 교육 프로그램을 마쳤어요. 이제 또 다른 친구가 들어오는데 한 사람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어렵기도 하지만 첫 단추를 꿰었으니 앞으로도 계속해 보고 싶어요.
‘건강한 땅’을 중요시하는 아버지의 농사 철학은 대표님이 토마토를 재배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죠?
건강한 땅은 그래도팜의 핵심이에요. 땅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 작물의 향이 발현되지 않거든요. 땅에 뿌리는 화학 비료의 무분별한 오남용은 작물이 본래의 향을 잃는 주된 원인이고요. 우리나라에서는 화학 비료에만 의존한 재배, 이른 수확, 냉장 보관처럼 농산물의 맛을 그대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흔히 쓰여요. 그래서 저희가 농장에서 토마토를 맛보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거예요. 현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온전한 토마토의 맛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향을 살리는 땅은 저희 브랜드의 소명이라고도 봐요.
토마토의 향이라니 조금 생소하기도 해요.
토마토는 잔향을 느끼게 하는 휘발성 성분을 갖고 있어요. 그 성분으로 발현되는 잔향은 오십 가지가 넘고요. 어떤 사람은 그 성분을 레몬처럼 느끼고, 어떤 사람은 사과 향을 느끼는데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비아 토마토에 사과 향 감미료를 뿌린 것과는 달라요. 그런데 소비자들은 식재료의 다양한 향을 잘 모르고 살아가죠. 또 자신이 어떤 품종을, 어떻게 조리해 먹는 걸 좋아하는지 알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엔 ‘맛집’이라는 표현이 흔한데,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일이기도 해요. 맛에 대한 기준이 획일화된다는 거니까요.
앞으로 그래도팜과 관련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어요?
농장을 브랜딩할 수 있는 청년들을 육성해, 그래도팜 산하에서 다양한 농작물을 판매하는 브랜드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려 해요. 지금의 토마로우처럼 딸기, 멜론 등을 다루는 브랜드를 만드는 거죠. 최종적으로는 교섭력을 지닌 그래도팜이 되는 게 목표예요. 많은 브랜드가 모이면 하나의 마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한국에서 농업과 농업인의 위상을 높이고 싶어요. 예를 들어 저희 교육 프로그램이 3년 과정인데, 누군가는 왜 그렇게 기간이 기냐고 이야기해요. 이모작이라고 치면 겨우 여섯 번 배우는 건데 말이죠. 이만큼 농업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아요. 학술적, 산업적으로 충실한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게 그래도팜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에디터 차의진
자료 제공 그래도팜, 틈새책방